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에세이의 뜨락

후회(박순철)

느림보 이방주 2008. 5. 30. 08:13
후 회

 

중부매일 jb@jbnews.com

 

잔잔한 이야기 코너인 '에세이 뜨락'은 지역 수필가들이 1주일에 한 번씩 방문, 삶의 여정에서 건져올린 생각을 수필, 꽁트 등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작은 사랑방입니다.

  내가 아는 한 지인은 무슨 일이든 한번 끝난 일은 후회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항상 최선을 다했다고 그리 생각하면 마음도 편할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은 다음 일에 대한 대처도 빠르고 여유로울 것이란 생각에, 그런 낙천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 부럽기까지 하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에 항상 하고자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되면 최선의 길이라 생각되어 행할 것이다. 일을 하기도 전에 결과가 부담이 되어 망설인다면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쳐 낭패를 보는 수도 있게 되리라. 일은 신중하게 처리하되 판단은 빠를수록 좋다는 말이 그래서 생겨났는지도 모르겠다.

   
  청주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우암산이 있어 행복함을 느낀다. 마음이 허허로울 때, 생각하고 있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우암산에 올라가면서 생각을 하면 쉽게 풀리는 때가 많았다. 남는 시간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오르내린 것도 꽤 여러 날 될 것이다. 꼭 높은 산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높으면 높은 데로, 낮으면 낮은 데로 산의 묘미가 있다. 싱그러운 녹음 속을 거닐면 마음에 평정이 찾아온다. 집에서부터 천천히 올라가도 한 시간이면 충분히 올라갈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복 받은 일인가.

  그  날도 우암산에서 내려와 목욕탕으로 향했다. 샤워를 하고 온탕에 들어앉으니 세상만사 모두 얻은 것처럼 마음이 뿌듯했다. 산에서 마신 맑은 공기, 떠오르는 아침 햇살의 정기, 알맞은 온탕의 열기까지 더해져서 기분도 좋아지고 머릿속에서 맴돌던 글의 구성도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그래 서두는 그 여인을 만나는 시점으로 하고…'
풍덩! 고요한 호수에 돌이 던져졌다.
  상념은 흐트러지고 평온하기만 하던 가슴은 울렁대기 시작했다. 눈초리가 치켜 올라가고 이마가 찡그려지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나만 그런가 하고 옆을 돌아다보니 옆 사람도 마뜩찮아 보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황야의 무법자처럼 나타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지금쯤 일터에 있어야 할 시간에 목욕탕이라니…. 검으스레한 얼굴, 윤기 없는 눈동자 등, 여러 정황으로 생각해 볼 때 어쩌면 직장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사람이 이용하는 곳에서는 지켜야 할 예의가 있는 법, 모두 발가벗고 있는 목욕탕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우선 가볍게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탕에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인데 이 사내는 앞의 과정을 생략하고 온탕에 뛰어 든 것이다.

  외모만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겠으나 사내의 용모나 행동으로 보아 인기 직종에 종사하는 것 같진 않았다.

텀벙 뛰어들긴 했으나 행동은 무법자답지 못했다. 등이나 팔뚝에 문신이 요란하다거나 체격이 우람했다면 다음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봐요. 아무리 급해도 몸은 씻고 들어와야지"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나의 좁은 소갈머리가 참지 못하고 기어이 꿈틀거리고 말았다. 옆에 있던 사람도 나의 용기(?) 있는 행동에 찬사를 보내는 듯 눈을 반짝였으나 다른 두 사람은 무표정하게 눈을 지그시 감고만 있다.

욱-하는 성질에 내뱉기는 했어도 '아차' 싶었다. 젊은이가 항변이라도 하는 날이면 톡톡히 창피를 당할 수도 있는 일이다.

샤워 않고 온탕에 들어온 게 그리 크게 잘못된 일도 아니려니와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데 내가 뭐 잘났다고 이래라 저래라 했는지 모르겠다. 일을 저질러 놓고도 젊은이의 표정을 살피기에 바빴다. 사내는 자신의 잘못을 아는지 모르는지 '죄송합니다.'하는 말을 남기고는 물 밖으로 목만 내놓고는 눈을 감아 버린다.

  지금 젊은이들이 어디 다른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세상이던가. 참으로 개탄스런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담배 피우는 학생들을 훈계하다가 봉변당했다는 이야기는 아주 하찮은 일에 불과하다. 자신의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는 인정과 예의가 사라져가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이다.
  한마디 더 할까 말까 망설이는데 서서히 괜한 짓을 했구나 하는 후회가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 사내의 모습에 피곤한 기색이 서서히 배어나와 측은해보였기 때문이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샤워할 생각도 없이 온탕으로 뛰어들었을까. 아마도 밤샘 근무를 마치고 가볍게 목욕을 하고 집에 들어가 단잠을 잘 참이었을 것이다. 사내를 질책한 내 자신이 참으로 후회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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