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 1월호 월평자료>
고인(古人)과의 대화
이정인
달이 잔뜩 웅크리고 있다. 그날 밤 그 하늘이 그대로 머물러있는 것 같다. 차마 잊을 수 없는 그날 생각에 가슴 한 구석이 싸해진다. 정월의 싸늘한 바람에 어둠이 흔들린다. 칠흑 같은 밤에도 길을 잃지 않는 바람, 옛사람은 바람의 길로 오는 듯하다.
처연히 떠있는 달이 낯익은 시선처럼 느껴진다. 아버지가 옛사람으로 떠나가시던 그 삼경의 하늘에도 하현달은 저렇게 새초롬히 보고 있었다. 주뼛주뼛 머리칼이 서는 날선 찬바람과 함께. 벌써 다섯 번째 돌아오는 기일이지만 여전히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어디쯤 계시는지, 정녕 오시는지, 먼 길 오신 김에 꼭 한 번 꿈에 다녀가시길 간절히 빌어본다.
문득 헛기침하며 대문을 들어서시던 옛 생각에 고개를 돌려보지만 칙칙한 백열등 밤 그림자만 길다. 허한 마음에 하릴없이 밤하늘만 바라본다. 들리는 듯 들리는 듯 그 목소리 애써 되새겨보노라면 안부전화 한 통에도 수화기를 붙들고 망설이던 기억이 가슴을 찌른다. 이제는 너무 멀어져간 한 사람, 정작 아버지 생전에는 뒷걸음만 치던 생각에 때늦은 안달이 부끄러워진다.
야윈 달이 아슬아슬 어둠을 붙잡고 흘러간다. 힘들게 겨우 뜨고 계시던 아버지의 눈매 같다. 한 번 감아버리면 다시는 아침 해를 못 볼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눈동자가 아려보였다. 어느 순간 더 수척해질 것도 없던 아버지는 하루하루 이지러지는 하순의 달처럼 자꾸자꾸 눈이 가늘어졌다. 그 실눈 속에 응집된 설움은 강렬한 정기처럼 반짝였다.
보름달 같았던 아버지의 눈빛은 유년의 기억 속에만 아른거린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할 무렵 이미 아버지는 어깨 힘도 눈힘도 서서히 반달처럼 약해지고 있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달빛의 소중함을 확인하듯 아버지의 빈자리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존재감을 느낀다. 달이 차고 기울어도 본질은 그대로인 것처럼 아버지의 존재감도 그러하다는 것을 그때는 잘 몰랐다.
이제와 생각하니 아버지의 삶은 은은한 달빛 같은 것이었구나 싶다. 깊은 밤 고요히 떠있는 달처럼 있는 듯이 없는 듯이 묵묵한 존재로 계시었다. 팔십 평생 나고 자란 터전을 지키고 계시는 것이, 열 식구 가장의 짐을 지고도 고단한 티 한 번 내시지 않은 것이 한결같이 뜨고 지는 달의 마음 같은 것이었다. 밤하늘의 아득한 외로움도, 홀로 어둠을 가르는 두려움도 있었을 터이지만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아버지의 삶은 차고도 따듯한 달과 같았다.
어느 후미진 곳도 놓치지 않는 달빛처럼 고향집 구석구석 아버지의 손길이 선연히 남아있다. 낡은 서까래에 덧댄 양철처마에서도 이제껏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곳간 흙천장의 철망에서도 야문 손끝을 느낀다. 봄 한철에 풀밭이 되어버린 할아버지 산소를 보며 옛사람이 되어 떠난 아버지의 빈자리를 실감한다. 곳곳에 스며있는 아버지의 흔적을 느끼는 것 자체가 백 마디 천 마디 그 이상의 교감이다.
가끔 아버지 계신 곳에 앉아 무언의 소통을 나눌 때가 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봉분의 잔디가 짧은 머리카락 같다. 삐죽삐죽 자라난 잡초를 뽑으며 잔디를 헤집으니 병석의 아버지 머리를 감기던 촉감이 손끝에서 되살아난다. 그 공간에서만큼은 바람도 햇살도 옛사람의 체온을 실어오는 듯하다. 오래전 아버지 어슬렁어슬렁 선산을 자주 찾으신 것은 지금의 나처럼 못 다한 정을 달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생은 그믐달 같았다. 기억에도 없는 어머니를 고인으로 그리워한 슬픈 유년과 끝내 보름달이 되어 주지 못한 가장의 빈자리에 정이 고팠다. 생각만 스쳐도 아팠을 상처는 아물기나 했는지, 일생을 관통했을 휑한 찬바람은 어찌 잠재우셨는지 때늦은 의문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이토록 궁금한 것이 많을 줄 그때도 알았더라면, 듣고 싶은 이야기 이토록 많을 줄 그때도 알았더라면.
허공에 걸터앉은 달 점점 어둠을 파고든다. 신발로 괴어둔 문이 바람에 삐걱대는 순간 아버지 정녕 옛사람으로 오신다는 느낌이 든다. 잿빛 도포자락 정갈하게 여민 후 손수 지방을 쓰시던 아버지는 이제 저 너머에 계신다. 병풍을 두르는 무던한 행동 하나에서도 넘을 수 없는 경계를 실감한다. 비록 옛사람이 되셨어도 아버지는 여전히 병풍처럼 자식들의 바람막이가 되어주실 것 같다.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인생이란 말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3대째 내려오는 오동나무 제상처럼 삶의 의문과 깨달음도 그렇게 세월 속에 대물림되는 것임을. 절을 올리며 묻어둔 말을 쏟아내고 싶었지만 결국 ‘아버지!’ 한 마디로 축약되고 만다. 떠난 줄 알았지만 아주 떠나지 않은 이, 보내고도 차마 보낼 수 없는 이 그가 옛사람이다. 시간이 갈수록 삶 켜켜이 마음 올올이 깃드는 이 그가 옛사람이다.
깃털처럼 가볍게 타오르는 소지가 한 줌 허공이 된다. 옛사람 훨훨 불꽃나비가 되어 돌아간다. 세월에도 사를 수 없는 먹먹한 슬픔은 가슴 속 한 길 추억으로 파고든다. 살며시 어깨를 두드리는 바람 잡초 같은 기억도 아름다운 거 그거 生이라 한다. 찰나의 영감처럼 스치는 말 시름겨운 날도 그리운 거 그거 生이라 한다.
노곤히 휜 달 지그시 눈을 감는다.
*이정인
《한국수필》, 경남신문 신춘문예(수필) 등단.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회원.
새해 나들이 나서는 당신에게
김이경
2015년에 들어 첫 전화가 왔습니다. 우아한 점심을 먹고 근사한 전시회도 구경하자고 하네요. 그때 당신의 가슴에서 “쿵” 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것은 당신이 몹시 기뻐하거나 긴장할 때 나는 소리예요. 맞죠? 퇴직 후 친구들을 만난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지요.
당신은 거울 앞에 섰군요. 친구는 미모가 뛰어납니다. 그래서 그녀와 같이 하는 자리에서 당신은 늘 주눅이 들더군요. 옷을 이것저것 걸쳐보지만, 그다지 맘에 드는 것이 없나요? 여자들은 흔히 그런 말을 하지요.
“입고 나갈 옷이 없어.”
그런데 그런 여자들의 옷장에는 대부분 옷이 가득합니다. 지금 당신도 그런 것 같네요. 너무 많은 옷 중에서 고르지 못하는 것 아닌가요? 너무 망설이지 마세요. 옷장 한쪽에 걸려 있는 갈색 점퍼가 어때요? 그리고 연두색 바지가 보이네요. 지금 입기엔 춥지도 않고 너무 가벼워보이지도 않아요. 그걸 입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너무 캐주얼하다고 말하고 싶지요? 알아요. 40년이 넘도록 정장차림에 익숙한 당신에게 약간 헐렁해 보이는 점퍼와 복숭아뼈에 걸치는 조금 짧은 듯한 바지가 익숙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깔끔한 정장만 외출복이라는 생각은 이제 버리세요. 언제 누가 찾아올지 모르는, 그래서 늘 대기상태였던 긴장감에서 놓여난 지금은 점퍼차림도 훌륭한 외출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옷이 좀 오래되어 싫다구요? 저런, 유행타지 않고 예쁘기만 하구만. 사실은 색깔이 촌스럽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요? 그것은 당신의 융통성 없음 때문이에요. 나쁜 버릇 중의 하나지요. 정해놓은 규격, 정해놓은 색깔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 답답한 일이에요. 당신이 살아온 날들은 파란 날도 빨간 날도 있었어요. 노랗거나 초록이던 날도 한 켜 한 켜 쌓이다보니 여물지 못한 것들이 서로 섞이고 말았어요. 당신의 안경은 날마다 짙어졌어요. 그런데 당신은 아직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네요.
노인들을 왜 고집스럽다고 하는 줄 아세요? 그렇게 자기가 정해놓은 것만 옳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안경에 맞는 것 밖에는 볼 수가 없기 때문이랍니다. 제발 오늘은 그 안경을 벗어놓고 갔으면 좋겠어요. 갈색과 초록이 어우러진 새해 분위기를 즐겨보는 것도 좋지 않나요? 꽃무늬 머플러도 한 장 곁들이면 더 좋을 것 같군요.
아직도 친구의 미모와 비교될까 걱정인가요? 그녀의 미모는 타고난 거라 어쩔 수 없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미모에 연연할 나이는 아니네요. 차라리 그녀에게 없는 것을 찾아보세요. 당신은 그녀보다 너그러울 수 있고 차분할 수 있지 않나요. 먼지조차 호호 불어내는 깔끔하고 날카로움이 아닌 소박하고 천연스러움. 백자나 청자의 날렵함에야 미치지 못하겠지만, 질그릇의 투박함도 때론 멋스럽지 않던가요. 질그릇만 가질 수 있는 수수하고 편안함을 살려보세요. 그리고 기억하세요. 어느 나이가 되면 미모도 평준화 된다는 시쳇말이 정말 옳은 말이라는 것을요. 청자에는 구수한 된장국을 끓이는 법이 없다는 것도요.
그렇게 입어보니 어때요? 역시 촌스럽다구요? 조금 촌스러우면 어떤가요? 여섯 살 손주가 그린 그림 속에 당신을 기억하나요? 엉성하게 그렸어도 행복하지 않았나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손주가 그린 그림 속 당신은 참 우스꽝스러웠어요. 눈도 입도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뽀글거리는 머리까지 정말 희극적이었지요. 어느 곳 한군데도 당신과 비슷하지 않은 그림. 그런데도 당신은 그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쓰다듬으며 웃었잖아요. 손주가 “할머니”라고 불러주었으니 할머니가 되어버린 그 그림 앞에서 당신은 안경을 벗고 여섯 살 아이의 눈이 되었던 거예요.
어쩌면 지금처럼 세월의 문신이 지긋한 때에는 경국지색의 미모보다 수더분한 촌부의 편안함을 더 아름답게 보아주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친구의 그린 듯한 미모보다 당신의 조금 넉넉한 평수에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 나이 되도록 그런 것도 모르다니 원.
이제 준비가 끝났죠.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나가세요. 안경을 벗으니 걸음걸이가 불안한가요? 그러나 염려하지 마세요. 사람은 산에 걸려 넘어지는 법은 없다고 하잖아요. 당신을 넘어지게 하는 것은 고작 작은 돌멩이들일 뿐이에요. 걱정하지 말고 그냥 힘차게 발을 디뎌보세요. 이젠 되었어요. 그렇게 출발하는 거예요.
세상은 수많은 얼굴로 다가오겠지만, 있는 그대로 다가서서 손을 잡아주세요. 그러면 새해 벽두에 당신의 가슴이 따뜻해지고 고운 물이 들게 될 거예요. 약간의 촌스러움이 한껏 날아가고 싶은 자유가 되어 당신의 옷자락을 날개로 만들어줄지도 몰라요.
김이경 (본명 김경숙) : 2001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수필집 「멍텅구리 의자」,「가끔씩은 흔들리지 않아보는 거야」, 「숨비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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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돌보기
이 상 목
맞벌이부부가 늘고 아이가 귀해지다보니 자녀양육에 미치는 조부모 영향이 커지는 것인가. 올여름 나의 휴가는 손주돌보기로 대체되었다.
가까이 사는 큰 딸이 둘째를 출산한데다가, 1년 전부터 어린이집에 보낸 첫째 손주 여름방학 1주일이 끝나자, 나의 휴가가 시작되어 동생을 본 세 살 난 아이 어린이집 출입을 돕게 된 것.
내가 사는 마을과 딸이 사는 마을 사이는 버스로 다섯 정거장, 딸네 집에서 300m거리를 아침 9시 반에 데려다주고, 저녁 다섯시에 데려오는 일이다.
내겐 4.19직전, 70 가까우신 할아버지와 겸상하여 밥을 먹던 기억이 있다. 슬하에 6남2녀를 두셨던 할아버지가 당신 장남의 다섯째 아들(10살 정도였던 필자) 과 겸상했던 연유는 6.25로 자녀와 손자를 다섯이나 잃었던 아픔 때문 아닌지? 할아버지 가신 후 성년 되어 나는 그리 생각하였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우리 속담은 2011년 출생인 이 손주에게도 유용한 것 아닐까? 이 애는 2100년 너머까지 살 수 있을 것이다.
사대부가 손자를 키우면서 쓴 조선 최초의 육아일기에는 “보살피고 기르는 일이 진실로 쉽지 않지만 어렵다고 해서 어찌 감히 소홀이 할 것인가?” 라고 적고 있다.
나는 최근 목은 이색이나 다산 정약용의 외손자들도 좋은 글을 남겼다는 기사를 보았다.
아무튼 어린 손주 시중들기에 여름에 잘 안 걸린다는 감기까지 얻어 고생하다보니
“할아버지 감기 걸렸어?” 라는 손주의 위로까지 듣게 되었다. 어린이집은 주5일 운영하는데 도시락그릇, 장난감, 쉬를 잘못해 바꿔 입는 옷가지등을 챙겨넣은 손주가방에, 비옷·장화·우산 및 나의 출퇴근가방을 들고도 “할아버지 안아줘”를 거절 못하는 여름날은 더욱 더웠다.
그러나 현관문을 연 어린이방의 9명 또래. 어린왕자 : 어린공주를 대하는 일은 어린이집 출입의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아이들 방은 해 뜨는 동향이 좋고, 아이들 글 읽는 소리가 이어져야 집안이 융성한다 했던 “옛 살림 집” 이야기가 새롭다.
월요일 아침‘손주 모시러’간 할아버지 손을 꼬옥 잡고 “할아버지 보고 싶었어. 할머니도 보고 싶었어”라는 아이 특유의 재롱 섞인 말을 듣는 기분이 어떨지는 상상에 맡긴다.
오후 다섯시에 아이를 데리고 나와 어린이 놀이터에서 놀면서 바닥의 개미를 발로 밟으려는 아이를 나쁜 벌레가 아니니 그러면 안돼요 하면 아이는 잘 듣는다. 버스 정류장에 버려진 쓰레기를 보면서 줍고 치우는 사람이 “착한사람”하면 아이는 이를 익히고 따른다.
아이는 축복이요 희망이다.
자식을 낳고 기르는 일만한 효도가 어디 또 있겠는가
금요일 오후에 헤어진 할아버지를 월요일 아침에 만나도 “보고파” 하는 아이는 올 여름 저와 같이 한 할아버지의 시간도 행복이였음을 모를까?
반세기 전 “겸상하며 인자하게 웃으시던 할아버지와 조심스럽던 손자”의 밥상머리 소통이 그리워지는 순간.
……둘째를 품었다 함이 / 멍에처럼 저미어 오는 밤
이토록 빌며 기다린다 / 아이와 함께 할 꿈꾸는 세상을……
제 보잘 것 없는 “시(딸의 둘째)” 끝 부분이다.
< 1월호 월평>
이방주
(서원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강사)
1. 이상목의 < 아이돌보기>는 세태를 반영하는 소재의 하나입니다. 문학성보다는 실버세대들의 손자녀 돌보기를 통해 행복을 찾는 글감에서 읽기의 편안함과 특정한 계층의 공감대형성을 끌어냅니다. 어떤지요?
이상목 작가의 <아이 돌보기>를 읽으며 수필문학의 문학성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수필문학은 매우 일상적인 장르라고 말들 합니다. 그러나 그 일상이 문학이라는 예술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작가의 독창적인 시선에 의해서 발견된 사실과 체험을 언어의 아름다움으로 표현하여 감동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적 세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만 한다면 수필이 아니라 이야기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아이 돌보기>는 이 작품의 첫머리에서 밝혔듯이 노년에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일이고 힘은 들지만 행복을 맛볼 수 있는 보편적인 일입니다. 작가의 아이 돌보기가 반드시 맞벌이가 일반화된 현대사회에나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육아 일기도 있었고 목은 선생이나 다산 선생도 아이돌보기의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일이라고 밝힌 점이 돋보입니다. 더구나 아이돌보기를 하면서 작가의 조부가 손자인 작가와 겸상을 하면서 느꼈을 행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 점을 밝힌 것도 작가의 색다른 시선으로 보여서 작품성을 더하는 효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수필 창작하기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이 문단구성입니다. 문단이란 몇 개의 문장이 모여서 하나의 통일된 생각을 나타내는 글을 쓰는 단위이라고 한다면 하나의 생각이 두 문단으로 나뉜다든지 하나의 문단에 두 개의 중심 생각을 포함시킨다면 의미의 혼동을 가져오게 됩니다. <아이 돌보기>는 이런 점에서 문단 구성을 다시 생각해야 할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둘째 문단과 셋째 문단은 문단을 나누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또한 문장부호 가운데 작은따옴표와 큰따옴표도 확실히 구분해서 사용해야 의미 전달에 오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대화의 직접인용에는 큰따옴표를 사용하고 저서에 있는 것을 재인용하거나 강조할 사항, 명명, 강조, 등은 작은따옴표를 써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훌륭한 작품이 어휘나 문장부호의 잘못 사용으로 작품성이 떨어진다면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됩니다.
이상목 작가의 <아이 돌보기>는 같은 실버세대들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 공감을 얻어낸 좋은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대상에 대한 세심하고 독창적인 관찰을 통하여 얻은 가치 있는 삶의 모습으로 의미화하여 주제를 설득력 있게 형상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2. 김이경의 <새해 나들이 나서는 당신에게>는 말하듯 써나가는 형태의 특징 때문에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 착각을 들게 합니다. 쓰기 쉬운 스타일이 갖는 양면성을 짚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김이경 작가의 <새해 나들이를 나서는 당신에게>는 대화하는 형식으로 쓴 글입니다. 대화하는 형식으로 쓰는 글은 화자가 편안한 대상인 청자에게 자신의 사상과 가치를 편안하게 토로할 수 있으므로 수필의 한 형식인 자기고백적인 글이 될 수 있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한편 이런 형식의 글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화자와 청자의 설정이라고 봅니다. 특히 청자를 단순하고 특별한 어느 한 개인으로 설정하면 주제의 범위나 의미화의 범위가 매우 협소해 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수필문학의 특성을 살리려면 청자를 형식은 개인이더라도 보편적 사고를 가진 대중으로 설정하는 것이 유리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의 청자 설정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새해 나들이를 나서는 당신에게>는 화자와 청자가 모두 여성으로 설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전반부에서 외모중심이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것으로 보아 여성만을 위한 주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전반부를 여성들의 관심사인 외모로부터 출발합니다. 외모 가운데 여성들의 관심사인 옷차림으로부터 출발하여 투박하고 수수한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촌부의 편안한 아름다움을 지닌 할머니로 아름다움의 기준이 변화됩니다. 그런 가운데 등장하는 것이 ‘여섯 살 아이의 순수한 시선’으로 본 청자의 모습입니다.
외모에서 내면으로 이야기의 전환은 제5문단과 제6문단 ‘정해 놓은 규격, 정해 놓은 색깔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노인을 안경을 벗어놓고 꽃무늬 머플러를 곁들여야 한다는 곳으로부터 시작됩니다. 7문단 질그릇 같은 투박함 → 8문단 노인의 안경을 벗고 여섯 살 아이의 눈→9문단 촌부의 편안함으로 미의 기준이 승화됩니다.
제 10문단에서 ‘당신을 넘어뜨리는 것은 고작 작은 돌멩이’라는 피력에서 독자가 삶의 진리를 깨닫게 합니다. 여기서 청자는 다만 청자 혼자만이 아니라 화자도 되고 독자 전체로 일반화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수필문학만이 드러낼 수 있는 문학성을 형상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출발할 때 세상 모든 사람의 ‘가슴이 따뜻해지고 고운 물이 들게 될’ 것입니다.
김이경 작가의 <새해 나들이를 나서는 당신에게>는 말하는 형식을 차용하여 성공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만히 읽다보면 화자와 청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화자가 곧 청자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새해를 맞는 화자의 다짐이 독자의 다짐으로 일반화 될 수 형식으로 공감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세상에 대한 인식과 형상화가 잘 통하는 작품이었다고 봅니다.
3. 이정인<고인과의 대화>는 상징과 주제의 함수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내면의 깊이와 함께 독자의 이해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정인 작가의 <고인故人과의 대화> 상징과 주제의 함수관계를 생각하게 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도 이 작품을 읽으면서 수필문학의 문학성을 제고하려면 역시 문학 일반론에서 말하는 인식과 형상이라는 개념을 확실히 이해하고 수필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식이라면 대상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독창적 안목으로 이해하는 것이겠지요. 형상이라면 대상에 대한 인식을 가장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방법이라고 봅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 <고인故人과의 대화>라면 고인은 대상이고 대화는 형상화의 수단이라고 봅니다. 화자는 달을 보면서 고인을 떠올립니다. 고인은 곧 돌아가신 아버지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달은 아버지를 상징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볼 수 있어요.달에 대한 관찰에서 아버지를 떠올렸다면 달에서 아버지를 유추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작가는 이러한 유추적공통점의 나열을 통해서 아버지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달에서 고인을 그려내는 상징적인 객관적 상관성을 살펴보기로 할까요?
1문단에서 달은 바람의 길로 오는 ‘옛사람’입니다. 2문단에서 달은 하현달의 이미지로 아버지의 상관물이 됩니다. 달은 계속해서 ‘아버지의 눈매’, ‘아버지의 눈빛’, ‘반달처럼 약해지는 아버지의 어깨’ ‘은은한 달빛’으로 아버지의 존재감을 의미합니다. 유년의 인식 속에서나 아버지는 보름달의 이미지를 지녔고 그 이후부터 하현달의 이미지로 존재합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차고도 따뜻한 달’과 같다고 했습니다. 7문단에 이르면 달은 ‘고향집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손길’로 존재한다고 했어요. 제삿날 아버지는 병풍 너머에도 있고 오동나무 제상에도 있습니다. 달빛처럼 타오르는 소지에도 아버지의 존재는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제사가 끝날 무렵 아버지는 ‘노곤히 흰 달 지그시 눈을 감는다.’고 비유해서 의미를 정리했습니다. 달을 매개로 아버지의 이미지 사랑 그리움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기법이 신선하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그 비유의 매개와 유추적 의미가 점점 깊고 잔잔해져서 읽은 사람을 빠져들게 합니다.
한편 주제의 형상화 기법 가운데 감각적 표현을 들 수 있습니다. 화자가 대상을 감각적 언어로 표현할 때 독자는 경험을 되살려 자신의 가슴에 감각을 재생합니다. 이것을 이미지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교감이 이루어질 때를 우리는 인상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이글을 읽고 마치 현장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감각적 표현이 문단마다 문장마다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정인 작가의 <고인故人과의 대화> 는 달을 통하여 상징과 비유, 감각적 표현으로 아버지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상징과 비유가 자칫 지나친 낯설게 하기로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데 이 작품은 유추가 비약적으로 표현되지 않아 효과를 거두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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