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강霜降에 핀 진달래
가을비가 내리고 날씨가 쌀쌀해졌다. 한 이틀 내린 비 때문에 가을이 다가와 발에 채인다. 가을비 치고는 제법 거센 빗줄기에 맞아 떨어져 흩날리는 나뭇잎들이 아파트 정원이나 근린공원 구석구석에 쌓여 있다. 비가 그치고 맑게 씻긴 하늘이 너무 파래서 더 차가워 보인다. 공원에 이제 막 땅심을 받기 시작한 진달래 이파리들이 어느새 물들이기를 시작했다. 여리고 붉은 잎이 소복소복 볕을 쬐고 있다. 진달래는 가을 단풍이 꽃보다 더 진하다는 말이 정말이구나. 소두少杜라고 하는 두목杜牧의 시구 상엽홍어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서리 맞은 잎이 이월의 꽃보다 더 붉다)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주변의 나무들도 어느새 철을 알아 모두 군말 없이 계절에 순응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새로 개발한 주택지에 조성한 시민 공원 나무들은 다르다. 봄에 심은 나무들이 아직 땅심을 온전하게 받지 못하여 단풍이 드는 둥 마는 둥 낙엽으로 지고 있다. 산을 깎아 거친 흙에 심은 나무들은 물들이기를 하기도 전에 거무죽죽한 색깔로 잎을 지우고 있다. 사람들이 버팀목을 대주기도 하면서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애를 쓰지만, 그 아이들에게는 아직도 길어 올린 땅심도 시간을 두고 받은 볕도 부족한 모양이다.
무덕무덕 심어놓은 진달래 곁을 생각도 없이 지나치려다 깜짝 놀랐다. 이월의 꽃보다 붉은 진달래 단풍 속에서 연분홍 꽃이 피어난 것이다. 새빨간 이파리들 사이로 빠끔히 얼굴을 내밀고 피어난 여린 진달래 세 송이……․ 이제 곧 서리가 내릴 텐데 가녀린 꽃잎이 안쓰러워 한참을 앉아서 들여다보았다. 여린 꽃잎을 보노라니 이미 붉게 물든 잎들이 오히려 강한 생명력을 돋보이는 것 같았다. 붉은 잎은 서리를 맞으면 더 붉어지겠지만 여린 꽃잎은 차가운 서리를 어떻게 견딜까. 진달래가 철을 모르고 서리 내리는 계절에 꽃을 피운 이유는 무엇일까? 자연은 왜 철모르는 진달래를 말없이 안고 있을까?
철모르는 진달래는 한두 군데 피어난 것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진달래 무더기마다 한두 송이씩 피어났다. 이제 내일이면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인데 어쩌려고 이렇게 피어났을까? 진달래 단풍들은 저녁노을을 받아 더 빨갛게 독이 올리면서 내일 내릴 서리랑 한바탕 대결하려는 의지를 내 보이고 있는데 설마 진달래도 그런 독한 마음을 먹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철모르는 진달래들을 그냥 두고 돌아설 수가 없었다.
공원에 심은 진달래들은 온실에서 자란 것들이다. 볕이 강하면 가림막을 쳐 주었을 테고, 볕이 약하면 불을 지펴주었을 것이다. 땅이 마르면 물을 품어주고, 물이 너무 많으면 배수를 해주었을 것이다. 사시사철 같은 온도, 같은 볕, 같은 습도이니 철이 가고 서리가 내리는 자연의 변화를 몸으로 배웠을 리가 없다. 뿌리가 촉촉해지고 볕이 조금만 따뜻해도 그냥 꽃을 피우던 버르장머리를 저로서는 난세인 이 공원에 와서도 버릴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본래의 제 태생지인 산에서 떨어진 씨앗으로 추위에 얼어 보기도 하고, 어린 새싹으로 더위에 지쳐 보기도 하면서, 진자리 마른자리를 제 스스로가 견디어 낸 진달래가 아니다. 언제쯤 달이 뜨고 지는지도 다 배워 터득한 야생 진달래랑은 다른 것이다. 소쩍새가 울면 꽃을 피우고, 달이 차가워지면 물들이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짐작해서 아는 산에 사는 진달래가 아니다. 구름이 돌면 그냥 돌다 가는 구름인지 보슬비를 뿌릴 구름인지 폭우를 퍼부을 구름인지도 다 아는 자연이 낳은 진달래가 아니다. 계절을 알고 철을 알고 철에 대처하는 지혜도 배우지 못한 것이다.
자연은 언제나 자연 그대로이다. 절로 변하고 굴러가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섭리를 거스르는 것은 인간이다. 철을 모르는 것은 상강에 피어난 진달래가 아니라 계절을 감추고 상강을 가르치지 않은 인간의 권력 남용이고 폭력이다. 산에 살아야 할 진달래를 온실로 유인한 것도 인간이고, 숟가락을 빼앗아 스스로 먹을 수 있는 밥을 먹여준 것도 인간이다. 진달래는 인간의 폭력으로 자연이면서 제 스스로 순응해야 할 섭리를 모른다. 온실에서 자란 고급스러운 진달래는 상강에 꽃을 피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다. 반짝 여우처럼 지나가는 볕에도 바보처럼 꽃을 피울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요즘 진달래는 상강에 처신할 줄을 모른다.
인간이 섭리를 거스르도록 강제하는 것은 진달래뿐만이 아니다. 겨울에도 수박을 따고 오이냉국을 먹는다. 그런 폭력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제 몸이 겨울에 수박을 받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그 신기한 짓을 자랑으로 여긴다. 흙에 심을 상추를 물에 심고, 습지에서나 돋아날 버섯을 병속에서 길러낸다. 똑 같이 닮은 양羊을 만들어 내고, 돼지 허파를 대량 생산하여 사람에게 이식하려 한다. 이것이 일상이고 자랑이 되는 무서운 역사가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다. 섭리에 순응하는 것은 어느새 전설이 되고 있다.
인간은 자연에만 폭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의 자식들도 잘못 길러내고 있다. 젊은 시절 온실에 가두어 놓고 진달래를 길러내듯이 자신의 판단으로 물을 뿌리고,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비료를 주고 볕을 주어 길러낸다. 배우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르는 사람의 목적과 의도대로 길러낸다. 섭리를 거스른 것은 진달래 온실이나 마찬가지이다. 온실에서 길러진 사람은 진달래처럼 상강에 꽃을 피운다. 섭리를 거슬러 키워진 사람은 자연스럽게 섭리를 거스른다.
최근에 철모르고 피어났다가 구설수에 오르는 선량選良들을 보면 상강에 피어난 진달래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유신 시대, 군사정권, 부정과 부패라는 밥을 먹고 그런 공기를 마시고, 무한 경쟁이라는 왜곡된 사회와 역사 속에서 본질을 벗어난 교육을 받아 오늘을 맞은 그들이 상강을 모르는 진달래 같아 답답하다. 역사와 시대 정신이 오염되면 젊은이들의 가치관도 때가 묻게 되어 있다. 진달래꽃이 이월에 피는 것이 섭리이듯이 그들도 올바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았으면 좋겠다. 제발 선량選良들만이라도 진정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도 탈이 없는 입이 되었으면 좋겠다. 된서리를 맞기 전에 자연을 알고 섭리를 배우는 지혜를 가졌으면 좋겠다.
내일이 상강이다. 진달래꽃은 이월에 피어야 곱고 단풍은 서리를 맞아야 아름답다. 사람도 제 스스로 살찌운 철학을 가지고 아무렇게나 나대다 보면 서슬이 퍼런 서리를 맞게 된다. 철을 어기고 독야청청하다고 귀하게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일 아침이면 서리가 하얗게 내릴 텐데 어쩌려고 연분홍 꽃을 피우고 있을까. 여린 꽃잎에 서슬이 퍼런 서리에 얼어버릴 것을 생각하면 안쓰럽기 짝이 없다
(2014.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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