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것대산이나(病床일기)

것대산이나 바라보며 -병상에서 7일 째

느림보 이방주 2009. 3. 31. 22:12

 

2월 19일(목)

 

새벽에 X-ray 촬영


7시에 내려 갔는데 사람들이 엄청나게 밀려 있다. 사람들은 가지각색이다. 그 분들에 비하면 나는 환자도 아니다. 참혹해서 바라볼 수조차 없다. 거기다가 노인들은 더 심하다. 거의 검은 강물을 반쯤 건너가 있는 분들이다. 젊은이들은 어떤 사고인지 모르나 일그러진 모습이다. 먼저 찍겠다고 앞질러 갈 엄두도 못낸다.


촬영을 끝내고 오니 아침 식사 시간이 늦었다. 그나마 국이 싸늘하게 식어 있다. 그런대로 그냥 먹어 두었다. 먹는 약이 두 알로 줄었다. 오전에 발진이 또 약하게 일어났다. 특별한 것을 먹은게 없는데 까닭도 없이 일어난다. 회진 후 주사를 맞았다. 알레르기 원인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아무런 알레르기도 없단다. 다만 약물의 부작용이라고 한다. 아마도 몸이 지나친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나을 것이라는 뜻이 된다.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그건 없어질 것이라고 본다. 지난번 인턴인지 레지던트인지 모르는 사람이 한 말과는 사뭇 다르다. 회진 후에도 언제 퇴원할 것이라는 말은 없다.


말도 없이 주사, 또 주사, 링거, 약만 계속한다.


아내가 김치복음, 깻잎, 구이김을 가져왔다. 밥맛이 좋다. 떡도 사왔다.


아파트 103호 아주머니가 왔다. 미안하고 고맙다. 부군이 병원에 있을 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국어과의 박선생님과 같은 사무실에 계시는 선생님들이 오셨다. 게다가 순회 나오시는 선생님까지 오셨다. 미안하고 고맙다. 아니 괴로웠다. 다른 분들이 병원에 계실 때 나는 얼마나 성의를 가지고 가 보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정말 할 말이 없다.


아내는 몸살이 났다. 몸살이 날만도 하다. 계속해서 편두통이 있다고 한다. 머리 아픈 것만큼 괴롭고 걱정되는 일은 도 없을 것이다. 나는 진료를 받아보라고 권했다. 신경외과 진료를 받았다. 별달리 큰일은 아니라고 해서 안심이다. 약을 지어 왔다. 나는 자꾸 아침에 왔다가 운동을 하고 저녁에 또 오든지 하면서 일상을 변치 말기를 바랬다. 그러나 아내 입장에서는 또 그렇게 하지 못하겠는 모양이다.


옆자리 텔레비전 광은 6인실로 옮겨갔다. 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것인가? 아마 산재보험이 2인실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 것 같다. 그래서 지금가지 입원비를 자신이 몽땅 내게 되었다고 투덜거리는 듯 했다. 아무튼 나는 2인실을 혼자 쓰게 되었다. 맞춤복지보험은 2인실까지 허용된다고 이효정 선생니 말해 주었다. 편하다. 그리고 청남학교 운동장에 아이들 노는 모습과 것대산 바라보기가 좋았다. 계속 누워 있을 수도 없어서 침상 위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것대산을 바라보는 것이 하루의 일과이다. 그러다가 논문을 읽고 수필학회에서 나온 隨筆學이라는 회지를 15권,16을 읽었다. 새로운 내용들이 많다. 피곤해지면 눕는다. 이렇게 습관이 되면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죽은 채로 살아있는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나 다름 없다. 청남학교 뒷산에 나물 캐는 이들이 보인다. 봄에는 봄이 빠르게 오는 모양이다. 여긴 늘 이대로인데------.


이현우 박사의 학위 논문(김팔봉 문학 연구)을 끝냈다. 카프 활동을 중심으로 팔봉의 변절적인 문학 활동을 조명했다. 역사란 무엇인가? 팔봉은 과연 역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하지 못해서 그렇게 살았을까? 아니면 자신의 철저한 내면 철학에 의해서 친일을 선택했을까? 압력이 있었을까? 현실에 만족했을까? 역사의 방향을 잘못 짐작했을까? 그런 분이 역사의 존재를 가벼이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논문을 읽는 동안 그의 줏대 없는 행동에 실망이 컸다. 차라리 일제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하는 수 없이 친일을 선택하여 목숨을 부지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팔봉의 수필을 읽고 싶어서 아들에게 수필집을 가져오라고 했으나 글씨가 너무 작아 읽을 수가 없다. 팔봉이 고향의 이웃 마을 출신이라 더 안타까웠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위로의 문자를 보냈다. 일일이 답을 썼다. 누구보다도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