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압지 소나무
안압지에 가보았다. 바람이 스산하게 분다. 안압지는 원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세운 임해전이라는 궁이라고 한다. 귀빈을 맞거나 경사가 있을 때 연회를 위한 전각과 정원으로 생각되었다. 얼핏 보아도 작고 아담한 정원이지만 갖출 것을 다 갖추었다. 동으로 대숲이 우거졌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잘 가꾼 연못이 있다. 물에 비쳐 더욱 아름다운 전각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누각은 몇이 더 있었는지 잔디에 주추가 뚜렷하게 남았다. 옛날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졌다고 하나 지금 소나무는 다만 몇 주만 초라하게 남아 겨울바람에 으스스 떨고 있다.
통일을 이룬 신라의 귀족들은 아마도 이곳에서 연일 연회를 베풀었을 것이다. 호화로운 옷을 입고 향기로운 술을 따라 기울이며 미희들이 추는 춤의 흔들거리는 반영이 물에 비치기도 했을 것이다. 달빛이라도 환하게 내려앉으면 술에 취해도 취한 줄을 몰랐을 것이다. 통일의 대업을 이루어낸 귀족들의 흥청거리는 풍악 소리를 이 도시의 백만 시민들은 다 용서했을 것이다.
그러나 몇 세대가 지나는 동안 흥청거림은 곧 나락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래서 이 도시는 황량해지고 여기는 기러기만 흩날리어 안압지(雁鴨池)가 되었다고 하던가? 지금은 기러기조차 날아들지 않고, 연꽃 한 송이 피지 못하고, 대숲에 바람소리만 칼 가는 소리를 낸다. 기울어지는 소나무는 마치 역사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말해 주는 듯하다.
기러기라도 한 쌍
날아와 앉아 보려무나.
안압지 소나무
물에 비친 금관이, 도포 자락이, 패옥 소리가
물에 비친 달빛이
잔에 스민 미희의 향기가
흔들거리는 그림자가
지금은
그리운가?
바람 맞으며 반시간에 반 천년 영화를 그려 보았다. 경주 박물관 안압지관에는 여기서 건져낸 영고성쇠(榮枯盛衰)를 남의 일처럼 걸어 놓았다. 나도 남의 일처럼 돌아보았다. 소나무는 저렇게 기울어져 땅을 짚고 통곡하는데 말이다.
(2007.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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