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한국의 사찰

삶의 뿌리를 찾아서

느림보 이방주 2005. 3. 1. 22:11
 햇살이 따사롭다. 피곤한 2월말, 정말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가물가물하다. 아내와 함께 용범이 기현이가  자취하는 집에 가기로 한 날이다. 아이들 반찬을 마련해다 주고 싶어하는 아내의 속내를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또 꼭 내가 가야하는 것은 컴퓨터를 갖다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게 크게 소용되지 않는 컴퓨터를 용범이 주기로 맘먹은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그러나 나이 먹어갈수록 자꾸 아이들에 대한 무언가 미덥지 못해 하는 습관 때문에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어른스러워 보이는 아들에게 컴퓨터를 내주고 내가 물려 주었던 낡은 노트북을 쓰기로 했다. 나야 글만 쓰면 되는 것이고 웬만한 인터넷은 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데 아내가 갑자기 어디 가까운 절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내가 쉬고 싶어하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다. 그러기로 했다. 아내가 계획을 바꾸어 절을 가고 싶어하는 까닭을 말 안해도 알기 때문에 좀 더 의미있는 곳을 생각했다. 그러다가 언젠가 박달재를 오르면서 내려다 보이던 작은 절집이 생각났다. 지도를 찾아 보니 '경은사'였다.

경은사 모롱이를 들어서는 아내

 

 

  경은사로 가기로 했다. 쭉쭉 솟은 솔숲 사이로 기암기석이 삐죽삐죽 조화를 이루고 그 바위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던 잿빛 절지붕이 기억 속에 아련하다. 그런 아름다운 절이 바로 아내의 간절한 발원을 부처님께 전해 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경은사 대웅전(절집과 소나무가 조화롭다)

 

  아내와 함께 대웅전에 들어가 삼배를 올렸다. 우리 내외의 발원은 말 안해도 하나이다. 나는 삼배만 드리고 대웅전을 나왔으나 아내의 발원은 언제나 나보다 절실해서 한동안 절마당을 서성였다. 나는 절에서 보이는 천등산을 향해서 셧터를 눌렀다. 아직 사진이라고 할 수도 없는 내 사진이 우습지만 산이 워낙 웅장하고 소나무가 아름다워서 그냥 볼만하리라 믿는다. 그러나 멀리 보이는 천등산은 산허리를 잘라 가로 지르는 찻길 때문에 애처롭게 보였다.

멀리 보이는 천등산
 
  우리 내외는 절마당 가에서 샘솟은 물을 마셨다. 깊은 산 솔뿌리가 머금었다 뱉어 내는 샘물맛은 정말 시원하고 향기롭다. 마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산은 저절로 일주문을 이루고 있는듯 하다. 산 줄기가 양팔로 쓸어안듯이 절집을 품고 있다. 게다가 그 양팔 사이로 안산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 석탑이 솟아 있다. 역시 잘생긴 소나무 몇 그루를 고두 세우고 있는 모습이 고졸하다

경은사 안산 격인 자연 석탑 꼭대기에 인공 탑이 보인다.
 
  이에 앞서 백운을 지나는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경은사 들어가는 입구를 잘 몰라서 우리는 박달재 옛길을 올랐다. 옛길에서 내려다 보이던 절집을 바라보면서 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옛길에는 눈이 쌓여 있고, 군데군데 얼어 있었다. 마음이 착해서 작은 어려움에도 겁많은 아내는 운전하는 내게 어머니처럼 잔소리를 한다.옛길에서 바라보이는 절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소나무를 좋아하는 내가 기암기석에 어울린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절집의 잿빛 기와 지붕에 반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차를 돌리기 위해 옛날에는 정말로 흥청거리던 박달재 서원휴게소 마당을 한바퀴 돌았다. 굴길이 뚫린 이후로 별로 들러볼 일이 없었는데 그새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그 가운데 박달도령과 금봉이 설화를 주제로한 목공에 작품이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장승을 변형시킨 모습으로 박달도령이 금봉이를 안거나 업고 있는 모습이 많았다. 다정한 두 남녀의 모습을 형상화한 목공예품들은 어딘지 모르게 성애의 심상을 갖고 있었다.  특히 마당에 깎아 세운 남근목은 남의 아랫도리에 공연한 힘을 솟게 했다.
 
  사람들은 애틋한 사랑 이야기도 꼭 성과 관련시켜서 관심을 끌고 흥행시키려 한다. 그래야 눈길을 끄는 것이 인지상정인 모양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의 뿌리는 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근(男根)이라고 하지 않는가?  찬란한 봄 햇살을 뚫고 하늘을 향하여 불끈불끈 치솟는 힘으로  서있는 힘찬 그 남근목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남근은 생명의 원천이다."  여성이 있어야 잉태할 수 있다지만 생명수의 근원은 말할것도 없이  남성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남자의 뿌리이니 세상의 뿌리, 생명의 뿌리가 아니겠는가?  거대한 남근의 목공예 작품을 보면서 인간의 희로애락의 뿌리는 여기서 근원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희로애락의 뿌리는 이것인 것을 깨달으면서도 우리는 부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도 이미 이러한 진리를 다 알고 계실 것이기 때문에 나를 탓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 내외의 발원을 들어 주시리라는 절절한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경은사로 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진정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발원할 수 있었다.

박달재 서원휴게소에 서있는 거대한 남근목
(2005.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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