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META

개미귀신 삼생기三生記

느림보 이방주 2025. 3. 30. 10:16

개미귀신 삼생기三生記

 

놀라운 일이다. 개미귀신이 명주잠자리가 된다고 한다. 작지만 흉물스럽게 생긴 개미귀신이 껍질을 벗고 성충이 되면 어여쁜 명주잠자리가 된다. 대상은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에 따라 달리 보인다. 명주잠자리는 현재를 보면 어여쁘고 과거를 알면 흉측하다.

무심천 지류인 율량천 산책길을 걷다가 개미귀신 집단서식지를 발견했다. 마른 모래밭에 개미귀신 굴 수십 개가 늘어섰다. 깔때기를 모래땅에 박아놓은 것처럼 지름 5cm쯤 되는 굴이 오밀조밀하다. 어린 시절 하굣길에 신기하게 봤던 기억이 살아난다. 아이들이 개미를 잡아먹는 개미귀신 집이라 해서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개미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개미는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았다. 우리가 보고 싶은 개미귀신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답답해진 우리는 개미 사냥에 나섰다. 붙잡아온 개미를 개미귀신 굴 앞에 놓고 지켜보았다. 개미에게는 좀 미안했지만 설마 잡아갈까 했다. 개미가 눈치를 챘는지 위험지대를 빠져나가려고 허둥댄다. 그러나 개미는 깔때기 모양 모래언덕에서 미끄러져 함정에 빠져버렸다. 그때 정말로 벌레가 모래를 헤치고 기어 나와서 개미를 물고 모래 속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잔인한 개미귀신을 잡아 죽이자고 했다. 모래를 파헤쳤다. 손톱만한 벌레가 모래에 섞여 나왔다. 새까만 개미 껍질도 나왔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들여다보았다. 등에 털이 듬성듬성 나있고 생김새가 흉측했다. 네모난 대가리에 작지만 장수풍뎅이를 닮은 갈고리를 달고 있었다. 그 신기했던 기억이 오늘까지 남아있다.

그때 그 벌레가 정말 ‘개미귀신’인지 알아보았다. 맞다. 그런데 그놈이 명주잠자리의 애벌레라는 사실에 더 놀랐다. 백과사전은 개미귀신의 사진까지 보여주면서 생태를 자세히 설명했다.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명주잠자리는 풀숲에 숨어 있어서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다른 잠자리에 비해 작고 연약해 보였던 기억이다. 날개가 길고 넓으며 화려하다. 몸통은 날개가 품고 있어서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날아다니지 않고 풀줄기에 앉아 있다가 모기를 잡아먹는다고 한다. 딱한 것은 명주잠자리는 나이를 먹으면 입인지 턱인지가 퇴화되어 더 이상 먹이를 먹을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전생의 업보인가. 나이 들어 운명(殞命)의 순간에 먹지 못하는 것은 사람도 다를 바 없다.

명주잠자리는 어디에 알을 낳는지 보지 못했다. 함정을 파놓고 부지런히 사는 개미들이 빠질 때를 기다려 체액만 빨아먹고 내던지는 개미귀신의 삶은 썩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제가 파놓은 함정에서 개미를 기다리면서 어떤 기도를 했을까. 우리가 봤을 때 ‘함정’이지 따지고 보면 그것도 삶의 방편이다. 그물망을 쳐놓고 잠자리가 걸리기를 기다리는 거미나 마찬가지이다. 사람들 중에도 이렇게 야비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그렇게 사는 것도 삶의 원리이고 순환의 질서라고 하늘이 인정한 것이다. 그런 인간이 더 호화롭게 살기도 한다. 껍질을 벗고 성충이 되면 날아오를 수 있는 것도 하늘이 허락한 것이다. 성불은 못했더라도 그것도 해탈이다.

알이 깨어 개미귀신이 되고 그리고 명주잠자리가 되는 것은 나름대로 이들의 삼생三生의 원리이다. 알, 애벌레, 성충이라는 곤충들의 일반적 순환원리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전생(輪廻轉生)을 믿어야 하는데 믿어지지 않았었다. 불법의 바닥이 좁은 불제자는 실체가 보이지 않으면 신뢰하지 못한다. 그런데 어느 날 풀숲에 매달린 매미 껍데기를 보았다. 무심히 넘기던 이 껍데기는 굼벵이가 해탈하여 매미가 된 흔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것이 삼생의 실체이다. 매미는 과연 전생이 알이었고, 굼벵이였던 사실을 기억이나 할까. 명주잠자리는 과연 전생이 야비하게 살아온 개미귀신이라는 것을 기억이나 할까. 내가 전생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생태계의 숨탄것들은 모두 삼생의 삶을 반복한다.

불가에서는 해탈 성불하면 윤회의 탈에서 벗어나 고뇌에서 영원히 탈출하여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나에게 해탈성불은 먼 이야기이다. 명주잠자리나 매미의 삼생을 보면서 내게도 삼생이 있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이를 바탕으로 이생에서 삶도 초년 중년 노년으로 구분하여 작은 삼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초년을 바탕으로 중년을 이루고 중년이 노년을 이룬다면 그 또한 하나의 삼생이 될 것이다. 개미귀신을 보면서 혹 야비하게 살았던 시대를 반성할 수도 있고, 청년시대의 삶을 지양(止揚)하여 변증법적으로 오늘을 이루는 방편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영적 시선으로 보면 모두가 신비스럽다. 개미귀신 삼생은 수필쓰기에서 인식의 과정을 넌지시 일러준다. 나는 어느새 수필쓰기에서 사유의 계단을 한 층 한 층 오르고 있다. 자연의 순환원리는 개체들이 생존하는 원리가 교집합을 이루어 단순해진다. 하나의 보편적 원리로 개념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개념화된 세계는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보인다. 매미 껍질에서 해탈을 발견하는 것처럼 가끔씩 자연에서 신비로운 것이 보일 때가 있다. 나도 놀랄 일이다. 이런 때는 내가 미친 것이 아니면 나에게 신이 내린 것이다. 나는 이것을 영적인 시선이라고 말하고 싶다. 영안(靈眼)으로 보면 세상은 신성하고 신비롭다. 이른바 견색(見賾)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과정을 받아 적으면 수필이 된다.

눈을 크게 뜨고 자연을 보면 육안에서 심안으로 심안에서 영안으로 시선의 삼생기를 경험한다. 영안으로 바라볼수록 세계에서 단순한 법칙이 보인다. 그것은 삶의 철학을 가르친다. 자연과 인간을 이해하고 나와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문인의 시선이라는 생각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수필가의 세계 인식은 흉측한 개미귀신에게서 예쁜 명주잠자리를 보듯이 이렇게 시작된다.

(2025. 3.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