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혼인한 아들 며느리와 초임지를 방문했다. 70년대 초 나의 초임지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그런 오지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그런 오지에도 37년 역사를 가진 학교가 있고, 선배 교사들이 아이들을 가르쳐왔다는 사실에 놀랐다. 처음에는 억울하고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학교와 마을은 바로 나를 인정에 빠지게 했다. 오후 시간을 헌납해서 아이들 한글과 가감승제를 가르쳤다. 노인들을 모아 춘향전을 읽어 주고 정초에는 토정비결을 봐 주었다. 젊은 아낙들과 금반지계를 하고, 청년들과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을 모아 야학을 열었다. 그동안 이 마을은 뼈와 살을 키워준 교직의 고향이 되었다. 교편을 잡고 있는 며느리는 내 초임지를 궁금해 하면서 한번 가보고 싶어 했다. 그런 며느리가 고마워서 날을 잡았다.
계란재라는 고개는 제천 수산 땅에서 단양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더구나 제비봉의 한 줄기가 구담봉과 옥순봉을 빚어내려고 뻗어가다가 목을 한번 움츠린 고개이다. 이 고개만 넘으면 수려한 산수로 유명한 장회나루이다. 나루터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구담봉 옥순봉 강선대 청풍호를 배경으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사진을 찍었다. 아들은 예쁜 제 아내에 빠져 부모는 안중에도 없다. 며느리도 그런 새신랑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보낸다. 우리 내외는 그런 자식들의 모습을 보며 기쁨에 잠겨 있다. 어린아이들처럼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으며 구담봉 옥순봉 강선대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퇴계선생과 기생 두향이 얘기는 하려다가 말았다. 두향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젊고 착한 부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야영장으로 변한 학교를 한번 둘러보고 근처에 있는 김삿갓 문학관으로 갔다. 너른 주차장에 차를 댈 곳이 없다. 오지가 아니라 도회의 사람들이 다 이곳으로 몰려와 북적이는 것 같았다. 마대산(1050m) 중턱에 있는 김삿갓 생가지를 다녀와서 제자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닭볶음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네 식구가 좁쌀로 빚은 술을 한 탕기씩 마셨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맛있는 것을 권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며느리를 딸처럼 대하는 아내가 고맙고, 또 시아버지를 그다지 어려워하지 않는 며느리가 미덥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벌쭉벌쭉 웃은 아들도 마찬가지이다.
점심을 마치고 두 사람은 계곡으로 가고 우리는 그늘에 앉아 옛날을 이야기 했다. 한식경이 지난 후 찾아보니 냇물 맑은 물에 조약돌을 쌓아 소(沼)를 만들고 발을 담그고 어린아이들처럼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더위에도 시원한 물소리와 바람소리가 가슴을 꿰뚫을 것 같다.
행복은 일상에 있는 것이다. 어떤 지위도 풍요로운 경제도 행복을 만들어주지 못한다. 물소리가 귀를 씻어주고 바람소리가 향기를 실어다 주는 이런 일상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우리 젊은이만큼 청춘이 고달픈 나라는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행복의 시간을 빼앗긴 젊은이들에게 행복을 찾아주는 것이 가난과 역사의 부조리로 어려운 시대를 지낸 우리 세대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잠시라도 아이들에게 행복을 찾아주고,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의 가치를 일러 준 것 같아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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