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에세이의 뜨락

<에세이 뜨락> 예일대 친구(박순철)

느림보 이방주 2009. 3. 7. 01:30

예일대 친구

 

중부매일 jb@jbnews.com

 

잔잔한 이야기 코너인 '에세이 뜨락'은 지역 수필가들이 1주일에 한 번씩 방문, 삶의 여정에서 건져올린 생각을 수필, 꽁트 등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작은 사랑방입니다.

나에게는 예일대 다니는 친구가 한 명 있다. 그는 남에게 피해 주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싫은 소리도 하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천하기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너그러운 성격을 가졌으니 모두 부러워하는 예일대에 들어갈 수 있었지 싶다.

예일대는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수재 소리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면 근처에도 가기 어려운 곳이며 선망의 학교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런 명문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공부도 잘해야겠지만, 예의 바르고, 선배를 위하고 후배들을 끌어안고 어우를 줄 아는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라야 할 것이다.

나는 말단 공무원으로, 그 친구는 국영기업체 중견간부로 정년을 맞이했다. 나이는 동갑이지만 내가 6개월 정도 먼저 퇴직 했으니 사회생활은 내가 선배라며 농담을 할 때도 있다.

내가 퇴직 후 한가하게 놀 적에 친구는 직장을 나가며 나를 부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구경이나 다니면서 즐겁게 보내라며 좋은 말도 많이 해주었다. 친구도 퇴직 후에는 그리하겠다고 했지만, 전국에 있는 사찰을 거의 순례했으니 가볼 곳도 마땅찮을 게다.

   
▲ 젊어서는 미래에 대한 꿈을 키우며 살고, 나이가 들어서는 젊은 날을 회상하며 사는 것이라 했던가. 하지만, 미래가 보장되고, 과거가 아무리 찬란해도 현재의 삶이 팍팍하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일자리가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니 다른 것에 구애받지 말라고.

할 일이 없다는 것,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6개월 후 친구가 퇴직 하고서는 막막하고 당황해 하는 기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에는 두세 시간 운전하는 것은 즐겁다던 사람이 한 시간 거리를 두 번이나 쉬면서 갔다고 토로할 정도로 사회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

퇴직이 가까워지면 젊은 날 한 번쯤 꿈꾸어 보았음 직한 명문대학에서 입시 원서가 아닌, 입학 허가서가 나온다고 한다. 그 유명한 하버드대 학생이 되면 하는 일 없이 바깥에 들락거리기만 하고, 동경대 학생이 되면 종일 동네 경로당에서 시간을 보낸단다. 하와이대 학생은 아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구박 받는 사람이라나……. 그중 명문대는, 예전처럼 일할 수 있는 예일대라고 하는 유머가 있는데 친구가 그 예일대 학생이 된 것이다.

나도 한때 예일대에 다닌 적이 있다. 퇴직 후 8개월 정도 지나서 전에 근무하던 직장에서 경력자 1명과 미취업 대학졸업자 몇 명을 모집한다는 연락이 왔다. 국가에서 일자리 창출의 실시하는 사업이란다. 근무 시간은 오후 한 시부터 밤 열 시까지, 약간 부담스럽기는 해도 어차피 봉사활동이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할 판국에 출근하기로 결정을 했다. 내가 출근해서 하는 업무는 책 대출과 반납에 관한 일인데 젊은 계약직들이 있으니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친구는 직장으로 나를 자주 찾아왔다. 책을 빌리러 왔다고는 하지만, 남아도는 시간을 보내기 위함임을 직감적으로 느끼곤 했다. 올 때마다 어떻게 하면 다시 취업할 수 있느냐며 나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어느 날 저녁이나 먹자고 해서 만났는데 어렵게 말문을 연다. 전에 다니던 직장 후배가 일자리를 알선해주었는데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라는 게다. 하도급을 준 업자 밑에서 근무해야 하는 곳이어서 중견간부로 근무하던 친구에겐 적잖은 부담이 된단다. 더구나 그곳은 하위직, 기능이 있는 퇴직자들이 들어가던 전례가 있어서 비난의 소리라도 들려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더욱 망설여진다는 것이다. 우선은 전에 데리고 있던 직원들 보기도 민망하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볼까도 두렵다는 것이다.

퇴직한 사람이 현직에 있을 때처럼, 똑같은 직원으로서의 대우를 받을 순 없다. 물론 더 좋은 대우를 받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젊어서는 미래에 대한 꿈을 키우며 살고, 나이가 들어서는 젊은 날을 회상하며 사는 것이라 했던가. 하지만, 미래가 보장되고, 과거가 아무리 찬란해도 현재의 삶이 팍팍하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일자리가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니 다른 것에 구애받지 말라고.

한번은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적선을 적게 한 탓에 정부 지원이 줄어들었고, 그 바람에 예일대를 1년 만에 졸업해야 했지만, 친구는 적선을 많이 해서 예일대 5년을 다닐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복 받은 사람이라고, 사람 좋은 친구는 그래도 피식 피식 웃기만 했고 우리는 그날 저녁 많은 양의 술을 마셨었다.

이 친구 다른 사람에겐 넉넉해도 나에게는 인색한 편인 것 같다. 지난해 가을 청량산으로 등산 갔을 때의 일이다. 친구는 배낭도 점심도 가져오지 않았다. 더부룩한 위장을 다스리기 위해 가끔 속을 비워줘야 한다며 물 한 병만 들고 앞장서 올라간다. 배낭이 무거운 것은 아니었으나 잠깐이라도 받아주겠지 생각했다. 나는 안중에도 없고 커다란 배낭을 메고 헉헉거리는 뚱보(?) 아가씨 배낭을 반강제로 받아드는 게 아닌가. 인정머리 없는 사람 같으니……. 예일대 다니는 사람은 적선도 사람 봐가며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