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영이는 우선 키가 크다. 학군단 교육 때 늘 '우측 선두 기준'을 외쳐야 했던 나랑 나란히 서면 아주 잘 어울리는 늘씬한 키에 또 얼굴이 유난히 희다. 하얗고 갸름한 얼굴에는 비너스의 코처럼 오똑한 콧날이 그의 자존심을 대변하였다. 검고 숱 많은 머리를 어깨에 닿을 듯 말 뜻 늘어뜨리고 늘 학처럼 성큼성큼 걸어 내게로 오곤 했다. 말없고 조용한 현영이는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고, 말없이 창을 내다보기도 하고, 무언가 열심히 끄적이기도 하였다.
내가 이십대를 막 넘어 초등학교 교사에서 전직하여 처음 담임한 여고 2학년은 모두 말괄량이들이었다. 경력은 있어도 고등학교에 처음이고, 더구나 여고에는 더욱 서툴다는 비밀이 탄로나 버려 학급은 온통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그들은 제 맘대로 날 놀리고, 제 맘대로 좋아하고, 제 맘대로 흉보고, 미워하고 했다. 어떤 날은 수업 시작 경례를 하자마자 그냥 웃어대서 날 골탕 먹이기도 하고, 어떤 날은 한 밤중에 전화를 해서 아무개가 자살한다고 남한강으로 갔으니 찾으러 가자고 해서 동이 훤하게 틀 때까지 장대로 강을 휘휘 저으며 강가를 함께 거닐기도 하면서, 나의 여고 교사의 시작은 그렇게 서툴게 시작되었다. 그 때도 늘 조용한 현영이었다.
그런데, 학교 뒷산에 진달래가 불붙은 4월 어느날 갑자기 체육 시간에 현영이가 쓰러졌다는 것이다. 마침 수업이 없어서 운동장으로 뛰어 내려갔다. 가파른 일흔 여덟 계단이 더욱 멀게 느껴졌다. 포플러 그늘 아래 아이들이 둘러섰고 그 아래 현형이는 창백하게 누워 있었다. 큰 키, 기다란 다리,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가 안쓰럽게 생각되었다. 나는 달려들어 팔다리를 주물렀다. 나의 무의식적인 행동에 아이들이 비명을 터뜨렸다. 할 수 없이 나는 현영이를 번쩍 안았다. 양호실로 가는 길이 그렇게 멀리 느껴졌다. 계단을 오를 때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일이 있은 후 현영이는 사흘에 한 번, 이틀에 한 번, 많으면 하루에 두 번 씩 쓰러졌다. 쓰러질 때면 늘 그렇게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부모를 오시도록 해 진찰을 받도록 권해 봐도 별 이상이 없단다. 나는 자취 생활에서 오는 영양 부족이려니 생각하고 쓰러지면 안아 양호실로 옮기고, 팔다리를 주무르고, 머리도 쓸어주며, 때로 업고 병원으로 뛰기도 하는 일을 계속했다. 귀찮다는 생각은 안했어도 학교 생활이 늘 불안하고, 자연히 현영이에게만 관심을 갖게 되었나 보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불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우리반 담임 선생님이예요. 현영이 담임이예요?'하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선생님, 그냥 무관심해 보세요'하고 충고하는 아이도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서늘하게 느껴지는 초가을, 저녁 식사를 마치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는데 밖에서 누가 부른다.
" 선생님, 현영이가 이상해요. 쓰러졌는데 숨소리가 크고 정신이 없어요 "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 좀 주물러 줘라. 이상하면 주인집 아저씨에게 말씀드리고---."
" 아녜요 선생님. 이상한 약병도 있어요. 그전하고 달라요. "
나는 벌떡 일어났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친다. 순아와 함께 자취집으로 뛰어갔다. 어두컴컴한 방안에 현영이 혼자 숨을 몰아쉬고 있다. 손을 만져 보았다. 싸늘하다. 가슴에 귀를 대 보았다. '쿵쿵' 심장이 뛴다. 집주인을 부르고 순아를 다그쳐 택시를 잡아오게 하고 나는 현영이를 업었다. 택시가 들어올 수 있는 골목까지는 300m는 족히 되리라. 읍내에 하나밖에 없는 병원으로 황급히 갔다. 간호원이 호들갑을 떨며 링거를 꽂고 혈압을 잰다. 가슴을 올리고 청진기를 대던 의사가 고개를 젖는다.
" 아무래도 심상치 않으니 집에 연락을 하세요. 선생님이 나중에 곤란한 처지가 되겠어요. 그리고 제천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셔야겠어요 "
나는 황급히 숙직 선생님에게 부탁해서 행정 전화라도 동원해서 그의 집에 연락을 하도록 부탁을 해놓고 큰 병원으로 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나는 집에서 입는 츄리닝 바람이고 돈도 한 푼도 없다. 간호원이 나가서 택시를 잡아 왔다. 의사는 이 만원을 내어 주며
" 서둘러 가세요. 가시면서 어느 병원에 다녔나를 자꾸 물어보시면 대답할 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저 감사해 하며 차에 올라앉았다. 순아는 다리 쪽을 안게 하고 나는 머리 쪽을 안고 출발했다.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진다. 그 때만 해도 비포장 도로라 차는 터덜거리고 더뎠다. 밖은 칠흑같이 어두워 어디만큼이나 왔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불빛이 환한 걸로 봐서 중간 지점인 매포읍인 듯 싶을 때 현영이는 숨을 크게 한 번 내 쉬더니 팔을 쭉 뻗어 운전 기사의 어깨쭉지와 내 옷자락을 쥐더니 용을 쓴다. 나는 속으로 ' 아, 이제는 일을 당하는구나. 사람이 이렇게 죽어 가는 것이구나' 하면서도
" 이 녀석 아저씨 옷을 당기면 어떻게 운전을 하냐? 자다말고 기지개는 소담하게도 하네"
하면서 기사와 순아를 안심시켰다. 숨소리가 잦아든다. 점점 더 불길한 생각이 든다. 가끔씩 볼을 그의 코에 대 보았다. 바람은 여전히 나오고 있다. 차창으로 보이는 거리에 가로등 불빛이 환하게 되었을 무렵 의사의 말씀이 생각나서 자꾸 물어 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알아들었는지
"서, 울, 병, 원 --- "
하고 대답한다. 나는 기사에게 서울 병원으로 가게 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응급실에서 사람들이 뛰어나와 현영이를 응급실로 옮겼다. 나는 사무실에서 인적 사항을 말하고 현영의 진료 카드를 찾도록 하고 응급실에 가 보았다. 현영이는 침대에 일어나 앉아 있었다. 반갑기도 했지만 속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현영이를 일어나게 한 듯한 의사 한 분이
" 선생님이시라면서요 ? 저하고 얘기 좀 하실까요 "
하고 옆방으로 안내하였다. 나는 그 동안의 증세와 일어났던 일을 자세히, 그리고 나의 고충을 드러나도록 얘기했다. 그랬더니
" 이 아이의 병은 저와 선생님이 힘을 합쳐야 고칠 수 있어요. 아니 선생님 혼자서도 고칠 수 있을 겁니다. "
하고는 내가 취해야 할 태도와 그밖에 여러 가지를 말해 주었다. 그 뒤 나는 그에 대해서 철저하게 냉정해졌다. 쓰러져도 거의 무관심한 듯이 대수롭잖게 대했다. 아이들이 오히려 불평할 정도로 냉정하게 대하면서 그를 관찰했다. 그는 점점 쓰러지는 횟수가 줄었다. 3학년에 진급할 때 쯤은 거의 없어졌다.
그 후 지금까지 나는 거의 여고생만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때로 속기도 하고 속아주기도 하면서 그런 대로 재미있고 보람있는 날을 보냈다. 그러나 첫 해처럼 그렇게 바보같이 속지는 않는다. 그리고 쓸데없이 아이들에게 병을 만들어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시절을 후회하거나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때가 그리운 것은 어쩐 일인가 ? 현영이도 지금은 그 때의 내 나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끔씩 그 때를 생각하며 웃음 지을 지도 모른다.
내가 이십대를 막 넘어 초등학교 교사에서 전직하여 처음 담임한 여고 2학년은 모두 말괄량이들이었다. 경력은 있어도 고등학교에 처음이고, 더구나 여고에는 더욱 서툴다는 비밀이 탄로나 버려 학급은 온통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그들은 제 맘대로 날 놀리고, 제 맘대로 좋아하고, 제 맘대로 흉보고, 미워하고 했다. 어떤 날은 수업 시작 경례를 하자마자 그냥 웃어대서 날 골탕 먹이기도 하고, 어떤 날은 한 밤중에 전화를 해서 아무개가 자살한다고 남한강으로 갔으니 찾으러 가자고 해서 동이 훤하게 틀 때까지 장대로 강을 휘휘 저으며 강가를 함께 거닐기도 하면서, 나의 여고 교사의 시작은 그렇게 서툴게 시작되었다. 그 때도 늘 조용한 현영이었다.
그런데, 학교 뒷산에 진달래가 불붙은 4월 어느날 갑자기 체육 시간에 현영이가 쓰러졌다는 것이다. 마침 수업이 없어서 운동장으로 뛰어 내려갔다. 가파른 일흔 여덟 계단이 더욱 멀게 느껴졌다. 포플러 그늘 아래 아이들이 둘러섰고 그 아래 현형이는 창백하게 누워 있었다. 큰 키, 기다란 다리,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가 안쓰럽게 생각되었다. 나는 달려들어 팔다리를 주물렀다. 나의 무의식적인 행동에 아이들이 비명을 터뜨렸다. 할 수 없이 나는 현영이를 번쩍 안았다. 양호실로 가는 길이 그렇게 멀리 느껴졌다. 계단을 오를 때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일이 있은 후 현영이는 사흘에 한 번, 이틀에 한 번, 많으면 하루에 두 번 씩 쓰러졌다. 쓰러질 때면 늘 그렇게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부모를 오시도록 해 진찰을 받도록 권해 봐도 별 이상이 없단다. 나는 자취 생활에서 오는 영양 부족이려니 생각하고 쓰러지면 안아 양호실로 옮기고, 팔다리를 주무르고, 머리도 쓸어주며, 때로 업고 병원으로 뛰기도 하는 일을 계속했다. 귀찮다는 생각은 안했어도 학교 생활이 늘 불안하고, 자연히 현영이에게만 관심을 갖게 되었나 보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불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우리반 담임 선생님이예요. 현영이 담임이예요?'하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선생님, 그냥 무관심해 보세요'하고 충고하는 아이도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서늘하게 느껴지는 초가을, 저녁 식사를 마치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는데 밖에서 누가 부른다.
" 선생님, 현영이가 이상해요. 쓰러졌는데 숨소리가 크고 정신이 없어요 "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 좀 주물러 줘라. 이상하면 주인집 아저씨에게 말씀드리고---."
" 아녜요 선생님. 이상한 약병도 있어요. 그전하고 달라요. "
나는 벌떡 일어났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친다. 순아와 함께 자취집으로 뛰어갔다. 어두컴컴한 방안에 현영이 혼자 숨을 몰아쉬고 있다. 손을 만져 보았다. 싸늘하다. 가슴에 귀를 대 보았다. '쿵쿵' 심장이 뛴다. 집주인을 부르고 순아를 다그쳐 택시를 잡아오게 하고 나는 현영이를 업었다. 택시가 들어올 수 있는 골목까지는 300m는 족히 되리라. 읍내에 하나밖에 없는 병원으로 황급히 갔다. 간호원이 호들갑을 떨며 링거를 꽂고 혈압을 잰다. 가슴을 올리고 청진기를 대던 의사가 고개를 젖는다.
" 아무래도 심상치 않으니 집에 연락을 하세요. 선생님이 나중에 곤란한 처지가 되겠어요. 그리고 제천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셔야겠어요 "
나는 황급히 숙직 선생님에게 부탁해서 행정 전화라도 동원해서 그의 집에 연락을 하도록 부탁을 해놓고 큰 병원으로 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나는 집에서 입는 츄리닝 바람이고 돈도 한 푼도 없다. 간호원이 나가서 택시를 잡아 왔다. 의사는 이 만원을 내어 주며
" 서둘러 가세요. 가시면서 어느 병원에 다녔나를 자꾸 물어보시면 대답할 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저 감사해 하며 차에 올라앉았다. 순아는 다리 쪽을 안게 하고 나는 머리 쪽을 안고 출발했다.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진다. 그 때만 해도 비포장 도로라 차는 터덜거리고 더뎠다. 밖은 칠흑같이 어두워 어디만큼이나 왔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불빛이 환한 걸로 봐서 중간 지점인 매포읍인 듯 싶을 때 현영이는 숨을 크게 한 번 내 쉬더니 팔을 쭉 뻗어 운전 기사의 어깨쭉지와 내 옷자락을 쥐더니 용을 쓴다. 나는 속으로 ' 아, 이제는 일을 당하는구나. 사람이 이렇게 죽어 가는 것이구나' 하면서도
" 이 녀석 아저씨 옷을 당기면 어떻게 운전을 하냐? 자다말고 기지개는 소담하게도 하네"
하면서 기사와 순아를 안심시켰다. 숨소리가 잦아든다. 점점 더 불길한 생각이 든다. 가끔씩 볼을 그의 코에 대 보았다. 바람은 여전히 나오고 있다. 차창으로 보이는 거리에 가로등 불빛이 환하게 되었을 무렵 의사의 말씀이 생각나서 자꾸 물어 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알아들었는지
"서, 울, 병, 원 --- "
하고 대답한다. 나는 기사에게 서울 병원으로 가게 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응급실에서 사람들이 뛰어나와 현영이를 응급실로 옮겼다. 나는 사무실에서 인적 사항을 말하고 현영의 진료 카드를 찾도록 하고 응급실에 가 보았다. 현영이는 침대에 일어나 앉아 있었다. 반갑기도 했지만 속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현영이를 일어나게 한 듯한 의사 한 분이
" 선생님이시라면서요 ? 저하고 얘기 좀 하실까요 "
하고 옆방으로 안내하였다. 나는 그 동안의 증세와 일어났던 일을 자세히, 그리고 나의 고충을 드러나도록 얘기했다. 그랬더니
" 이 아이의 병은 저와 선생님이 힘을 합쳐야 고칠 수 있어요. 아니 선생님 혼자서도 고칠 수 있을 겁니다. "
하고는 내가 취해야 할 태도와 그밖에 여러 가지를 말해 주었다. 그 뒤 나는 그에 대해서 철저하게 냉정해졌다. 쓰러져도 거의 무관심한 듯이 대수롭잖게 대했다. 아이들이 오히려 불평할 정도로 냉정하게 대하면서 그를 관찰했다. 그는 점점 쓰러지는 횟수가 줄었다. 3학년에 진급할 때 쯤은 거의 없어졌다.
그 후 지금까지 나는 거의 여고생만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때로 속기도 하고 속아주기도 하면서 그런 대로 재미있고 보람있는 날을 보냈다. 그러나 첫 해처럼 그렇게 바보같이 속지는 않는다. 그리고 쓸데없이 아이들에게 병을 만들어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시절을 후회하거나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때가 그리운 것은 어쩐 일인가 ? 현영이도 지금은 그 때의 내 나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끔씩 그 때를 생각하며 웃음 지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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