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수필문학회 여름 문학세미나 자료/2013. 8.24.
韓國文學의 空間과 時間 意味
이 방 주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차 례 | |
1. 들어가기 (1) 수필문학의 본질 (2) 독창적으로 세계 인식하기 (3) 긴장된 질서의 언어로 形象化하기 2. 空間의 의미 (1) 한국인의 이상향理想鄕 - 산 |
(2) 집의 공간 의미 3. 시간의 의미 (1) 한국문학의 時間觀 (2) 한국문학의 四季 表象
4. 휘갑치기 |
1. 들어가기
(1) 수필문학의 본질
1) 교술문학敎述文學으로서의 수필문학
교술문학은 작가가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독자에게 깨달음을 주는 문학이다. 일기, 편지, 기행문, 독서 감상문, 수필 등이 이에 포함된다. 한문으로 기록된 것 중에서 서序, 기記, 논論 등이 여기에 속한다. 수필문학의 기본은 사실을 토대로 한다는 것이다. 교술문학 중에서 대표적인 갈래는 수필문학이다. 수필문학은 작가의 일상적 체험에서 얻은 삶의 지혜가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독자는 수필을 통해 작가의 가치관이나 인생관,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
2) 수필문학의 특성과 존재 의의
권대근은 수필의 사기四忌를 격약格弱, 이단理短, 의잡意雜, 재부才浮로 들었다.
格弱을 피해야 한다는 말은 수필은 품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격이란 진실한 태도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것이다. 품위를 잃으면 문학성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는다. 따라서 필자의 인지적 정의적 자질이 중요하다. 시나 소설은 허구이기 때문에 작가의 인격과의 상관성이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수필은 작가가 마음의 옷을 벗는 소재의 취사선택에 인품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윤오영은 내용이 저속하면 속문이고 문장이 좋지 않으면 악문이라 했다. 수필문학을 대중화해야 한다고 하는데 수필이 대중에게 갈 것이 아니라 대중을 수필의 격으로 불러오는 것이 격을 갖추는 첩경이다.
둘째 理短이란 이치가 짧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수필에는 지성이 요구된다. 수필은 지성에 바탕을 둔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의 문학이다. 인생을 통찰하고 달관하는 경지나, 여과되고 발효된 정서로 얻어지는 멋과 맛, 재기 발랄한 유머와 위트, 날카로운 풍자와 비판 등 지성이 요구된다. 지성과 철학이 결여되면 결국 잡문으로 전락하고 만다. 신변을 말하되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야 한다. 거기에 수필의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피해야 할 意雜은 집필 의도가 잡스러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수필은 정서적인 감화에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이다. 현학적이거나 자기선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잡스러운 의도를 가진 것이다. 정치적, 상업적 목적으로 글을 써서는 안 된다. 생각이 깊지 못하고 천박하면 아무리 많은 글을 써낸다 해도 떨림과 울림의 수필이 되기 어렵다.
才浮란 재주를 부리지 말라는 것이다. 훌륭한 수필가는 글 재주꾼을 말함이 아니다. 좋은 글은 문文과 지志를 겸비해야 한다. 문이 없는 지는 거칠고 지가 없는 문은 황홀할 뿐이다. 이상한 제재는 좋은 수필의 처방이 되지 못한다. 주제는 빈약한데 제재만 화려하면 알맹이 없는 글재주에 지나지 않는다.
재주를 부리지 말라는 말에서 수필에 허구의 수용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수필에 소설적 허구를 수용한다면 수필문학의 존재 의의는 사라지게 된다. 수필문학에서 문학적 진실을 위해서 피할 수 없이 허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면 ‘사실과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구성하는 과정에서만 허구를 차용할 수 있다. 그러나 주제를 확연하게 드러내기 위해 사실이 아닌 것을 포함시켰다면, 그것은 수필 문학의 존재 의의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다. 독자는 한 편의 수필이 작가의 사실 체험의 결과라는 데에도 감동을 받기 때문이다. 수필은 사실과 체험 그리고 사색의 문학이다. 사실을 근거로 진실을 추구하는 문학적 특징에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이다.
(2) 독창적으로 세계 인식하기
사람마다 세계를 인식하는 관점은 다르게 마련이다. 문학이 일상어와 다른 점은 그 내용이 독특한 인식이라는 점이다. 누구나 다 발견할 수 있는, 너무나 당연한 인식은 문학이 될 수 없다. '나만의 앎'이어야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문학은 '나만의 앎'을 긴장된 질서로 형상화하는 언어로 쓴 아름다운 집이어야 한다. 세계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눈을 바로 떠야 한다. 육안으로 보면 세계는 거죽만 보이고, 마음의 눈으로 보면 세계는 그의 진실한 내면을 보여준다. 영혼의 눈에 보인 것만이 독자의 영혼을 울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삶의 세계에서 진실을 발견할 수도 있고, 가치 있는 삶의 원형을 발견할 수도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세계의 모습은 아는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는 점이다. 지적 자산이 풍요로운 사람의 시야가 더 넓은 것이다. 가치 있는 삶을 아는 사람만이 목련꽃의 시듦에서 삶의 가치가 보이고, 우주의 질서를 아는 사람만이 작은 잎새에서 우주의 질서를 발견한다. 지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사람만이 거기서 한 단계 높은 지성을 발견한다.
(3) 긴장된 질서의 언어로 形象化하기
문학의 언어는 형상이라는 점에서 정보 전달, 친교, 감화라는 일상의 언어와는 구별된다. 문학의 언어는 읽는 이의 머릿속에 또렷한 마음의 그림을 새기게 하고, 일상의 말이 지니지 못한 짜릿짜릿하고 긴장된 질서를 획득해야 한다. 그 긴장된 질서가 독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때, 드디어 언어는 형상으로서의 임무를 다한다.
수필은 형식이 없는 글이다. 시는 언어의 함축성과 음악성과 심상으로 질서의 긴장감을 획득한다. 소설은 배경과 구성, 인물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긴장된 질서를 탄생시킨다. 그러나 수필은 이러한 문학의 형식적 요소로서 긴장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수필도 문학적 긴장이 없으면, 푸념이 되고 넋두리라는 오명을 벗지 못한다.
수필 문학의 긴장은 격조 높은 지성의 언어에서 얻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속하고 교양 없는 언어로는 수필을 이룰 수 없다. 수필에 비유, 상징, 풍자도 필요하지만, 이런 것들의 뿌리는 교양과 지성에서 실타래처럼 풀려 나오는 격조 높은 언어에 의한 축성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는 것을 뽐내기 위한 번지르르한 언어의 나열은 낯간지러운 말장난이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유아적인 언어도 때로 오묘한 삶의 철학을 토로하는 말이 될 수도 있고, 육두문자로도 그것이 지성의 사색 끝에 풀려 나온 것이라면, 가슴을 울리는 해학이 될 수 있다.
2. 空間의 의미
(1) 한국인의 이상향理想鄕 - 산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조지훈의 「파초우芭椒雨」의 일부이다. 산은 우리에게 교양과 지혜, 초탈, 안주, 무욕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수양의 공간이다. 자연과의 융합, 예술적 미적 공간의 대상이다.
한국 문학에서 산은 자연관을 체현하는 미감적이고 정신적인 관조의 대상이다. 산은 사자死者가 매장되는 이계異界의 공간이며, 신성의 공간이고 정진과 노력의 교훈적 대상이다.
1) 산의 精神史
한국인에게 산은 심미적인 감응과 종교적인 경건성의 의미를 지닌다. 우리 심성에 내재한 숭고崇高, 해탈 무욕의 대명사이다. 그래서 산에는 신령神靈과 신선, 도승, 해탈한 노승의 거처로 이해된다. 다음 작품들에서 산과 인간의 심미적인 감응을 발견할 수 있다.
오오 산이여/ 앓는 듯 대지에 엎드린 채로/ 그 고독한 등을 만리 허공에 들내여/ 묵연히 명목暝目하고 자위하는 너/산이여/ 내 또한 너처럼 늙노니
- 유치환 「산」
그럴 때는 철저히 혼자가 되어 산과 은밀한 대화를 나눈다. 산은 내게 해결책을 일러 주기도하고 스산하고 울적한 마음을 다독여 주기도 하는 스승이기도 하다.
- 박영자「우암산」
오름에서 바람을 제대로 맞은 여행이다. 기어가고, 넘어지고, 내 의식이 바람에 산산이 부서진 날이다. 앞으로 내 삶에 어떤 오름이 기다리고 있을까. 자연 앞에선 날이 선 감정도 자존심도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니라. 감히 조언한다. '누구든 바람 쐬러 간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용눈이오름에선 그 바람에 흔적 없이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 이은희「오름 오름 오름」
우리 민족의 신화적 세계관이나 우주관은 3층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단군신화의 태백산 꼭대기 즉 신시神市는 상중하의 상방이며 지상과 천상의 점촉점의 성격을 지닌다. 가락국기의 구지봉, 신라의 선도산 신모신화, 마니산 신화가 그렇다.
한편 도교에서는 신선사상의 중심으로서 산을 들고 있다. 김만중의 구운몽은 불교적 세계관을 중심으로 산에 대한 특유의 공간 의미가 반영된 작품이다. 즉 중심 배경인 연화봉은 속계에 대응되는 성스러운 세계이며, 수련의 도량이고 수직적 상층이다.
무속에서도 산을 산신의 영역으로 받아들인다. 유교에서도 논어 옹야雍也편에 인자仁者는 요산樂山하고 지자智者는 요수樂水라 하여 높은 산을 수양의 대상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산은 티끌 세계를 떠난 신비, 신성, 해탈, 선정禪定, 만고 부동의 형이상학적 숭고와 경이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잔 들고 혼자 앉아 먼 뫼를 바라보니
그리던 님이 오다 반가움이 이러하랴
말씀도 웃음도 아녀도 못내 좋아 하노라
- 윤선도 「산중신곡」
반면에 산은 긍정적인 장소로만 인식된 것은 아니다. 청정하고 성스러운 공간이지만 때로는 피난처, 복권復權을 위한 시련과 도술의 수련장이 되기도 한다. 탈법적 범죄자들의 은신처, 도둑의 서식처가 되기도 한다. 수도승만 입산하는 것이 아니라 산적이나 사냥꾼도 입산한다. 이러한 생각을 사회적이고 수렵적인 산악관이라고 할 수 있다. 홍길동전의 산의 도적들은 굴혈을 근거지로 한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산은 피비린내가 나는 이념의 투쟁 공간이다. 산은 신성한 공간이 아니라 역사의 능선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전쟁은 이렇게 산을 역사의 현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2) 청산과 原鄕回歸의 상징
고려가요 중에 청산별곡은 자연에 귀의 내지는 자연인 산에서의 가장 단순한 생활을 동경하는 문학의 한 원형原型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문학에서 산을 동경하고 산거한거山居閑居의 맑은 취향을 읊고 있는 작품이 많은데 청산별곡은 그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청산별곡은 반세속적 삶, 교섭 단절의 고독감, 의식의 시간적인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다음 박영자의「수채화 같은 풀꽃 추억」에서 영혼의 교감을 「집 두 채」에서 원향회귀를 엿볼 수 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청산에 살어리랏다
「청산별곡 1장」
퇴근하고 나면 산으로 들로 휘젓고 다니면서 지천으로 널려 있는 풀꽃들과 이야기하고 맑은 영혼의 새들과 함께 노래하는 수채화 같은 투명한 시간들이었다.
- 박영자「수채화 같은 풀꽃 추억」
백분처럼 보얀 마사토를 한 웅큼 집어 드니 똑 고른 알갱이가 너무 깨끗하다. 살그머니 볼에 대본다. 햇살 묻은 흙에서 따스함이 전해 온다. … (중략) … 감사하다.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았던 걱정거리가 잘 풀려 속이 후련하다. 밖엔 어느 새 저녁노을이 붉다. 서산마루에 지는 해가 어둠을 펴놓고 가듯이 우리에게도 머지않아 어둠이 내리리라.
-박영자「집 두 채」
수렵과 채집이 인간 생활의 원천이라면 인간의 생활사도 산에서 시작하여 물가나 들판으로 내려와 농경을 왔을 것이다. 도시가 형성되는 것은 그 이차적인 일이다. 그 때부터 인간은 산에 대한 향수를 배우고 익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향을 그리워하듯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그가 버린 산을 영원한 본향으로 그리워하게 된 것이다. 다만 그렇게 그리워하는 산도 고독과 또 다른 향수 정주부재定住不在와 떠돎의 삶이 의미도 내재되어 있다.
조선시대 시조문학에서 추구하고 있는 생활의 이상미는 바로 산거한거山居閑居에 대한 귀의와 침잠이다. 이들을 노년의 문학이라고 하면 지나치겠지만 은둔적이고 안분, 청빈, 고적, 단순, 한가함을 지향한다. 결국 궁극적인 지향점은 산수山水의 세계이며, 그 생활 내용은 세사를 깨끗이 잊거나 멀리하고 산수에 동화하는 자연적인 삶을 가지는 것이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山影산영조차 잠겨세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메오 나는 엔가 하노라
- 조식
김소월, 신석정의 시에서도 山은 서정 공간의 지도가 되거나 귀의 안주 및 자연과의 합일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 자연파인 청록파의 문학은 더 구체적인 山의 문학이다.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의 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은 바로 산이다. 목월의 산이 불상에 흐르는 순한 향토색을 지닌 정감의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한다면, 지훈의 산은 고아한 풍류와 선의禪意에 접하는 오도적인 정신 상태의 안정을 느낀다. 그의 산은 도덕적이거나 수양적인 원리를 나타낸다. 반면에 박두진의 산은 야성의 생동미를 지닌 생명력과 신앙적인 욕구가 충일된 대상이고, 무구한 원초적 장소이다. 현대시의 청산별곡이라 할 수 있다. 온갖 생명이 포용되어서 자유로운 생명을 영위가 모순 없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화산과 같은 불길을 내포하고 있어 생동적인 잠재력, 영원한 모성적 포용성을 지닌 공간이다. 곧 적극적인 동화에로 접근해 간 경지이다.
아랫도리 다박솔 갈린 산 넘어 큰 산 그 넘엇 산 안 보이러, 내 마음 둥둥 구름을 타다.
우뚝 솟은 산, 묵중히 엎드린 산, 골 골이 장송 들어 섰고, 머루 다랫넝쿨 바위 엉서리에 얽혔고, 샅샅이 떡갈나무 억새풀 우거진 데, 너구리, 여우, 사슴, 산토기, 오소리, 도마뱀, 능구리등 실로 무수한 짐승을 지니인,
산, 산, 산들! 누거만년(累巨萬年) 너희들 침묵이 흠뻑 지리함 즉 하매,
산이여! 장차 너희 솟아난 봉우리에, 엎드린 마루에, 확 확 치밀어올릴 화염을 내 기다려도 좋으랴?
- 박두진 <향현>
정상을 오르는 길은 멀고 험하고 어렵기만하다. 남에게 읽히는 글을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향기 있는 글이라는 소리를 듣기는 더욱 어렵다. 다시 힘을 내어 황매산을 향해 오른다. 저 멀리서 붉게 핀 철쭉꽃이 나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지만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고 마음만 급하다. 여기까지 와서 결코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무리 힘들고 외로워도 나는 황매산 정상에 피어있는 철쭉꽃을 보기 위해 이 길을 갈 것이다.
- 박순철 「철쭉처럼」
3) 현실과의 대극對極 공간
산을 현실 사회와 대극적인 회귀의 공간으로 받아들인 이효석의 소설을 들 수 있다. 「메밀꽃 필 무렵」에 나타난 산수화적 배경, 「산」도 세속적인 긴장 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대극對極이요, 자연과의 합일이 이루어지는 미적 공간이다.
산속의 아침 나절은 조을고 있는 짐승 같이 막막은 하나 숨결이 은은하다 바람결도 없는데 쉴 새 없이 파르르 나부끼는 사시나무 잎새는 산의 숨소리다. 첫눈에 띄는 하얗게 분장한 자작나무는 산속의 일색, 아무리 단장해야 사람의 살결이 흴 수가 있을까? 고요하게 무럭무럭 걱정 없이 잘 들 자란다. 산속은 고요하다 융성한 아름다운 세상이다.
- 이효석 「산」
새봄, 찬란한 꽃 피울 희망 안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양지에서도 음지에서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식물의 겨울나기를 보며 준비하면 극복하기 쉽다는 또 하나의 진리를 배운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우러러 사는 나무들은 어찌 보면 우리 사람들보다 더 풍성한 삶을 사는 건 아닐까. 사람들은 상대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그 일부의 판단으로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갈등이 좀 빚어지는가. 근시안의 복닥거림 속 우리네 삶이 갑갑할 때가 많다.
-임정숙 「숲처럼」
이효석의 관심은 문학 세계에서는 서로 다른 두 개의 공간이 대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도시(삶의 세계)와 산(초월적 세계)이 그것이다. 인위적인 공간이 도시는 분열, 공포, 배신, 퇴폐가 있어 세속적 공간이다. 자연은 반문명적인 초월적 공간이다.
예를 들면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보면 현실 세계를 이분하여 현실에서 신분의 차이라는 혼사장해로 이루어지지 않는 애정의 문제를 현실과 철저하게 격리된 현실 속의 초월적 공간에서 이루고자 한다. 즉 이 소설의 남녀 주인공은 소작인의 아들이며 시골뜨기라는 하층 계급과 지주의 자식이며, 서울에서 온 아이라는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저 산 너머’라는 새로운 공간을 택한다. 그래서 ‘개울가’에서 여러 차례 겪은 소년의 열등감을 ‘들판을 지나’ ‘냇물을 건너’‘산마루에 올라’ ‘무도 뽑아 주고’ ‘꽃도 꺾어 주며’ 소녀가 전혀 할 수 없는 ‘송아지 등에도 올라타며’ 극복한다. 소년은 ‘칡덩굴이 엉키어 있고’ ‘마타리꽃이 피어 있는’ ‘산마루’라는 현실 속의 은밀한 장소에서 꽃도 꺾어 주고 소녀가 입은 ‘생채기도 빨며’ 사랑을 성취한다. 그들이 초월적인 공간에서 세계의 경계인 냇물을 건너 다시 현실의 세계에 돌아 왔을 때 또다시 ‘죽음’이라는 격리를 겪게 된다. 김유정의 ‘동백꽃’ 결미 부분에서 ‘한참 피어서 퍼드러진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장해가 극복되고 사랑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퍼드러진 동백꽃 속’은 현실세계와 초월적 대극 공간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4) 고개- 이별과 기다림의 장소
한국 문학에 나타나는 고개는 산이면서 동시에 경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고개는 공간 분할의 성격을 지니며, 단절과 유통의 양면성을 지닌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유명 무명의 고개가 많고 고개마다 옛 사람의 생활의 정한이 서려 있다.
한국인의 이별은 주로 공간이 갈라지는 고갯마루나 나루터에서 이루어진다. 고개는 한국 문학이나 생활 예술에서 기다림, 이별의 공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분기점 혹은 점점의 장소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나타난 이별은 아무래도 진달래꽃 만발한 고개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도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에서 이루어졌다. 수필이나 소설에서 딸을 이별하는 장소나 이사 가는 소꿉친구를 이별하는 장소도 고갯마루이다. 이별의 장소에는 서낭당이 있다.
한편 고개는 기다림의 장소이기도 하다. 백제의 행상인의 아내가 읊었다는 「정읍사」, 박제상의 아내와 딸이 읊었다는 「치술령곡」에서도 간절한 기다림의 정서가 드러난다. 한국인의 정서에는 기다림의 한을 응고시켜 망부석 설화를 만들어 냈다. 돌로 응결되어 불멸화하는 변신으로써의 기다림의 미학은 고개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고개는 기다림의 장소이며 기다림의 초시간성을 지닌다. 한국 어머니들의 한숨, 설렘, 비탄의 정한의 미학이 고개의 공간적 의미를 조성해 왔다.
고개는 소문이나 정보, 전쟁의 참화, 문명이 넘어오는 통로이고 분기점이다. 황순원의 「학」에서 고개는 오르막과 내리막의 지형적인 고개 이외에도 갈등이 해소되는 분기점의 구실을 한다. 즉 오르막에서 갈등이 고조되고, 갈등이 해소되는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한국문학에서 고개는 분기점, 통로, 기다림, 이별의 의미를 지닌다.
(2) 집의 공간 의미
공간의 인식 가운데 집만큼 구체적인 것은 없다. ‘산다’는 것은 집이라는 공간을 배제하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집은 삶의 중심이며 공동체의 상징이다. 집은 안락과 평안함과 행복을 주는 공간이며 더불어 사는 존재로서의 사랑의 공간이다.
집에 대하여 바슐라르는 그의 「공간의 시학」에서 행복의 공간으로 규정하였으며, 볼노프는 피호성被護性의 공간이라고 했다. 이것은 집은 우리 삶에서 모성의 가치와 보호, 비호의 기능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작품은 집의 비호의 기능을 담고 있는데 사회적인 집으로 의미의 확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건너다보이는 양지바른 마을은 예닐곱 채의 집들이 삼태기처럼 우묵한 야산 밑에 폭 안긴 채 조는 듯 고요하다. 늘그막엔 저런 시골 동네에서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 박영자「은단말의 봄」
꿈에 지붕이 무너진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닌 것만 같다. 삶의 터전을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면서도 아무런 예방을 하지 못하고 사는 나 자신이 너무 무능해 보이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중략) 내 집 지붕이 무너지는 일은 개인의 일이면서 사람만 다치지 않으면 고칠 수 있는 문제지만 사회의 지붕이 무너지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생각할수록 섬뜩하다.
- 이영창「지붕」
집은 근본적으로 자고 깨고 먹고 배설하는 기능, 출입의 근본 기능, 요리와 식사 및 저장고, 이용의 기능적인 체계를 갖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을 소유하려고 한다. 생활의 안정된 구심점을 찾으려는 최소한의 근원적 욕망인 까닭이다. 집은 생활의 현실적이고 상징적인 중심이다.
친밀의 공간으로서의 집이 가지는 의미가 한국 문학에서 문학적 인식은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한국문학의 공간 인식의 기초 작업이다.
1) 집의 공간 양식과 父觀
한국의 전통적인 집은 구조성, 문화성,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곧 집은 가족 ․ 사회제도나 질서․ 전통적인 관습의 보기나 지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본채와 별채가 담으로 둘러싸인 한국의 전통적인 가옥구조는 공간의 분할에 ‘바깥’과 ‘안’의 공간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 사랑채는 바깥의 의미를 지니며 외부, 남과 접촉이 가능한 남성 중심의 공적․사교적 열린 공간이다. 안채는 가족의 일상이 이루어지는 닫힌 사적․가족적인 여성 중심의 공간이다.
서구 사회에 비해 한국의 주거 구조에서 방의 배치는 위계를 중요시하는 공간 분할이다. 사랑방은 혈연적인 상속관계의 정통성을 잇는 부권적 권위를 상징한다. 가문의 수호와 이세의 교육을 이루는 부성적父性的 절대 공간이다. 이 상징적인 권위는 적법적인 적출嫡出의 원리에 따라 가계와 세대를 이어간다.
① 바깥(사랑)과 안(안방)의 기호화
안방은 가정의 내적 생활을 대리하는 여성의 권위의 상징으로 출산, 호적의 정당성과 재산, 가정 관리의 우선권과 독점권이 부여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의미는 집이 공간의 인간학적인 기능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남자는 ‘사랑’ 또는 ‘바깥’ 여자는 ‘안방’ 또는 ‘안’이라는 공간 개념으로 대유하는 하나의 기호가 된다.
주요섭의 단편 「사랑 손님과 어머니」는 어수룩한 서술자인 동심의 눈을 통해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간에 오고 가는 성인 세계의 미묘한 감정의 음영을 제시한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은 그 표제처럼 주거 공간의 기호학적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남편의 상징인 사랑방과 아내의 상징인 안방은 대칭되어 있는 공간으로 서술자인 옥희만이 자유롭게 드나든다. 이 집에는 사랑의 표상인 남편(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숙을 든 남성(교사)와 엄격한 내외법이 지켜진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정서의 소통은 물론 대화도 보이지 않는 벽 때문에 미묘한 동요의 파문만을 일으킨다. 현대 가옥 구조에서는 거실의 공유로 남녀 간의 공간적인 시스템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② 방과 갈등의 삼각관계
한국 가옥의 방들은 우리 특유의 가족제도나 가족 관계의 역학 구조를 잘 나타내는 공간 분할의 단위이다. 이러한 공간의 분할은 가족 간의 위계와 질서의 상징이다.
염상섭의 「삼대」채만식의 「태평천하」박경리의 「토지」최명희의 「혼불」같은 가족사 소설에서는 수많은 방이 등장하면서 대가족의 세대적 계보와 생활 양상이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면 ‘안방’ ‘사랑방’ ‘건넌방’ ‘행랑채’ ‘별당’ ‘큰 방’ ‘큰 사랑방’ ‘작은 사랑방’ 등이 등장한다.
이와 같이 한국의 방은 생활 기능적인 측면보다 가족 구성원 중심을 강조한다. 가족 공동체가 상호 협력과 정애情愛의 공간 확장의 의미를 가지면서도 구성원 간의 서로 다른 욕망 때문에 갈등과 분열의 긴장이 일어난다.
일부다처제가 공식화되었던 조선시대 소설에서 여인들은 안방의 확보와 방어에 철저하게 행동한다. 사랑방이 혈통의 친권적인 정통성을 상징한다면 안방은 사랑방의 애정과 경제에 대한 독점권을 상징한다. 일부다처제 아래에서 여인들은 숙명적인 삼각관계에 빠져 안방을 지키고 빼앗으려는 음모, 계략, 긴장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소설로 「사씨남정기」「장화홍련전」「콩쥐팥쥐」등을 들 수 있다.
혼인한 이듬해에 건넌방에서도 아이 우는 소리가 나게 되었다. 첫아들이었다. 집안에 경사 났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입으로만이었다. 서조모는 소견이 좁고 보고 배운 것이 없었다. 공연히 건넌방 아이, 증손자를 시기하는 것이었다.
- 염상섭 「삼대」
이 글에는 주거 상태와 여성 세대 간에 내재되어 있는 심리적 갈등과 위계질서를 압축하고 있는 대목이다.
③ 방의 역할과 반응의 변화
이상의 「날개」의 ‘나’의 방은 바깥에 있는 자궁과 같이 피호성被護性과 쾌적快適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나‘의 유아적인 행위는 방이 삶에 가지는 보호적 가치가 적잖이 암시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어떤 제약된 한계 상황을 의미한다. 이 작품에서는 전통적인 부권적 가치가 변질 전도되어 나타나고 있다. 말하자면 남권이 퇴행 거세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집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탈출로 상징화하려는 의도이다.
2) 친밀의 공간
집은 휴식과 비호庇護의 친밀한 공간이다. 한겨울의 추위와 고달픈 여행 노동의 피로 후에 돌아온 집은 안락과 휴식의 공간이 된다. 차갑고 떨리는 피로로부터 우리의 삶을 풍부하고 쾌적하게 해주고 삶의 안정성을 보장해 준다. 아울러 집은 인간과 친밀성을 떠나서는 유지될 수 없음을 다음 수필에서 본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쉽게 허물어진다. 집도 사람이 등을 기대고 살아야 숨을 쉰다고 한다. 아무리 오래된 집도 사람의 훈기를 받으면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던 친정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난다. 안주인이었던 어머니가 쇠퇴해지듯이 집도 늙어가는 것이다.
- 박종희 「빈집」
다음 글은 창으로 대칭 된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에서 사랑의 공간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불행한 사람의 조건과 상태를 공간적으로 압축한 문맥이다. 이처럼 인간은 원천적으로 집이라는 내부공간에서 행복과 안식을 구하고 가지려고 하는 것이다.
남의 집 창 밖에 서서 기웃거리는 가난한 마음을 짐작할 수 있으세요. 안에는 따뜻한 불이 피고 평화와 안락이 있지요. 밖에 서 있는 마음은 춥고 떨리고…….
- 이효석 「가을과 산양」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어머니의 품은 그의 우주이며 가장 근원적인 장소인 것이다. 어머니의 품은 성장함에 따라 집, 고향, 나라로 확대되어 가는 것이다. 또한 결혼하여 정애情愛의 공간인 가정을 이룬다. 정신의 위안을 위해서 예술이나 종교적 정신적인 영혼의 집을 가지기도 하며, ‘천년의 집’인 무덤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집은 친밀의 공간이 되고 친밀의 경험을 갖게 하는 공간이다.
① 창문의 미학
벽은 경계이지만 창은 집의 눈이다. 눈은 사람의 창이고 창은 집의 눈이다. 벽은 공간을 분리하여 사람을 보호하여 주기도 하지만 사람을 가두는 기능도 한다. 창은 안팎 두 세계의 통로이며 개방과 희망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창과 벽은 문학에서 중요한 모티프가 된다. 특히 수필문학에서 더욱 그렇다.
창 내고자 창을 내자 이 내 가슴에 창을 내고자
고모장지 세살장지 들장지 열장지 암돌쩌귀 수톨쩌귀 배목걸새 크나큰 장두리로 뚝딱 박아 이 내 가슴에 창을 내고자
이따금 하 답답할 때면 여닫아 볼까 하노라.
- 사설시조
세우사창 요적한데 흡흡한 기쁜 정과
야월 삼경 사어시私語時에 백년 살자 굳은 언약
명월 사창 앞에 앉아 나는 무엇 그리는고
- 추풍감별곡
이 시조 작품에서 창은 햇빛과 달빛에 젖어 있는 시간성과 관련되는 창이다. 사창과 영창의 달빛은 그리움의 시간을 창으로 공간화한 것이요, 내적인 동요의 중개자가 된다. 때로는 이러한 물상적인 대상을 떠나서 개방이나 혹은 해방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② 안방 그 사랑의 공간성과 femininity
한국의 전통적인 가옥의 방은 가부장적인 가족의 복합적인 질서와 긴밀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안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내실은 가족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며 여성적인 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곳은 여성이 관여하는 삶의 근본적인 생활이 영위되는 여성의 성城과 같은 공간이다. 여성은 이 안채를 빠져나갈 수 없다. ‘건넌방’에서 ‘안방’으로 이르는 시간이 여자의 일생이다. 사랑과 고독과 여성적인 원망이 배양되는 장소이다.
어어 밤은 깊어
화촉동방의 촛불은 꺼졌다.
허영의 의상은 그림자마저 사라지고,
그 청춘의 알몸이
깊은 어둠바다 속에서
어족漁族인양 노니는데
홀연 그윽히 들리는 소리 있어,
아야.....야!
태초에 생명의 비밀 터지는 소리.
한 생명 무궁한 생명으로 통하는 소리.
열반의 문 열리는 소리.
오오 구원久遠의 성모聖母 현빈玄牝이여!
머언 하늘의 뭇 성좌는
이 밤을 위하야 새로 빛날진저.
밤은 새벽을 배孕胎고
침침히 깊어 간다!
- 오상순 「첫날밤」
이 시는 화촉동방이 배경이 되고 있다. 상설된 방은 아니지만 은밀한 내측의 어느 방에 마련된 방이다. 이 공간은 사랑과 가정의 기초가 놓이는 특별한 공간 의미를 지닌다. 춘향전처럼 혼전교섭의 경우도 있지만 한국여인에게는 지켜야하는 질서이고 일생의 의미를 지니는 공간이다.
이밖에도 방은 가족을 사랑의 공동체로 결속시키는 공간성을 갖게 하고, 문화 전승의 공간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마루, 초당방, 다락방, 별당, 울타리, 돌담, 뒤뜰 등도 우리 문학에서 친밀의 경험을 갖게 하는 공간이다.
3. 시간의 의미
(1) 한국문학의 時間觀
1) 시간의 본질
시간은 인간 존재와 자연 인식의 근본적인 개념이다. 다음은 성찬경 시인의 「時間吟」의 일부이다.
언젠가 나는 죽어라 하고
네게 뛰어들었는데
너는 척尺이 넘는 잉어처럼
빛나는 본질이었다.
언젠가는 그렇게 했는데도
너는 다 타버린 연탄재였다.
오 오묘한 너의 생김새
어떤 땐 한숨
어떤 땐 술
나는 시시각각 네게 덮여서 산다.
-성찬경 「시간음時間吟」일부
이 시에는 시간은 어느 때 ‘빛나는 본질’되고 어느 때 ‘연탄 재’가 되기도 한다. 변화와 불가사의이면서도 삶의 조건을 암시한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보존하고 생성과 창조와 도취의 경험을 준다. 그러나 때로는 이 모든 것을 파괴하기도 하고 공허와 소멸을 주기도 한다. 이와 같이 시간은 끊임없이 순환과 변화와 지속의 질서를 주재한다. 그래서 살아 있는 존재를 빚어내기도 하며 소멸시키기도 한다. 시간은 인간의 생활을 편성하고 시간 속에 가두어 구속하기도 한다. 때로 이별 망각 허무의 근원이 된다.
시간은 역사를 만들어 냈을 뿐 아니라 그 불가사의함으로 종교와 철학, 과학과 심리학 예술을 만들어 냈다. 한국인은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한국 문학에 나타난 시간관은 과연 어떤 면모를 갖추고 있는 것일까?
2) 무상無常과 길흉吉凶의 체계
한국인의 내면 의식 내지 시간관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무상성無常性과 연결된 ‘무정無情’의 시간관, 길흉의 운명적 시간관, 과거 지향적인 상고적 시간관일 것이다.
한국인은 정의 감정 교류를 중심으로 한 인간관계를 중요시한다. 그런데도 시간에는 정을 부여하기를 꺼린다. 그래서 시간을 ‘무정한 세월’이라 한다. 여기서 시간은 냉혹한 파괴자이다. 우리 존재와 행복한 순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속할 수도 정지시킬 수도 없다. 시간의 고정화는 안타갑기만 하다.
한국인의 무정이나 무상의 시간의식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이라는 불교적 무상의 세계관을 수용함으로써 더욱 무상의 시간관으로 편재한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에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저’ 누구나 다 공감하는 제망매가의 한 구의 시를 보더라도 영원한 인생에서 인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짧은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인생은 유한한데 시름도 그지없다. 무심한 세월은 물 흐르듯 하는고야
- 사미인곡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거든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 황진이
무상의 시간 관념은 물, 이슬, 구름, 꽃과 같이 상주하지 않는 이미지를 통하여 표현된다. 이에 비해 불변과 항구의 관념은 소나무, 바위의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이와 같은 이미지 표현은 가변과 무상, 불변과 영원에 대한 시간의 기호이다. 삶의 지속에서 ‘노세 젊어 노세’의 찰나주의 향락주의 인생관을 형성하기도 했다.
한국인은 시간에 대하여 길흉의 체계 내지는 화복禍福의 원리라는 특수한 관념이 잠재되어 있다. 이런 경우 시간은 곧 운명인 것이다. 시간에는 길일吉日, 길시吉時, 흉일凶日, 흉시凶時가 있다는 의식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다. 팔자라고 일컬어지는 생년월일시는 운명을 점치는 근거가 된다. 우리 속담과 속설에 ‘팔자가 사납다’ ‘팔자는 독에 들어가도 못 피한다’ ‘팔자를 고친다’는 팔자에 따른 길흉화복 시간관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곧 길흉의 시간관이다.
시간의 단위는 ‘어제’ ‘오늘’ ‘내일’로 3분화된다. 이것은 기억 직관 기대로 확인되는 시간이다. 한국인은 이 세 단계의 시간 가운데 과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정도 옛정이어야 알뜰히 못 잊어하고 ‘옛말 그른 것 없다’라면서 옛말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상고적인 과거지향 의식은 우리의 생활양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문학적 상상력도 과거 지향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우리문학은 돌아갈 수 없는 과거 즉 고향, 옛 땅, 옛 님, 추억, 향수를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으로 담아내고 있다.
3) 낮과 밤의 시간 현상학現象學
낮과 밤의 교체 현상은 생리의 리듬과 인간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생활양식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 낮은 인간 활동에 집단적인 확산성을 밤은 개체적인 수렴성을 지니는 시간이다. 낮은 가시성을 눈뜨게 하고 밤은 꿈과 추억의 환상을 떠올리게 한다. 낮은 노동의 시간이며 밤은 사색과 정신이 성숙해 가며 낮을 잉태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낮이 속俗의 시간이라면 밤은 성聖의 시간이다. 그래서 낮은 리얼리즘을 배양하고 밤은 낭만주의를 배양한다.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寢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국 - 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마음의 촛불을 봐라.
양털 같은 바람결에도 질식이 되어 얕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산 그리매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런지 - 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무나. 사원(寺院)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 이상화 「나의 침실로」에서
여름날 초저녁의 행복은 그렇게 늘 계속되고 있다. 마사지 하는 그 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일도 잊어버리게 된다. 오로지 그와 나 둘만의 행복한 시간을 만끽하는 그 시간이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 김정자 「초저녁의 행복」
이상화의 시「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지배하는 시간은 낮이기 때문에 땅, 하늘, 들, 종다리 구름, 보리밭 등 가시적인 소재들이 등장하여 노동 활동이 제시되고,「나의 침실로」를 지배하는 시간은 밤이기에 휴식과 머무름과 개인적인 관계로 돌아가려고 한다. 「나의 침실로」에 드러난 것처럼 밤은 몽환적이고 인간관계를 나와 너로 축소한다. 김정자의 「초저녁의 행복」은 밤을 행복의 시간으로 표현하였다.
우리 문학은 밤을 그 서정의 시간적 배경으로 수용하고 있다. 「처용가」「정읍사」「원왕생가」「만전춘별사」「정과정곡」을 예로 들지 않아도 한국의 시문학은 밤이란 시간대가 지닌 정감과 분위기와 친숙하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 문학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밤이 갖는 정한적 상황의 정조와 야행성을 주요 특성으로 하고 있다. 예외로 박두진의 「해」는 모더니스트의 혁신이라고 볼 수 있다.
4) 객관적 시간과 주관적 시간
시간은 객관적일수도 있지만 주관적일 수도 있다. 자연의 시간은 객관적이지만 마음과 경험의 시간은 주관적이다. 주관적 시간은 기계의 논리로써는 측정이 불가능한 시간이다. 문학에서는 마음 속의 시간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을 중시한다. 심리적인 시간은 객관적으로 잴 수 없으며 객관적 시간과는 어긋난 채 펼쳐지기도 하고 줄기도 하며 주관화하기도 한다.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라는 말이 바로 그런 사례이다.
여류시인 황진이는 情의 양면성과 시간의 성격을 절감했던 사람이다. 다음 시에서 시간의 마름질, 시간의 공간화, 공간의 시간화가 실현되고 있다. 황진이는 밤을 마름질하여 봄밤을 연장한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들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 황진이
천 년을 한 줄 구슬에 꿰어
오시는 길을 한 줄 구슬에 이어 드리겠습니다.
하루가 천 년에 닿도록
길고 긴 사모침에 목이 메이면
오시는 길엔 장미가 피어지진 않으오리다.
- 모윤숙 「기다림」
이러한 시간의 신축성은 현대시에 연결된다. 모윤숙의 「기다림」에는 황진이와 다른 시간의 축소화가 이루어진다. 천년의 긴 시간은 시인에 의해 한 줄의 구슬에 꿰어지고, 하루가 천년이 되는 심리적 확대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황진이와 모윤숙의 시간의 의미는 동일하다. 기다림이라는 상황적 시간성을 마름질하거나 구슬에 꿰거나 시간의 주관화라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절실하고 신축과 확대도 뚜렷하다. 이러한 원류는 고려가요 중 서경별곡의 ‘구슬이 바위에 지신들 끈이야 끊어지리까/ 즈믄 해를 외오곰 여신들 신信이야 그츠리이까’라는 여성적 생활 서정에 연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 한국문학의 四季 表象
1) 계절과 시간의 순환구조
사계의 표상론은 주역의 음양원리에서 비롯된다. 음양의 사상팔괘를 사계와 연결 지으면 봄, 여름은 양陽에 가을 겨울은 음陰이다. 봄은 소양이며 여름은 태양, 가을은 소음이며 겨울은 태음으로 나뉜다. 이는 계절의 자연현상을 표상하기보다 변성의 형식 원리에 관계된다. 한국시의 원형이라고 하는 신라 향가에는 이미 사계의 정서적 표상 내지는 반응이 엿보인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 다이 - 제망매가
잣가지 높아
서리 모를 화반이여 - 찬기파랑가
간 봄 그리매
모든 것이 설워 시름하는데 - 모죽지랑가
여기서 시간적 이미지 및 공간적 이미지를 이루는 것은 모두 계절의 요소와 관련되어 있다. 즉 가을, 바람, 낙엽, 잣, 서리, 간 봄은 사계의 표상이며 시적 서정은 이런 계절적인 매체로 표현된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정철의 「사미인곡」에는 시적 사시관이 정립되어 있어 인간사와 구조적으로 조화와 질서를 이루어 순환한다.
현대시에서 김소월의「산유화」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에도 계절의 순환과 변화가 어김없이 수용되었다. 조선 시대 소설의 공간 형태와 구조도 사계의 변동과 순환원리와 일치한다. 특히 춘향전에서도 ‘만남- 성숙된 사랑-이별-폐칩-소생’이라는 서사 구조가 사계의 상승 하강의 순환적 질서가 발견된다.
2) 봄 - 재생再生, 정염情炎, 일, 사랑
봄은 탄생, 재생, 청춘, 환희, 사랑, 부드러움, 따사로움, 성장, 상응, 희망, 생리적인 발정의 의미를 지닌 계절이다. 한국시의 서정적인 인식은 봄과의 관련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헌화가」「만전춘」「상춘곡」뿐 아니라, 김소월의 「진달래꽃」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박목월의 「청노루」신동엽의 「봄은」도 봄의 감각과 상황성 때문에 주목을 받고 있다.
이야기 문학에서 봄은 만남의 표상이다. 인간이 대지에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이 남녀 사랑의 존재로 만남을 갖는 계절이다. 김시습의 「이생규장전」에서 이생과 최소저의 만남은 봄이다. 「춘향전」에서 춘향과 이몽룡의 만남「구운몽」팔선녀와 성진의 만남도 봄이다. 사랑과 수도생활의 정신적인 번뇌를 가져오는 계절도 봄이다. 이처럼 봄은 계절의 시작이고, 생리적이고 정서적인 발정의 표상이다. 김유정의 소설「동백꽃」「봄봄」에는 이성에 대한 관심과 애정, 인간으로서의 개체에 대하여 점진적으로 눈떠 가는 삶의 탈피 과정을 특유의 해학으로 보여준다. 특히 「봄봄」의 봄은 표제의 시간성 못지않게 성의 상대성相對性 내지는 배우행동配偶行動을 가지려는 갈망의 성 원리가 내포되어 있다. 다음 작품은 봄이 재생과 순환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수필이다.
유독 봄은 회귀본능으로 목마름의 계절일까. 지난겨울 아프고 추웠던 기억을 걷어 내기엔 아직 내게 여진은 남아 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환한 꽃이 되고 싶다.
- 임정숙 「귀향」
2) 여름-자연 야성 시련의 시간
여름은 발전과 원숙, 무성, 열기의 표상으로 인간의 삶을 자연의 세계로 확산시키는 의미를 지니는 계절이다. 문명으로부터 원시적 세계로, 인위적 세계에서 자연적 세계로, 건강하고 야성적인 세계를 동경하는 계절이다. 그래서 여름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에는 여름의 상태에 있는 자연의 세계, 곧 산, 바다, 강, 푸르고 싱싱한 초목, 전원, 천둥, 번개, 소나기, 홍수, 흰구름, 무지개와 관련성을 갖는다. 여름은 원숙의 과정이고 깨달음의 계절이다. 여름의 문학은 자연과 자연의 야성 상태와 가까워진다. 다음 수필은 원숙의 과정을 거쳐 깨달음에 이르는 여름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녀는 사랑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사랑이 지독한 아픔이란 것을 알지 못했고, 한번 사랑이란 덫에 걸리면 자신의 의지로도 어찌해 볼 수 없는, 무작정 이끌려 들어가는 블랙홀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사랑이란 슬픔과 기쁨으로 뒤섞어 놓은 기록이라는 것을 몰랐고, 보고 싶은 간절한 열망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그런데도 소나기가 퍼붓고 간 질펀한 거리에 서 있는 한 청년에게서 그 어떤 간절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김애자「어느 여름날의 실루엣」
여름을 배경으로 한 문학은 반도시적, 반사회적 목가시牧歌詩를 생성시킨다. 「청산별곡」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같이 귀전원적이고 향토적인 시들은 주로 여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 지향하는 세계도 자연이다. 이백이 ‘笑而不答心自閑’이란 탈속적인 사유도 여름이며, 신석정의 자연에 머무는 시편들도 역시 여름을 배경으로 한다.
여름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에서 사랑은 봄의 그것보다 발전적, 야성적, 적극적으로 성숙한다. 문화적인 의상의 시대인 조선 시대에도 여름엔 노출 현상이 드러났다. 그래서 여름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는 인간의 신체성이나 에로스의 상상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객주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개울가로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지.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나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팔자에 있었나부지.
- 이효석「메밀꽃 필 무렵」
여름은 가장 자연적인 계절이며, 인간의 신체가 자연 원리를 구현하는 계절이다. 나체로서 야성적인 인간 존재가 노출 상태에 있는 계절이다. 이러한 에로티시즘 지향성의 문학은 정비석의 「성황당」에서도 그렇다. 여름은 소설에서 신체와 야성을 개방한다.
여름은 통과의례적인 계절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름은 가을의 풍요를 위한 일과 노동의 고역이 전제되는 계절이며 삶을 가장 극렬하게 괴롭히는 자연적 재난과 시련의 통과의례적인 과정이다. 농민들에게 주는 한해旱害, 태풍, 천둥, 번개, 홍수는 계절적인 시련이다. 황순원의 「소나기」김유정의 「소낙비」박화성의 「旱鬼」 등에 나타난 여름은 귀의와 친화의 자연도 아니고, 인간이 야욕의 성숙한 나신을 드러내는 여름도 아니다. 반도시적, 반문명적 목가적인 시를 생성하는 계절도 아니다. 인간에게 시련과 파괴를 주는 풍요를 위해 끈질기게 극복하고 타넘어야 하는 통과제의적인 삶의 장벽이다.
3) 가을 - 완성, 추억, 이별의 시학
사계 중에서 가장 시적이고 수필적인 계절은 가을이다. 가을을 노래하지 않는 시인은 없다. 가을의 사색을 넘어가는 수필가도 없다. 가을은 풍요와 결실과 완성이 성취되는 계절이다. 여름의 고통이 수확되는 인과의 순리와 흥겨운 축복을 깨닫게 하는 계절이다.
가을은 바람, 달, 밤, 이슬, 풀벌레, 단풍, 기러기, 국화, 서리, 낙엽 등의 서정적인 자연과 이별, 슬픔, 추억, 향수, 그리움, 고독, 조락의 노년, 죽음 등의 정서와의 만남을 가져오기도 한다. 다음 작품에서 발견된다.
나무들에겐 한 살 더 먹는다는 것 그리고 늙어간다는 것이 이토록 화려한 단풍으로부터 시작되는 모양이다. 한해를 마감하는 오색찬란한 ‘늙음’에 후회도 미련도 차마 없어 보인다. 어찌 보면 사람의 ‘늙음’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착과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늙어가는 것이 우리네 세상이 아니던가. 붉게 타오르다가도 때가 되면 미련 없이 잎을 떨군 나무를 바라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 김정자 「가을 속의 산책散策」
월명의 「제망매가」는 하나의 완성이면서 무상과 종말 죽음을 내포한다. 즉 시간적으로 슬픔, 고독, 죽음의 현재성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추억의 과거성을 지향케 하고 있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은 원방遠邦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다. 이 시에서 가을은 공간과 시간의 이중적 그리움으로 드러나고 있다. 별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너무도 멀리 있는 유년기의 심정적인 거리이다.
또한 가을의 풍요는 소설을 통해서 드러난다. 조선시대 소설인 「흥부전」이나 현대 소설에서도 가을은 고통을 극복함으로써 얻는 풍요와 수확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계절이다. 한편으로는 김유정의 소설 「만무방」에서처럼 수확의 보람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경험도 내재되어 있다.
4) 겨울-변덕, 고난, 온기溫氣, 눈, 대춘待春
겨울은 차가움, 비정, 고난, 잠, 죽음, 하강下降으로 표상되는 계절이다. 일반적으로 죽음과도 같은 불모 상태 내지는 상황의 냉각과 변절, 절망,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여건의 중압과 고난의 상태로서 표상성을 갖는다. 아울러 재생과 소생을 내포한다.
향가 「찬기파랑가」나 「원가」는 원초적으로 겨울을 변화 변덕으로 파악하고 이에 대응시키는 우의를 택하고 있다. ‘아으 잣가지 높아/ 서리 모르시올 화반이여’ ‘뜰의 잣이/가을에 아니 이물어지매/ 너 어찌 잊어하신/ 우럴던 낯의 고치신 겨울이여/’ 와 같이 ‘잣’과 ‘서리’와의 대칭 대립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늘 푸름과 눈, 서리와의 대비화를 통해 공간의 초월을 강조하고 있다.
겨울은 시련과 고통의 상징으로만 가지는 것은 아니다. 겨울은 인간으로 하여금 집안에 머물러 정애情愛의 행복한 공간에 대한 염원을 나타내기도 한다. 「만전춘별사」에서는 얼음 위에 댓잎자리라는 최악의 조건을 가정하여 오히려 더 행복할 것이라는 아이러니와 역설을 제시하고 있다.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 노천명의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이 시도 「만전춘」과 다를 바 없다. 절대 고독의 상황에서 ‘좋은 사람’만 있으면 ‘여왕’보다 행복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대비의 역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곧 겨울이다. 박완서의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은 눈 덮인 겨울이 인정의 온기를 이끌어낸다.
겨울은 흰눈으로 정결과 고결함의 색채적인 상징을 가져온다. 흰눈이 대지를 덮어버리는 정화淨化의 축복이 내리는 상태이고 지상을 다른 세계로 순환시킨다. 문학적 상상력은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합일의 상태에 이르거나 모든 오욕을 묻어 버리는 하평의 세계가 열리는 상태에 비유된다.
겨울은 기다림의 계절이다. 기다림의 대상은 봄이다. 순리에 따라 유폐와 죽음의 상태에서 재생과 소생의 상태를 기다리는 것이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이육사 「절정」
이 시는 극한상황에서 초극을 말하고 있다. 4연에서 혹독한 의식의 조건을 오히려 ‘강철로 된 무지개’로 만들어 버리는 역설로 실현된다. 겨울은 봄으로 이어지는 다리이고 봄으로 가는 황홀한 기다림의 의지인 것이다. 이러한 대춘 예감은 이육사의 「꽃」에서도 나타난다.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속 깊이 꽃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 이육사 「꽃」
겨울은 계절의 필연적 순환 질서에 의해 겨울은 다시 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겨울은 시련과의 대결, 시간 공간의 역설적 행복, 기다림을 의미하는 계절이다.
4. 휘갑치기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은 작가의 자유이며 작가의 시선에 따라 다르다. 수필은 세상을 보는 수필가의 독창적 안목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될 때 작품성을 갖는다. 세계는 아는 만큼만 보이기 때문에 작가의 영적인 안목도 중요하지만 작가의 지적 수준도 작가의 시야를 결정하는 조건이 된다. 작가의 독창적 인식은 독자의 공감을 얻어야 감동과 깨달음의 문학이라는 수필문학의 존재 의미를 확연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 민족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념을 알아보았다. 이 작업이 의미를 갖는다면 우리민족 가지는 색채, 신체, 死生, 길, 돈 등에 대해서도 탐구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러면 수필가의 눈에 세계의 모습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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