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에세이의 뜨락

뚜껑 (박종희)

느림보 이방주 2008. 5. 17. 16:11
뚜 껑

 

중부매일 jb@jbnews.com

 

잔잔한 이야기 코너인 '에세이 뜨락'은 지역 수필가들이 1주일에 한 번씩 방문, 삶의 여정에서 건져올린 생각을 수필, 꽁트 등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작은 사랑방입니다.

행운권이 숨어 있는 음료수 한 상자가 선물로 들어왔다. 행운권에 당첨되면 전자수첩, 그리고 1등은 해외여행권도 준다 하니 더욱 구미가 당겼다. 10병씩 10통이 담겨서 100병이나 되는데, 음료를 놓고 고민하는 나를 보고 남편은 우매한 일에 목숨 걸지 말라며 핀잔을 준다.

뚜껑을 따놓아 음료수까지 못 먹게 하지 말라는 남편의 말을 무시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첫 번째 뚜껑을 땄다. 그러나 나를 향해 '씩' 웃고 있는 글자는 '꽝, 다음 기회에' 이었다. 설마?100 병중에 하나는 걸리겠지 싶어 아예 한통을 가져다가 차례대로 열었는데, 역시나 한결같이 '꽝, 다음 기회에' 라는 글자뿐이다. 마지막 병을 따며 남편을 바라보니, 뉴스를 보고 있던 남편도 내심 기대를 했었던지, 내 표정을 살피며 어색하게 웃는다.

   
요즘 웬만한 제품은 행운권을 추첨하는 이벤트 행사를 한다. 물론 행운권에 눈이 멀어 충동적 구매를 할 것이라는 회사의 마케팅수단이겠지만, 아무 생각 없이 사들인 제품의 이벤트에 당첨되는 일이 종종 있던 나로서는, 공짜로 생긴 음료수에 보너스까지 있으니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마감 일자를 기억하며 하루에 한 통씩 뚜껑을 열었지만 결과는 '한 병 더'라는 행운만 세 통을 얻었다. 결국, 음료수만 다시 30병이 늘어난 셈이다.

살다 보면 꼭, 뚜껑을 열어 확인해야 할 일이 있다. 뚜껑을 열기 전에는 어떤 것이 들어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설령 눈으로 보이는 유리병 속의 음료 색깔이나 농축의 정도로 어떤 맛일 것이라고 가늠할 순 있지만, 그렇게 짐작으로 샀다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맛이라 낭패를 보는 일도 있다.

뚜껑은 외부의 유해 물질로부터 내용물을 보호하지만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며 맛을 보존하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도 마개를 잘 봉하지 않으면 제품이 변하거나 숙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안에 든 것을 확인하려면 뚜껑도 잘 열어야 한다. 자칫 잘못 열게 되면 내용물이 넘치거나 쏟아지고, 정해진 기간을 지키지 않으면 원하는 맛을 얻을 수 없다.

그러고 보면 모든 물건에 뚜껑은 사람의 입과 같다. 뚜껑을 여는 일은 물건의 입을 여는 일이다. 물건의 뚜껑처럼 사람의 입을 열고 닫을 때에도 늘 조심해야 한다. 뚜껑이 제품의 맛을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면 사람의 입은 자신의 품위와 인격을 높여준다.

입은 음식을 먹어 건강을 유지하게 하지만 내면의 마음을 표현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좋은 음식이 몸에도 좋듯이 좋은 말은 사람을 감동시킨다.

가끔 솔직한 성격을 핑계 대며 상대를 의식하지 않고 하는 말로 상처를 주는 사람들을 보는데, 그건 솔직한 성격이 이유가 아니라 자기 합리화를 하려는 것이라 생각한다. 누군들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마음속에 있는 말을 다하고 산다면 인간관계는 어떻게 될까.

제 몸에 꼭 맞는 뚜껑처럼 사람의 입도 좋은 말만 하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입으로 하는 칭찬은 사람을 기쁘게 만들고, 무엇보다도 귀는 조근조근 입이 해주는 칭찬을 제일 좋아한다. 입으로 산삼을 먹는 것보다, 귀로 먹는 보약과 같은 것이 입이 해주는 좋은 말이다.

거울을 보며 다물어져 있는 입술을 들여다본다. 이제껏 내 입은 어떤 역할을 하며 살아왔을까. 살면서 입으로 한 실수 때문에 뼈저리게 후회했던 일이 나에게도 있다. 간암으로 투병 중에 계시던 아버님께 서운한 말씀을 드린 것이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한이 된다. 생각해보면 마땅히 드릴 말씀이었지만, 아버님이나 시누들이 받아들이기엔 많이 서운했었던 것이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아버님상황에서 생각했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후회하며 살지는 않을 텐데.

사람이 한 실수 중에서 가장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생각 없이 하는 말이다. 입이 뱉어낸 가시 있는 말은 영원히 잊히지 않으니 말이다. 조심한다고 하지만 여러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본의 아니게 내 입도 다른 입과 어울려 좋지 않은 일에 맞장구를 쳐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냉정하게 말하는 나쁜 습관 때문에 가끔은 내 입도 누군가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때로는 내가 던진 한마디에 잠 못 이루고 가슴을 쓸어내린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늘 마음속으로 묵상한다. 더 많이 침묵하며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나이가 들어도 뻔뻔해 지지 않고, 거칠어 지지 않는 입으로 살고 싶다. 숙성을 잘 시켜 좋은 제품을 만들어 주는 뚜껑처럼, 내 입도 마음을 잘 다스려 얼굴에 담긴 이미지와 조화를 잘 이루도록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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