세종시 부강면의 老姑山城, 애기바위성, 華峰山城 답사
▣ 2014. 7. 22. 오후
▣ 세종시 부강면 문곡리
▣ 노고산 (老姑山 305m)
노고산성은 지나갈 때마다 '저 산을 한 번 가야지' 하고 생각만 했는데 오늘은 준비도 없이 그냥 갔다. 서원대 평생교육원에서 강의가 끝나고 그냥 차를 부강으로 돌렸다. 가방도 없고 물 한병도 없이 그냥 ……. 부강 약수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바로 산에 붙었다.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웃기는 말로 청원군이 이렇게 잘 만들어서 세종시에 헌납한 것을 생각하니 좀 아깝기는 하다.
입구에 고구려산성 탐방이라고 적혀 있어서 정말 이 산성이 고구려 산성인가, 고증된 것인가 의문이 생겼다. 삼국의 역사에 의해서 고증이 된 것인지 아니면 성곽의 생김새나 축성 양식에 의해 고증된 것인지 의문스럽다. 내가 본 고구려 산성은 단양 온달산성밖에 없다. 그러나 온달산성도 신라의 산성인지 고구려 산성인지 확실히 고증이 되지 않았다. 전설상으로는 고구려 산성이지만 축성양식이나 역사적으로 보면 신라의 산성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구려 산성이란 말을 외며 한 500m쯤 올라갔는데 어떤 남녀가 길가에 자리를 펴고 마주 앉아 있다. 가까이 가도 떨어질 줄 모른다. 자세히 보니 남자는 50대 초반, 여자는 30대 후반처럼 보였는데 내가 지나가도 떨어질 줄 모른다. 오후 기온은 아무래도 33도 이상 되는 듯한데 사랑이 좋기는 하구나. 의문이 또 하나 생겼다. 어떻게 50대의 입술이 30대의 입맛에 맞을까? 50이면 천명을 아는 나이라는데 저들도 이 산성의 의미를 궁금해 하고 있을까? 이 산성을 짓는데 동원된 남편이 자기 여자를 그리워 하며 산정에서 흘리던 눈물을 알까? 낭군을 기다리던 여인의 아픔을 알기는 할까? 온갖 상념에 젖었다.
처음 오르막길이 가파르다. 땀이 많이 흐른다. 등산객이 없으니까 날파리들이 내게도 거침없이 달려든다. 성에 오를 때마다 나는 항상 축성의 고통을 생각한다. 이 부근 주민들이 노역에 동원되어 생업도 가계도 다 엉망이 되고 다치거나 죽는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어떤 보상을 받았을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 아프다. 국가의 동원령에 불려나온 사람들의 부역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아마도 축성의 일이었을 것이다. 세종 하이텍고등학교(전 부강공고)가 있는 문곡리나 노고산성 주변의 등곡 1,2리 노호리 사람들이 가차없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남쪽으로 노호리와 서쪽로 등곡2리는 내가 부근 초등학교에 근무할 때 학구여서 가끔 방문한 적도 있었다.
한참을 올라가니 노고산성과 화봉산성으로 가는 갈림길에 노고산성과 애기바위성에 대한 안내 돌비가 나왔다. 그런데 그 설명이 모두 전설에 많이 의존한 것이다.
주변 산성 위치 안내도
노고산성 안내 표지석 내용
노고산성(老姑山城) 청원군 부용면 등곡리 산 46-1
부용면 지역의 중심부에 우뚝 솟은 해발 305m 노고봉(老姑峰)을 둘러싼 석축산성으로 둘레는 196m이다. 산성의 평면 형태는 동-서 방향으로 긴 타원형으로 서쪽이 좁고 동쪽이 넓다. 성내의 규모는 동-서 방향의 길이가 70m정도이고 남북 방향의 길이가 42m 정도이다. 이 노고산성은 금강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지역으로 부용면 지역에 남아 있는 10개의 산성 가운데 중심적 위치에 있으며, 성안에서 삼국시대의 토기와 기와조각이 다수 발견된다.
-부용면 주민자치위원회- 2010년 4월 감수: 역사학박사 박상일 문안작성 :부용면장 이규상
역사학자의 감수를 거쳤다는 말은 그 만큼 가치를 부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면장이 직접 안내판을 쓰는 경우도 처음 보았다. 아니 안내의 글에 쓴 사람의 이름을 적어 놓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면장이 성곽에 대한 이 정도의 글을 쓸 수 있다면 그분도 역시 역사학자 아니면 성곽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쉬운 것은 노고산성에서 화봉산성에 이르는 길을 왜 고구려산성길이라고 했는지 언급이 없다. 갈림길 바로 옆에 애기바위성 안내 표지석도 있었다.
애기바위성 표지석 내용
애기바위성(城) 청원군 부용면 등곡리 산 19
노고산성의 남서쪽 해발 291m 정상부에 있는 석축 산성으로 성 남쪽 45m 정도 떨어진 위치에 애기바위가 있어 애기바위성이라 불린다. 성의 형태는 북동-남서 발향으로 긴 타원형으로, 둘레는 123.8m 정도이며 봉수터로 전해지고 있다. 애기바위는 황소가 장수 아기를 낳았다는 전설이 깃든 바위로서 여러 형태의 흔적이 있는데 초ㅚ근 조사한 결과 동물의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족적이 남아 있어 주목된다. 성내의 출토유물은 대부분 경질의 회색을 띤 삼국시대 토기편이다.
-부용면 주민자치위원회- 2010년 4월 감수 : 역사학박사 박상일 문안작성 :부용면장 이규상
1. 애기바위 성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가파른 길을 숨가쁘게 올라가니 바로 애기바위성으로 불리는 보루 같은 바위성이 우뚝 앞을 막아선다. 앞에 봉화대라고 팻말을 붙여 세워 놓았다. 한 10m 정도의 높이를 올라가 보았다. 한 2~3평 정도 되는 평평한 곳에 풀이 무성하다. 사방이 높은 보루 같은 모양이어서 누가 기어오를 수도 없고 그냥 내려 뛰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나무만 없으면 사방을 조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남쪽으로는 노고산이 막아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봉화대라면 분명 북쪽으로 봉화를 올려 연락하는 봉화대 같았다. 그래서 고구려 산성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동쪽 서쪽 북쪽으로 부용면 지역이나 금강 유역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보루 역할도 충분히 해낼 수 있었을 것 같았다. 군사들이 한 5~6명 정도 주둔하면서 주변을 살피는 보루 역할을 하다가 유사시에는 봉화를 올려 위급한 사태를 상급부대에 알리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여기서 회색 토기조각이 나왔다고는 하나 땅을 파고 확인해 볼 수 없을 정도로 잡초가 무성하다.
내려와서 이 보루를 한 바퀴 돌면서 축성의 흔적을 발견하려고 나무와 풀을 헤치면서 찾아 보았다. 자연적인 커다란 바위를 토대로 해서 작은 성돌을 이어 쌓은 흔적이 보였다. 최근에 다시 쌓은 것은 분명 아니었다.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서 쌓았는데 성치산성이나 삼년산성에서 본 것과 같은 방법으로 볼 수 있었다. 이 보루를 쌓기 위해서 정교하게 다듬은 돌만 몇 개만 옮겨서 쌓은 것으로 봐서 그렇게 큰 힘은 들지 않았을 것 같았다. 성돌은 가로 50~60cm, 세로 30cm, 두께 25cm는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돌은 분명 어디서 옮겨 오거나 이 곳의 커다란 바위를 다듬어서 사용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축성에 사용된 돌이 이곳의 바위와 재질이 같은 것으로 봐서 여기 돌을 다듬어 쓴 것으로 볼 수 있었다. 또한 돌과 돌 사이에 무너지지 않게 쐐기돌을 박을 것으로 봐서 꽤 정교한 기술이 소요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 축성한 것이라면 돌을 옮겨오는 일이나 다듬는 일에 상당 기간 민중을 동원했을 것이다. 이 정도의 보루를 만드는 토목공사를 산 정상 부분에서 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이렇게 유용한 보루를 설계한 것은 그 만큼 전쟁에 대한 많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높이나 넓이로 봐서 봉화를 올리거나 주변을 경계하는데 상당히 유용하게 쓰였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애기바위성의 모습
봉화대로 활용했던 애기바위 산성(북쪽에서)
남쪽에서
석축을 쌓아 올린 흔적이 남아 있다- 비교적 정교하게 다듬은 성돌이고 쐐기 돌을 박은 흔적도 보인다
봉화대 자리엔 잡초만 무성하다
봉화대 자리
2. 노고산성
애기바위성에서 노고산성은 남쪽으로 얼마되지 않는다. 마지막 가파른 길을 조금 올라가니 사방이 탁 트인 성의 내부가 나타난다. 노고 산성은 노고산 정상부를 빙 둘러싸면서 타원형으로 쌓은 테메식 산성임이 뚜렷하다. 군사는 한 40명 정도 주둔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많게는 100명까지도 가능할 것 같았다. 성내에서 보니 북쪽으로는 산세가 완만하지만 남쪽으로는 경사가 급해서 성으로 기어 오르기가 쉽지 않아 매우 효과적인 방어 수단이 될 것 같았다. 성 전체의 둘레가 〈청원군지>나 ><한국의 성곽과 봉수>에 196m정라고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어림짐작으로 봐도 그보다는 더 클 것 같다.
북쪽 경사면에 무너진 성벽으로 보이는 돌무더기는 봉수대를 쌓은 성돌처럼 정교하게 다듬은 돌이 아니고 그냥 자연석인 막돌이었다. 처음에는 너덜이 아닌가 했으나 이 산이 너덜이 있을 산으로 보이지 않아 무너진 성돌이고 자연석으로 쌓은 성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돌무더기를 헤집으면서 살펴보면 기와편이나 토기편이 발견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성내를 돌면서 등산 스틱으로 헤집어 봐도 그런 인공의 파편이 발견되지 않았다. 지표조사를 하기 전에 부용면에서 이미 많이 훼손한 것으로 보였다. 성의 형태는 많이 남아 있어도 토성으로 착각할 만큼 성은 흙 속에 묻혀 버렸다. 그러나 그 형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 흙 밑에는 성돌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책적인 보호가 시급하고 아쉽다.
성 위에서는 사방이 다 보인다. 동으로 척산의 봉무산으로부터 부강에서 현도로 흘러가는 금강이 훤하게 내려다 보인다. 북으로는 부강면 소재지 마을과 세종시 아파트촌까지 한 눈에 보인다. 이 곳이 이 지방의 요충지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노고산성이 군사적 요충지로 대접 받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멀리 세종시의 첫마을 아파트촌이 하얗게 보인다. 또한 정부청사 부근의 웅장한 건물들이 다 보인다. 이 성을 쌓으면서 여기 행정 수도 역할을 하는 이른바 '행복도시'가 들어서고 행복도시 근방의 금강 상류에 저렇게 아름다운 다리들이 들어설 것이라는 것을 짐작이나 했을까? 나는 30여년전 노호리, 등곡리 등에 가정 방문을 다니면서 이곳에 성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것처럼 이 성을 쌓으면서 오늘을 예견한 영웅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고 바다가 다시 뽕나무밭이 된다지만 30년 만에 변한 이 고장을 높은 곳에서 훑어보는 마음이 스산하기 이를데 없다.
부강면에서 그랬는지 청원군에서 그랬는지 성내를 평평하게 닦고 여러가지 구조물을 만들어 놓았다. 운동기구를 올려다 시설을 해 놓고, 데크를 설치해서 전망대를 만들어 놓고, 원탁 의자까지 들여 놓았다. 완전히 놀이판 일색이다. 지표조사 후에 이렇게 한 것인지, 그렇더라도 문화재를 이렇게 훼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데도 힘든데 누가 기본 체력 향상 운동을 한다고 아파트나 체육공원에나 있을 법한 운동시설을 해 놓았다. 삼국시대부터 오늘까지 이어온 문화재 위에 이렇게 놀이판을 만들어도 되는 것인가? 이것을 기획한 공무원들은 당시 민중의 아픔을 생각이나 했을까? 목민관은 민중의 아픔을 먼저 생각하고 난 다음 즐거움을 맛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냥 책상에 앉아서 아니면 면장이나 군의원이 회식 자리에 앉아 이러이러하게 만들면 어떨까 하면서 나눈 이야기를 주무자가 실행에 옮긴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심지어 '부녀회장의 글도 한편 올려주고'하면서 면장이나 지방민들이 되지도 않는 농담 같은 글을 아크릴 판에 새겨 놓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안내판처럼 서 있는 그 글이 주변 산세를 설명하거나 지역 지리의 변화를 알려주는 시설물로 생각했는데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정말 웃기는 농담도 있다.
노고산성에는 '늙은 시어머니산'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대전시 동구 직티리의 노고산성이나 보은의 노고산성이나 전국의 많은 노고산 또는 노고산성에는 비슷한 유형의 전설이 전해진다. 이곳에 전해지는 전설은 약한 며느리와 성격 나쁜 시어머니의 '힘겨루기' 전설이다. 시어머니 전설과 오누이 힘겨루기 전설이 합해진 이야기이다. 초정의 구녀성은 오누이 힘겨루기 전설인데 비해 노고산성은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힘겨루기 전설이다. 전설의 경우 대개 주인공이 패배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데 이곳 전설은 나쁜 시어머니가 패배하여 권선징악의 민중의 정신이 부도덕한 시어머니에 대한 응징하는 민중 심의로 승화하여 내포되어 있었다. 전설은 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되면서 지역과 민중의 가치관에 의해 변형 굴절되는 경우도 많으니까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북쪽에서 노고산성으로 올라가는 부분 무너진 성돌이 흩어져 있다.
노고성 전설
흙에 덮인 석성
노고봉 정상석과 삼각점
한량들의 놀이터 그옆에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 표지판도 있다
산불감시초소와 잡초더미
개망초와 여러가지 꽃
무궁화
봉무산
세종시
노고산성에서 내려와 애기바위 쪽으로 갔다. 애기 바위에서 바로 약수터로 내려가는 삼거리에 애기바위와 거북 바위가 있고 애기 바위 전설을 알리는 알림판이 서 있다. 이 전설은 아기장수 우투리 유형의 전설인데 아기장사가 태어나는 과정의 기이성만 있고 장사 아기가 장수로 성장한 다음에 이루어지는 비범한 행적이 없었다. 대개 아기장수는 기이하게 태어나서 그 비범한 능력을 보이지만 비극적 결말을 맞아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는데 여기는 그런 내용이 없다. 대개 구비문학에서 전설은 몇 개의 유형이 있고, 그 지역의 자연적 인위적 특성에 따라 조금씩 변개되어 전해지게 되는데 애기 바위 전설은 장수 아기의 태어남을 중심으로 태어나는 과정만 있고 더 중요한 뒷날의 행적이 없어서 바위에 '애기바위'라는 이름이 붙게 된 유래만은 강조하다가 뒤의 이야기를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거북바위 전설은 없었다.
애기바위 전성 알림판
애기바위
애기바위
거북바위
3. 화봉 산성
사람들이 화봉산성은 잘 가지 않나 보다. 애기바위부터는 길은 뚜렷하게 있지만 잡초가 우거져 걷기가 불편했다. 준비 없이 왔어도 차 안에 늘 가지고 다니는 등산화를 신고, 한 개라도 스틱을 가져 오기를 잘했다. 화봉산성까지 가는 길은 그냥 능선이 아니라 애기 바위에서 급한 경사를 한 15분 이상 기다시피해서 내려가야 했다. 나뭇가지와 풀이 길을 점령하고, 아카시나 산딸기 덩굴이 팔에 스쳐 따갑다. 한참을 그렇게 내려가니 수렛길이 나왔다. 등곡2리에서 등곡1리나 노호리로 가는 옛길 같아 보였다. 그쯤에 갑자기 수렛길 절개지 바로 위에 '화봉산성'이란 푯말이 나무가지 속에 숨어 있었다.
산봉우리는 아직 멀었는데 갑자기 푯말이 나오고 성터는 보이지도 않고 길도 희미해서 그냥 등곡 2리로 내려갈까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것이 아깝기도 해서 스마트폰을 열어 이효정 선생님 산행기를 보니 여기서 8분이란다. 그러면 나도 10분이면 가리라. 땀에 온몸이 젖고 갈증에 견딜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점심도 초코파이 하나랑 쿠기 한 조각으로 때웠다. 그래도 다시 화봉산성을 찾아오는 것보다는 지금 올라가는 것이 나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억지로 힘을 냈다.
경사 급한 길을 한 7~8분 올라가니 뚜렷한 성의 모습이 보였다. 성벽의 흔적을 파헤져 보기 전에는 토성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석축 산성이다. 이 산성은 등곡리 등골(등곡1리)서북쪽으로 있는 화봉(252m華峰)에 있는 산성이다. 잡초가 우거진 성 위를 미친 사람처럼 헤집고 다녔다. 그런데 이 성을 테메식이라 해야 할지 포곡식이라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삼각점이 있는 지점에는 화봉이라는 안내판도 정상석도 없다. 그리고 화봉산성의 안내표지판도 없다. 주변에 잡목이 꽉 들어차서 산 아래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에서 가만히 서서 마을 방향을 살펴 보았다. 그리고 옛날 30년전 기억을 더듬으면서 주변 산야를 살펴 보았다. 서쪽으로 부강에서 매포로 가는 도로가 있고 그 주변에 현도 쪽에서 노호리 등곡1리를 지나 부강 쪽으로 등곡2리가 있다. 노호리와 등곡1리가 내가 근무하던 학교의 학구였다. 노고산성은 남쪽으로 있고 부강은 동쪽이다. 그렇게 보니 노호리 마을을 감싸안은 테메식 산성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정상부를 마치 보루를 만들듯이 테메식으로 둘러싼 산성이다. 아니면 정상 봉우리 부분의 토사가 세월을 지나면서 성벽까지 밀려내려와 평평한 평지처럼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곳에 왜 성이 필요했을까? 남쪽으로는 노고산성으로 꽉 막혀 있다. 이것이 고구려 산성이라면 노고산성을 공격하기에 필요한 산성이 될 테고, 신라 산성이라면 노고산성의 본대에서 첨병이나 정찰대가 나와 있는 부속성이라고 볼 수 있다. 성의 쓰임새를 추리하기 위해서는 현재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생각하고 각기 두 편의 군사 진지를 상상하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런 가운데 여러가지 전투 형태 경우에 따른 성곽과 보루의 쓰임새를 상상해 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여기는 노고산성의 본대에서 첨병으로 나온 몇 분대의 군사가 주둔했거나, 예하부대가 부강 나루에서 회인으로 향하는 적을 감시하다가 초전에 박살내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나즈막한 이곳이 성을 쌓고 금강으로 들어오는 배를 감시한다든지 서해에서 금강을 통하여 부강 나루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수군의 상륙을 여기서 초토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막지 못하면 문의로 염티를 넘어 회인으로 보은으로 가는데는 순식간의 일일 것이다. 성을 다시 한번 돌아보니 분명 일부는 겹성으로 보였다. 등곡2리쪽 동쪽으로는 계단식 다랑이 논처럼 만들어진 겹성이다.그 만큼 이 성은 낮은 곳에 위피하고 있지만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성내는 상당히 너른 부분이 평평한 것으로 보아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잡초와 나뭇잎에 묻혀있는 토기편이나 기와 편을 찾아볼 수 없다. 지표조사를 하면 건물터나 우물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석축도 모두 흙에 묻혀 있다.
화봉산성 표지판
석축은 보이지 않고 토성처럼 그러나 뚜렷한 성터
뚜렷한 성터
성벽
겹성임을 알 수 있다.
나무에 묻혀 있으나 성벽의 모습
돌아오는 길은 등곡리로 내려가는 수렛길을 택할까 하다가 애기바위성을 다시 돌아보고 싶어 되짚어 왔다. 내려갈 때는 힘들었던 비탈길이 오히려 올라가는 길이 더 쉽다. 네 시간 땀 흘린 걸음이 그보다 더 한 소득을 올린 것 같다. 약수터에 내려와 약수 한 모금을 마시니 초정 약수 맛과는 전혀 달라 마시지 못하겠다. 가게에 들러 500원짜리 물 한 병을 마시니 온몸이 다 씻어지는 기분이다. 그동안 중지했던 산성 돌아보는 일도 다시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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