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학교 뒤 쪽으로 새로 난 4차선 도로를 따라 국제 테니스장을 지나 주성고등학교 쪽으로 가다보면 산성초등학교가 나오는데, 산성초등학교 남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골짜기에 아담한 마을이 나온다.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에도 편입되지 않은 마을은 동글동글한 야산 아래 전설을 간직한 채 아담하고 평화로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김수녕 양궁장 입구에서 명암지로 통하는 4차선 도로(이 길이 바로 옛날 보살사 스님들이 넘었다는 중고개임)에서 우회전하면 큰길이 문득 끊어지고 소로가 나타나는데, 이 길이 호무골 진입로이다.
호무골 마을 전경
호무골은 입구에서 바라보니 한 40호 정도 되는 것 같은데, 모두 옛 시골의 기와집이나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구옥이다. 울타리가 무너졌거나 아예 없는 집도 있고, 대나무로 파랗게 산울타리를 조성한 집들도 보였다. 소를 기르는 우사, 개나 토끼를 사육하는 축사 같은 것들이 즐비하다. 무너진 집 사이의 공터는 주로 마늘밭이다. 마을을 야산이 성처럼 빙 둘러 싸고 있는데, 대개 과수원이었던 흔적이 보인다. 고샅은 정리되지 않았으나 너저분하지는 않았다. 고샅길은 깨어진 보도블록이 깔려 있다. 좁은 골목마다 허름한 집 앞에는 고급 승용차가 세워져 있는 것으로 봐서, 크게 농사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거나, 가축을 길러야 살 수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옛날 이 앞의 논밭들이 모두 금싸라기 땅이 되었을 것이니 말이다. 사금이 나왔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이곳에서 정말로 금을 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입구에는 조그만 우물이 있다. 우물이 뚜껑으로 덮이어 있고, 우물가에 향나무는 옛 고향 집 우물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보기 좋게 허리를 꼬며 서 있다. 아마도 전설대로 호랑이가 마시고 춤을 추었던 그 우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마을의 공동 우물
한 40여 호쯤으로 보이는 마을 사람들은 주로 농사를 짓는 것 같다. 소를 먹이는 집도 있고 개를 여러 마리 키우는 집도 있었다. 골목에서 지게를 지고 오는 최씨라는 노인 한 분을 만났다. 인사를 드리고 호무골과 애기 바위, 구중고개에 대해 물었다. 호무골 얘기는 잘 알고 있었다. 전부터 어렴풋이 들어온 호무골 전설, 중고개 전설, 구중고개 전설, 애기바위 전설, 쇠내 개울 전설을 들었다. 호무골은 학교 뒤 자주 가는 식당 이름이 호미골이라 관심이 많이 갖게 되었고, 쇠내 개울은 우리학교 아이들에게 ‘사금이 났던 이 쇠내 개울에서 진리의 금을 캐자.’고 얘기했던 터라 더 관심이 갔다.
호무골 전설은 여러 가지가 있다. 호랑이가 춤을 추웠다 하여 호무골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북쪽에 아름다운 호수(湖水)가 있다고 해서 호미골(湖美谷)이라고 불린다는 전설도 있고, 마을 지세가 호미를 옆으로 놓은 모양을 하고 있어 호미골이라는 이름이 붙어 온다는 설도 있으며, 마을에 과부가 많기에 호미골(홀어미)이라는 동리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최씨 노인은 호랑이가 춤을 추웠다는 호무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흩어지고 정리되지 않았으며, 녹음기를 가져가지 않아 채록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헌에 있는 것을 옮겨 놓는다.
조선 말엽(1892)년 낙엽송과 참나무로 울창하게 둘러싸인 산협길을 헤치고 노송 밑에 우뚝 선 술자(術者)는 비산비야(非山非野)에 앞길이 막히고 남쪽으로 햇빛을 받고 있는 지세(地勢)에서 장차 번창할 수 있을 가능성을 발견하고 집을 세우기로 했다. 잡목(雜木)을 베고 터를 닦는 등 집터를 마련하던 술자는 문득 물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야 발견하고 공사를 중도에서 중지하고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뒤 李明道라는 사람이 와서 이 곳을 지나다가 다시 지형의 오묘(奧妙)함을 발견하고 이 곳에 정착할 것을 결심했다. 그는 전에 술자가 닦다만 집터를 다시 손질하는 반면에 물을 얻기 위해서 근처 얕은 곳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파보아도 계곡은 깊었으나 석벽(石壁)을 이루고 있는 땅속에서 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지세가 좋다고 해도 물이 없는 곳에서 살아갈 수는 없었기에 이명도도 마침내 정착할 뜻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휘황하게 달빛이 쏟아지는 밤에 이명도는 평탄하게 닦아놓은 집터 자리에서 하룻밤을 드새고 다음날 딴 곳으로 떠날 차비를 차리고 있었다. 울창한 숲 속에서 이름 모를 벌레 소리와 멀리 들리는 삼짐승들의 포효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감으려던 이명도는 얼핏 머지않은 계곡 평전(平田)에서 너울거리는 하나의 괴상한 그림자를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가 목격한 현실이 꿈이 아닌가 생각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목격물을 확인하기 위하여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멎은 곳에 한 마리의 호랑이가 너울너울 춤을 추면서 우거진 숲 속에서 머리를 넣었다 뺐다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호랑이는 숲 속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뺄 때에는 앞발을 들고 흔들면서 춤을 추는 것이다.
이명도는 몸에 전율을 느끼면서도 그 호랑이가 왜 숲 속에 머리를 넣었다 뺐다 하는지를 살폈으나 도저히 알아 볼 수가 없었고 다만 얼룩무늬 등과 하얀 배를 달빛에 번득이며 춤을 추고 있는 모습만이 믿어지지 않을 뿐이었다. 그것은 정말 신비하고도 괴이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몇 번인가 같은 동작을 되풀이 하고난 호랑이는 근처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뛰어올라가 달을 향해서 산과 들이 울리도록 힘찬 포효를 하고 나자 동쪽을 향해서 바람을 남기고 사라졌다.
자초지종을 자세히 보고난 이명도는 날이 밝아오자 호랑이가 춤을 추며 머리를 넣었던 숲 속을 가보고 환성을 올리며 기뻐했다. 그곳에는 맑고 맑은 물이 바위틈에서 흘러나와 잔돌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 물은 차갑고 단맛이 혀에 감쳤다. 호랑이는 밤마다 그것을 마시고 춤을 추며 좋아했던 것이다.
(전설지, 충청북도 문화공보담당관실, 고려서적주식회사, 1982.)
지금부터 30년 전만 해도 말로만 청주시내이지 오지였던 것을 나도 기억한다. 그리고 한 10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호미골은 것대산 줄기 끄트머리에 붙은 자근 마을이었다. 그러니 그 시대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것이 전혀 없는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마을 한 가운데 보이는 우물이 새삼 반가웠다. 그러나 물을 마시지는 않았다. 지금은 땅에 묻혀 있지만 청주 쓰레기 매립장이 바로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제 호랑이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춤도 추지 않을 것이다. 물맛이 이미 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도 고향의 물을 버리고 대청호에서 흘러오는 상수도를 먹을 것이다.
호랑이도 나타나지 않고 물도 이미 제 맛을 잃은 호무골은 햇살은 따사로워도 고층 건물 숲에 묻혀 있어 스산하기 짝이 없다. 이제 이 마을도 전설만 남기고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자꾸 뒤를 돌아보며 발길을 돌렸다.
(2005. 3. 20)
'여행과 답사 > 우리문화 답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성포 굴비 정식 (0) | 2007.09.30 |
---|---|
정선의 가을 4 -곤드레밥- (0) | 2007.09.30 |
정선의 가을 3 -메밀꽃 필 무렵- (0) | 2007.09.26 |
정선의 가을 2 -아우라지엔 비가 내리고- (0) | 2007.09.26 |
정선의 가을 1 -장은 입장이 최고래요- (0) | 2007.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