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버마재비 문답(自責)

보련산 버마재비 - 상행 2012 -

느림보 이방주 2012. 9. 26. 06:05

보련산 버마재비

- 상행 2012 -

 

이방주

 

보련산에나 가자. 이 답답한 하늘이 보련산에 가면 열리려나. 그러나 계산하는 것조차 답답한 하늘을 만드는 것임을 아는가? 최근에 김광규의 시 <상행>을 읽고 난 뒤 왼쪽 옆구리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와 나를 괴롭히는 버마재비와 싸움을 여기서 끝내고 싶었다. 우선 연꽃 같은 보련산 보탑사에 정중하게 모신 아름다운 부처님께 3배를 올리자. 그리고 땀을 흠뻑 흘리자. 보련산 연꽃잎을 한잎 한잎 오를 때마다 부처님께 비는 거야. 거룩한 부처님이시여, 제발 제 옆구리에서 기어 나오는 버마재비를 처단해 주십시오. 기어 나와서 저에게 가차 없이 채찍을 휘두르는 저 버마재비를 처단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는 그냥 커다란 소가 되어 살아가게 버려두십시오. 소처럼 아무 생각 없이 밥이나 잘 먹고 똥이나 잘 싸고 잠이나 잘 자는 소나 되게 해 주십시오. 되새김질도 모르는 그런 바보 같은 소가 되게 해 주십시오. 거룩하신 부처님 버마재비의 쓸데없는 소리를 들을 줄 모르는 소가 되게 해 주십시오.

 

보탑사에는 비구니스님들이 꽃을 가꾸었다. 꽃의 아름다움 속에는 어떤 심술맞은 버마재비도 살 수 없어 나는 나대로 내 생각대로 그냥 지나칠 수 있었다. 대웅전에 들어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려 했는데, 무슨 법회가 한창이라 망설이다 말았다. 바로 보탑사를 에워싸고 있는 연꽃송이의 한 잎이 되는 봉우리에 올랐다.

 

남쪽 등마루를 타기 시작했다. 미리 떨어진 낙엽들 때문에 길은 양탄자를 깐 듯 부드럽다. 누군가 오솔길로 기어드는 잡목들의 가지를 잡아서 걸림도 없는 산행을 할 수 있었다. 짠들짠들한 마지막 가을볕이 등산복 속까지 파고든다. 장딴지에 힘이 들어간다. 허벅지에 근육이 생기는 기분이다. 푸른 하늘에 떠있는 구름처럼 나도 따라 뜨는 기분이다. 기분 좋다. 그래 맞아 건강하게 이렇게 사는 거야. 우리 내외의 건강이나 돌보며, 내 자식들 행복하게 사는 것이나 보면서 행복하게 사는 거야.

 

길가 너럭바위가 있다. 내가 앉고도 두세 명은 더 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유 있다. 아무도 없으니까. 따라오는 이도 따라오라고 하는 이도 없다. 배낭을 펴고 앉았다. 아내가 챙겨준 과일 봉지를 폈다. 익어터진 포도에서 가을 햇살 향기가 난다. 포도 한 알을 입에 넣으니 온 세상이 다 달고 향기롭다. 혀에 감도는 맛의 행복에 취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렇게 행복한 순간에 왜 이런 시가 떠오르는가?

 

 

가을 연기 자욱한 저녁 들판으로

상행 열차를 타고 평택을 지나갈 때

흔들리는 차창에서 너는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 다오.

오징어를 씹으며 화투판을 벌이는

낯익은 얼굴들이 네 곁에 있지 않으냐.

황혼 속에 고함치는 원색의 지붕들과

잠자리처럼 파들거리는 TV안테나들

흥미 있는 주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다오.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 같은

심야 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듣기 힘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 다오.

확성기마다 울려 나오는 힘찬 노래와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냐.

예부터 인생은 여행에 비유되었으니

맥주나 콜라를 마시며

즐거운 여행을 해다오.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아 다오.

놀라울 때는 다만 '!'라고 말해 다오.

보다 긴 말을 하고 싶으면 침묵해 다오.

침묵이 어색할 때는

오랫동안 가문 날씨에 관하여

아르헨티나의 축구경기에 관하여

성장하는 GNP와 증권 시세에 관하여

이야기해 다오.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상행 -김광규-

 

나는 나를 맞아 싸운다. 아냐, 난 그냥 포도 먹는 나만 생각하면 된다. 포도 향에 취한 나만 생각하면 된다. 앉은 채로 발버둥친다. 다시 포도송이를 집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날갯죽지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기를 한 버마재비 한 마리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놈이 아직은 연두색인 배때기를 내게 내밀며 곤두서기를 하고 있었다. 도끼 모양의 두 발을 들어 알통을 자랑하려는 듯 바둥바둥 용을 쓰고 있었다. 저리 가라 이놈아. 손가락으로 탁 튕겨버리려는데 세모대가리를 좌우로 돌리며 튀어나온 눈을 한껏 부라린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앉아서 용쓰는 버마재비만 바라보고 있었다.

 

- 느림보님 그렇게 혐오하는 눈으로 날 보지 마세요.

- 너는 왜 내가 행복한 순간에만 찾아 오냐?

- 부처님을 본체 만체 하면서 무슨 불자란 말인가요?

- 마음으로 삼배를 했느니라.

- , 마음이라고요. 마음이 있으면 지금 이 순간에 한가하게 산행이나 하고 있나요? 뭐라, 소가 되게 해 달라고요. 바보 같은 소나 되게 해달라고요. 그게 바로 불자의 발원이란 말이요? 세상이야 어찌 돌아가건 나만 한가하고 행복하면 된다고요?

- 그래 이 오줌싸개 세모대가리야. 나 좀 내버려둬라. 향긋한 포도 향에 취한 나를 그냥 둬라. 나는 달콤한 행복에 젖어 그냥 살련다. 비들비들 말라가는 세상, 농약에 취해 멍들어가는 볏논에 메뚜기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면 안 되냐.

- 그러슈. 그럼 왜 역사와 시대에 고민이 없는 사람이 무슨 문인이냐고 그럴 듯한 소리를 나불거렸나요.

- 버마재비님 제발 제발 나 좀 그냥 둬요. 라디오 소리도 뉴스도 다 무서워요. 여기 보련산 연꽃 속에 묻혀 땅강아지처럼 살게 버려 주세요. 제발 버마재비 어르신

 

나는 무릎 꿇고 비는 마음으로 내 옆구리에서 기어 나온 버마재비에게 눈물로 빌고 또 빌었다. 그냥 살게 해 다오. 그냥 살게 해 다오.

(2301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