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청주와 청주 사람들

園白 李殷杓 선생과 종묘, 사직대제

느림보 이방주 2025. 6. 29. 20:33

園白 李殷杓 선생과 종묘 사직대제

 

 

종묘사직이 바람 앞에 등불 같다는 말이 있다. 남의 나라를 점령하면 먼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폐한다. 사직은 토지와 오곡의 신을 말한다. 종묘는 나라를 지탱해온 역대 제왕의 신주를 모신 가장 높은 사당이니 조상신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과거를 불태우고 미래를 땅에 묻어버리는 것이다. 종묘와 사직을 복원하는 것은 나라의 수치 딛고 미래를 복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1910년 일제에게 국권을 찬탈 당했다. 일제는 사직단을 땅에 묻어버리고 공원으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전국 작은 고을에 있던 사직도 허물고 땅에 묻었다. 사직을 땅에 묻어버린 일제는 종묘를 불태우려 했다. 그러나 백성들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종묘를 차마 불태우지 못했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시행되던 사직 대제와 종묘제례를 지속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국가 행사였던 종묘 제례는 이왕가의 행사로 향만 피워 명맥만 유지하도록 허락했다. 국권 회복 이후에도 미처 종묘와 사직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나의 아버지 園白 李殷杓 선생은 1914년 청주시 서원구 죽림동에서 태어나셨다. 어린 시절 한문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셨으나 신교육은 받지 못하셨다. 당시 아버지 연배되시는 집안 어른들이 모두 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아버지는 종손으로서 집안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일제에 의해 시행되는 신교육을 받지 않으셨다.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시고 독학으로 사서삼경을 비롯한 경전을 독파하셨기에 훗날 종묘제례의 모든 의례를 복원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신 것이다. 그래서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종묘제례를 완벽하게 복원하시고 사직대제까지 고증을 통하여 복원하시어 문화행사로 재현함으로써 세계 문화계를 놀라게 했다.

종묘대제는 조선시대에는 연 4회 봉행되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종묘대제도 사직대제도 지내지 못했다. 광복 이후에는 종묘제례를 부활하기는 했으나 겨우 명맥만을 유지했다. 사직대제는 땅에 묻힌 채로 복원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1992년에 아버지께서 완전 고증을 거쳐 《宗廟祭禮》라는 책을 내셨다. 그래서 종묘제례악만 무형문화재였는데 종묘제례까지 국가가 정한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게 되었다. 고증을 거쳐 학문적으로 완벽하게 저술한 《宗廟祭禮》는 종묘제례가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이 되는 기틀을 마련하셨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즈음하여 문화행사로 종묘대제 추계대제를 봉향하여 세계인의 이목을 끌어 유네스코 지정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 받았다. 그 후 2000년대에 들어 5월 첫째 일요일에 지내는 대제는 문화재청에서 봉행하고, 추향대제를 신설해서 11월 첫째 토요일에 종묘대제봉향위원회에서 주관하여 봉행한다. 원백 선생의 소망이 완벽하게 실현된 것이다.

나는 2016년 종묘추향대제에 헌관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세 번째로 헌관에 나가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2004년 정전 16실 헌종성황제 초헌관으로, 다음은 현직에서 퇴직 이후에 영녕전 5실 정종대왕 초헌관으로, 2016년에 다시 16실 초헌관으로 봉행에 참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마음이 많이 들뜨고 긴장했으나 이번에는 오원군 종중 부이사장이 되어 일종의 책임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 정전 16실 헌종성황제, 효현성황후 김씨, 효정성황후 홍씨의 신주를 모셨고, 헌종은 1827년(순조 27년) 7월 18일 출생하여 1849년(헌종 15) 6월 6일에 사망, 본명은 이환(李奐)

 

종묘
사적 제125호. 종묘는 원래 정전(正殿)을 말하며,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역대 왕과 왕후는 사후에 그 신주를 일단 종묘에 봉안하였다. 공덕이 높아 세실(世室 : 종묘의 神室)로 모시기로 정한 제왕 이외의 신주는 일정한 때가 지나면 조묘(祧廟)인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셨다. 이것을 조천(祧遷)이라고 한다. 종묘 즉 정전에는 현재 19실(室)에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의 신주를 모셔놓고 있다. 정전 서쪽에 있는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 그리고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의 신주를 16실에 모셔 놓고 있다.
유교 사회에서는 왕이 나라를 세우고 궁실(宮室)을 영위하기 위해 반드시 종묘와 사직(社稷)을 세워 조상의 은덕에 보답하며 경천애지사상(敬天愛地思想)을 만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천지신명에게 백성들의 생업인 농사가 잘되게 해 달라고 제사를 올렸던 것이다. 따라서 왕이 도읍을 정하면 궁전 왼편에 종묘를 세우고 오른편에 사직을 세우게 하였다.

 

종묘제례
1975년 5월 3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다. 2001년 5월 18일 종묘제례악과 함께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종묘 제향은 정시제(定時祭)와 임시제(臨時祭)가 있었는데 대제(大祭)로 봉행하였다. 정시제는 춘하추동 사계절과 납일(臘日: 동지 뒤의 셋째 未日)에 지내다가 1909년에 납일 제향을 폐지하고 사계절의 첫 달, 즉 춘 정월, 하 4월, 추 7월, 동 10월의 상순에 지냈다. 영녕전에서는 정시제를 춘 정월, 추 7월의 상순 2회만 지냈다. 그밖에 나라에 흉사나 길사가 있을 때마다 임시제인 고유제(告由祭)를 올렸다. 또 계절 따라 햇과일과 햇곡식이 나오면 약식 고유를 하였는데, 이것을 천신제(薦新祭)라고 하였다. 
일제하에서는 이왕직(李王職) 주관으로 겨우 향화(香火)만 올려 왔고, 광복 후에는 혼란과 전쟁 등으로 오랫동안 향화조차 봉행하지 않고 있다가, 1969년부터 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주관하여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복식(服飾)과 제찬(祭饌)을 제대로 갖추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1975년 종약원은 종묘대제봉향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정부에서도 지원하여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행사내용
조선 시대의 종묘대제에는 왕이 세자와 문무백관·종친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와 친히 제향을 올렸는데 이것을 친행(親行)이라 하고, 왕이 유고로 친행하지 못할 때는 세자나 영의정이 대행하였는데 이를 섭행(攝行)이라 한다. 현재 정전과 영녕전의 제관은 각 능봉향위원회가 주축이 되고, 각 시·도 지원으로 인품과 제례 경험이 많은 종친을 추천받아 제관으로 위촉하고 있다. 제관은 친행시와 섭행시 그 품계가 달랐다. 각 신실별 제관은 초헌관·아헌관·종헌관·대축관·묘사(廟司, 우전관)·내봉관·외봉관·집준관(執罇官) 등 8명으로 편성되고, 그밖에 각 전별로 집례·감제관(監祭官)·천조관(薦俎官)·봉조관(捧俎官)·당상·당하·찬의(贊儀)로 구성되어 정전 163명, 영녕전 137명, 공신당 2명 도합 302명으로 편성된다.

 

원백 이은표 선생 별세 신문 기사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인 ‘종묘제례’ 예능 보유자 이은표(李殷杓 사진) 옹이 향년 90세를 일기로 2003년 11월 29일 오전 2시35분께 충북대병원에서 심근경색으로 별세했다.
1914년 충북 청주시에서 태어난 이 옹은 1977년 ‘종묘제례(宗廟祭禮)’에 대한 연구와 전승을 담당해온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연구위원회 간사를 지냈고 1988년 4월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 종묘제례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또 이 옹은 이후에도 궁중의례 복원 및 전승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왔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한편 종묘제례 및 제례악은 UNESCO 세계인류무형유산으로 선정된 바 있다.

 

2016년 11월 첫 토요일 오전 7시 30분 시외버스로 올라갔다. 종묘에 도착한 것은 10시가 좀 넘어서이다. 제복으로 갈아입고 제향을 준비하는 전사청으로 가니 아직 환복할 시간이 아니라 한다. 10시에 이미 제향이 시작된 영녕전으로 갔다. 정녕전 제향에는 참반원이 많이 없었다. 절차는 정전과 같으니까 종묘제례를 귀히 여기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우리는 외국에 나가서 외국 문화를 수십 달러씩 주면서 외국의 문화행사 선택 관광을 하는데 정작 우리 문화인 종묘제례 같은 어마어마한 행사는 돌아보지 않는다. 영국의 버킹검궁의 퍼레이드도 훌륭하지만, 이만큼 장엄하고 음악과 제례가 함께 실제로 거행되는 행사는 보지 못했다. 들어가기도 쉽다. 종묘 입장료만 내면 된다. 아니면 정문 앞 종묘제례 안내소에서 참반원 표찰만 얻어서 패용하면 된다.

영녕전 제향을 참여했다가 전사청으로 가 보았다. 오후 2시에 봉행되는 정전 제관들에게 도시락을 배부하고 있었다. 정전 제관은 모두 163명이다. 초헌관만 19명이다. 나는 줄을 서서 도시락을 받았다. 전사청 마당에서 제관들 사이에 섞여 천천히 도시락을 먹었다. 제관은 대개가 일가들이다. 그러나 왕의 외척 자손들이 제관으로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도 실제로 제향을 봉향한다면 정부의 장관을 비롯한 벼슬아치들이 나와야 한다. 총리가 초헌관을 하고 장차관이 헌관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금관조복으로 갈아입는데 하도 복잡해서 전례연구위원들이 도와주었다. 먼저 한복을 입고 도포를 입은 다음 그 위에 제복을 입는다. 검은 제복은 치마, 학대, 패옥, 금관 등 순서와 입는 방법을 잘 몰라 쩔쩔매었다. 두 번이나 해 보았지만 할 때마다 잊어버려서 알 수가 없다.

초헌관은 제복만 입으면 어렵지 않다. 제관 행진은 15실 초헌관 뒤를 밟으면 되고 신관례와 초헌례만 마치면 된다. 나는 아버지를 이어 집례를 맡은 종묘제례 인간문화재인 이기전씨의 홀기를 들으면서 천천히 따라했다. 이기전씨의 홀기는 힘이 없었다. 그 분도 이미 80이 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80이 넘으셔서도 종묘 너른 마당이 쩡쩡 울렸었다.

사실은 봉행 직전에 기전씨에게 인사를 드렸다. 내게는 숙항이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하니 덤덤하게 받았다. "청주의 방주입니다" 하니 "아, 오랜만이라 몰라봐서 미안 해." 했다. 아버지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인간문화재가 된 두 분은 종묘제례 인간문화재가 된 기전씨와 사직대제 인간문화재가 된 건웅씨이다. 사직대제는 완전히 땅에 묻힌 것을 아버지께서 부활하셔서 건웅씨를 기능보유자로 만들어 줬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서울 지역 신문에서 마치 자신이 주가 되어 아버지 도움을 받아 사직대제를 부활한 것처럼 쓴 기사를 읽었을 때 배반당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기전씨는 아버지에 대한 향수, 은혜 같은 것을 자세히 밝히고 있었다. 역시 아버지는 그 분을 잘 믿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제례 봉행을 마치고 다시 내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면서 헌종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8세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풍양조씨 세도에 묶여 왕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실정만을 거듭하다 23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딱한 임금이다. 왕권을 능가한 신권의 횡포가 가장 성했던 때는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시대이다. 이때 안동김씨, 풍양조씨들이 나랏일을 휘둘렀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총명한 지도자가 나와서 막강한 권력으로 또는 총명한 두뇌로 나라를 바로 이끌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정말 왜 헌종 같은 임금 앞에 초헌관으로 잔을 드려야 했을까? 헌종은 여자를 좋아하여 궁녀들과 많은 관계를 가졌지만 왕자를 두지 못했을 뿐 아니라 후손으로는 공주도 없다. 능침은 구리 동구릉의 경릉이다. 후손이 없어 기신제도 거르는 것을 원백 선생께서 경릉봉향회를 조직하셔서 오늘날까지 성대한 능제향을 지낸다. 올 봄에도 다녀왔다. 나는 경릉에서도 몇 번 제관으로 참여했다. 원백 선생께서도 헌종의 정치를 다 아시면서 왜 그런 노력을 하셨을까? 그냥 그 어른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원백 선생께서는 어떤 뜻을 가지셨을까? 원백 선생께서는 '예란 정에서 나온다(禮出於情)'라고 생전에 늘 말씀하셨고 제례의 기본을 거기에 두셨다. 아마도 실정을 거듭하고 외척의 세력에 권력도 다 빼앗기고 실권도 없이 할 수 없이 여색에만 빠져 있다가 후궁까지 두었어도 자손도 없이 가버린 젊은 군주에 대해서 인간적인 연민 같은 것을 느끼셨을 것이다. 또한 앞으로는 이러한 임금이 나오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셨을 것이다.

지금은 나라가 정말 혼란스럽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나 국회의원이나 국민의 진심어린 존경을 받는지 궁금하다. 또 국민 앞에서 바른 삶으로 선도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좋은 집에서 맛있는 밥, 아름다운 옷을 입혀준다고 훌륭한 부모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예전처럼 현직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같은 고위 정치인이 종묘제례를 봉행하면 좋겠다. 가치의 혼란시대에 훌륭한 선대 제왕의 신주 앞에서 정치인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아니면 실패한 선대 임금 앞에 작(爵)을 올리면서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 원백 선생께서는 일생동안 닦은 학문의 힘을 종묘제례와 사직 대제를 부활하는데 쏟으셨다. 가족들에게는 자상한 아버지는 아니셨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는 훌륭한 분이셨다고 생각한다. 돌아가신지 2주기 즉 삼년상을 나는 해에 기전씨를 비롯한 제자들이 추모비를 세운다고 했다. 우리도 형님들과 상의해서 비를 세우기로 했다. 추모비문은 기전씨가 닦았다. 비문은 난고 이응백 박사가 써주시기로 했는데 형님이 초안을 내게 잡아보라고 했다. 초안을 잡았는데 응백 박사가 보시고 그냥 써도 되겠다고 하여 그냥 모셨다. 그런데 집안 어른들이 아들이 아버지 비문을 쓸 수 없다고 하여 대신 재종숙 은호씨가 닦은 것으로 했다. 이것이 참 부당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자신의 비문도 쓰는 경우가 있는데 아들이 아버지 비문을 닦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관례라고 본다. 손자들에게 이러한 설명을 하면서 내가 쓴 글이라 말하기가 참 부끄럽다.

앞에서 아버지께서 종묘제례를 위해 애쓰신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것은 비문에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 비문과 추모비문을 올리는 것으로 청주와 청주사람들에 나의 아버지 원백 이은표 선생을 포함하는 이유를 대신한다.

 

 

추모비문

 

大 韓 民 國

重要無形文化財第五十六號宗廟祭禮技能保有者

師 傅 李 殷 杓

追 慕 碑

 

師傅李殷杓追慕碑文

師傅의 貫은 全州人으로 宗姓이고 諱는 殷杓 號는 園白이니 朝鮮朝 二代 定宗大王의 十男 德泉君 十七代孫으로 西紀一九一四年 甲寅 陰七月六日 忠淸北道 淸州市 竹林洞 一九三番地에서 出生하시어 四男四女의 子女를 두고 多福한 家庭을 이루셨다 西紀 二○○三年 癸未 陰十一月 六日 逝去하시니 享年 九十 上壽하셨다 師傅는 四書와 三經은 勿論이고 古典과 詩文에 能通하시니 當時에 名聲있는 儒學者이셨다 公務員으로 淸州市廳과 兵務廳 等에서 三十餘年間 在職하셨으며 退任後에는 全州李氏大同宗約院 典禮硏究委員으로 宗事에 入門하시어 常任理事인 典禮二部長과 典禮一部長으로 奉職하면서 朝鮮王朝實錄과 國朝五禮儀 및 大韓禮典 等 古典을 讀破하시고 朝鮮朝 五一九年의 燦爛했던 歷史의 端面인 宗廟祭禮硏究에 心血을 傾注하시었다 初代 人間文化財 李在範을 繼承하여 西紀 一九八八年 四月一日字로 大韓民國 重要無形文化財第五六號宗廟祭禮技能保有者로 指定되시어 日帝에 依해 毁損되고 歪曲되었던 宗廟祭禮儀式의 原形 保全에 邁進하셨으며 動物園으로 格下하였던 昌慶宮을 本來王宮의 面貌로 復元하여 主上殿下 移宮하는 儀禮인 班次行列을 光復後 最初로 再現하였으며 大韓帝國의 皇太子妃의 薨逝에 王朝의 國葬 節次를 考證해 國葬儀禮로 差跌없이 奉行하고 三年 居喪後 宗廟 永寧殿에 祔廟를 無事히 擧行하셨다 또한 日帝가 民族抹殺政策으로 公園化하여 放置되었던 社稷壇을 復元하여 西紀一九八八年 十月에 서울市에서 처음으로 社稷大祭를 奉行하게 되었고 朝鮮朝 二十四代 憲宗의 陵寢인 景陵의 奉香會를 組織하여 會長으로서 磐石처럼 鞏固히 하셨기에 大同宗約院理事長의 感謝牌와 功勞牌를 받았고 서울市文化賞을 受賞하셨다 師傅의 功勞를 一一히 列擧하지 못함을 哀惜하게 생각하면서 우리後學들에게 傳修敎育을 徹底하게 訓導하셨기에 遺訓에 累가 되지 않으려고 一心同體가 되어 宗廟祭禮 繼承 發展에 一路 邁進하고 있습니다 이에 師傅의 遺訓을 追慕하는 一念으로 門下生 一同과 有志 宗親이 적은 精誠을 모아 追慕碑를 竪立하오니 師傅의 英靈이시여 後學들을 下鑑하시고 永眠하소서

 

西紀 二阡五年 乙酉 十二月 六日

宗廟祭禮保存會 門下生과 有志 宗親 竪立

三代 技能保有者 族人 基田 撰幷書

 

 

비문

 

重要無形文化財第五十六號宗廟祭禮技能保有者

人間文化財全州李公殷杓之墓

配賢夫人密陽朴氏祔左 坤坐

 

人間文化財 李殷杓公 碑文

公의 貫은 全州로 諱는 殷杓요 號는 園白이시고 大韓民國 重要無形文化財第五六號宗廟祭禮技能保有者로 朝鮮國 定宗大王 第十男 德泉君의 十七代孫이시다 高祖는 諱 東濟 配 扶安林梓 女이시고 曾祖는 通政大夫 諱 象揆 配 丹陽禹命喆 女이시고 祖는 諱 建台 配 晉州柳遠瓊 女 繼配 杞溪兪弼煥 女이시고 考는 諱 泳夏 妣驪興閔相允 女이시다 一九十四年 甲寅 陰七月 六日에 淸州市 興德區 竹林洞에서 出生하시어 二阡三年 癸未 陰十一月 六日 逝去하시니 享年 九十이시다 幼年時節부터 聰明好學하시어 漢學에 入門 四書三經을 讀破하시고 國朝五禮儀와 王朝實錄을 修習하시다 一九七七年 社團法人 全州李氏大同宗約院 典禮硏究會 幹事를 맡으시어 朝鮮과 함께 무너진 宗廟祭禮와 社稷祭禮 復元에 뜻을 세우시고 各種儀軌 및 朝鮮朝의 宮中儀禮 硏究에 專念하시여 能力을 認定받아 一九八一年부터 宗約院 第二第一典禮部長 兼 理事로 奉務하시며 王朝儀禮 復元의 꿈을 實現하시다 一九八二年 懿愍皇太子妃殿下 喪葬儀禮를 制定하시고 一九八五年 昌慶宮 復元 御駕行列을 總指揮하시다 一九八八年 政府로부터 重要無形文化財五十六號宗廟祭禮技能保有者로 指定받으시다 同年 서울올림픽 文化行事인 宗廟祭禮樂의 밤을 總指揮하시고 社稷大祭를 復元 奉行한 功勞로 서울시 文化賞을 받으시다 一九八九年 懿愍皇太子妃殿下 薨逝를 당하여 永寧殿 祔廟까지 公의 指揮로 擧行되다 一九九一年 景福宮 復元 開基 告由祭 奉行에 執禮를 하시다 韓國放送公社 生活禮節 諮問委員 成均館顧問 宮中遺物展示館諮問委員 등을 委囑받으시고 典禮와 傳統禮節을 集大成한 宗廟大祭라는 著書를 내시어 宗廟祭禮가 유네스코 指定 世界文化遺産으로 指定되는데 基礎를 다지시다 一九八一年부터 朝鮮朝 二十四代 憲宗成皇帝 陵寢인 景陵의 奉香會를 組織하여 祭享을 奉行하시고 德泉君派宗會 常務理事時節의 崇祖敦宗의 一念으로 實踐하신 功績이 참으로 至大하시다 一九九二年 典禮理事를 固謝하시고 老益壯寧知白首之心 窮且益堅不琢靑雲之心으로 後學에 典禮를 傳하시고 一九九六年 後學에 대한 信賴와 配慮로 홀연下鄕하시다 賢夫人 密陽朴龍喜女와 四男四女를 두었으니 長男은 侅周 號 春城 配 尙州朴俊永 女 東鳳이고 次男은 璊周 號 鄕泉 配 礪山宋永錫 女 榮子이고 三男은 詩人 榮周 號 仁海 配 延安金思政 女 幸基이고 四男은 隨筆家 芳周 號 緩步 配 恩津宋永洙 女 秉淑이고 嗣孫 鎔權이 奉祀한다 長女 貞淑의 夫는 書記官 南陽洪淳國이고 次女 錦淑의 夫는 文化柳永運이고 三女 貞子의 夫는 扶安林在烈이고 四女 昌淑의 夫는 江陵劉在鳳이다 膝下 孫子 十二名 孫女 十一名으로 公의 聰明好學을 본받아 學士 碩士 博士로 社會에 一翼을 擔當 貢獻하다 公의 行績과 功德을 어찌 다 일컬으리오 典禮에 嚴格하시면서도 禮出於情이라는 生活哲學을 根本으로 삼아 法을 넘어선 情의 禮를 實踐하신 先驅者이시며 典禮를 바탕으로 한 韓國文化의 典範을 세우신 公의 德을 逝去 二周忌를 맞아 流芳百世와 萬古常靑을 懇求하는 마음으로 一片刻石에 記錄하여 기리다

 

西紀 二阡五年 乙酉 十一月 初六日 豎立

五原君 十五代孫 再從弟 殷頀 謹識

人間文化財第五六號 門下生 族弟 基田 謹書

 

비문에 담겨 있는 원백 선생의 공적은 첫째, 일제 강점기에 잃어버린 종묘대제와 사직 대제를 문헌의 고증을 거쳐 복원 시행한 일, 둘째 궁중의 모든 의궤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의례를 안벽하게 복원한 일, 셋째, 종묘제례, 사직제례, 궁중 의례 같은 문화유산을 후손에게 전하는 교육을 철저히 한 일, 넷째, 예절의 새로운 철학으로 禮出於情을 주장하시여 시대에 맞는 실천예절을 강조한 일, 다섯째, 다음 세대에게 일을 물려주면서도 연구와 교육을 멈추지 않는 老益壯寧知白首之心 窮且益堅不琢靑雲之心의 정신을 후손 후학들에게 보여 주셨다는 점이다.

 

***老益壯寧知白首之心 窮且益堅不琢靑雲之心

늙을수록 굳건하여 어찌 백수가 될 마음을 알겠으며, 곤궁할지라도 더욱 굳세어 청운의 마음 갈고 닦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도 젊은이 못지않은 기백과 열정을 가지고 있으며,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하더라도 결코 자신의 원대한 꿈과 포부를 포기하지 않고 굳건히 지켜나가겠다는 강인한 의지와 불굴의 정신을 강조하는 내용

 

원백 이은표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자 하는 것은 나의 선친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청주의 의 인물로서 국가의 문화 발전의 공을 기록하고자 하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