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좋은수필-2 ] 240312 날것에서 숙성으로(정옥순 작품 이방주 단평)

느림보 이방주 2024. 3. 7. 20:39

[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2] 이방주 날것에서 숙성으로

정옥순 수필 <오늘도 봄동> ---한국수필1월호 게재

이방주 문학평론가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날것에서 숙성으로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노사연의 히트곡 <바램>의 노랫말이다. 맞다. 우리는 갖가지 고통을 이겨내면서 날것에서부터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다.

수필은 일상에 대한 인식을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아름다운 언어로 형상화하는 문학이다. 형상화 과정에 문학적 구성이 필요하다. 수필을 철학과 문학 사이에 있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필은 짧은 산문이기에 구성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작가의 사유를 밀도 있게 짧은 산문에 담아내려면 치밀한 구성이 절실하다. 구성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깊은 사유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월간 『한국수필』 1월호에 게재된 정옥순의 수필 <오늘도 봄동>은 치밀한 구성으로 일상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서정적 언어에 담아 형상화하여 독자의 가슴에 잔잔한 공명을 불러온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세 가닥의 서사가 나란히 존재한다. 봄동의 겨울나기, 수필적 자아의 외로움 견뎌내기, 시어머니의 며느리 바라보기가 그것이다. 봄동은 추위를 견디어 풋풋한 초록으로 ‘겨울나기’를 하고, 작가는 남편과 떨어져 시어머니와 살면서 입덧을 겪어야 하는 외로움을 견디어 노란 고갱이 같은 마음이 된다. 시어머니는 고독을 참으며 새생명을 잉태하는 며느리를 바라보면서 스스로도 숙성해간다. 세 가닥 서사는 날것이 숙성해가는 과정을 통하여 이렇게 하나로 수렴된다. 봄동은 ‘선택받지 못한 설움’으로 ‘밤이면 얼고 낮이면 녹으’면서 ‘시린 눈발’에 ‘숨을 죽이고 널부러진’ 배추이다. 남편과 함께하지 못하는 작가가 지니고 있는 날것으로서의 자존심은 시린 눈발에 숨을 죽이는 봄동을 보면서 ‘내가 너무 추워 눈물’을 참지 못할 정도로 공감한다. 봄을 맞아 아삭하고 달큰하고 고소한 봄동 겉절이를 먹으면서 ‘냉엄한 현실을 내안에 받아들이’고 하나로 동화된다. 날것의 자존심이 말랑하게 익어 숙성한 것이다. 익은 김치만 좋아하던 시어머니도 봄동을 좋아하는 며느리의 속내를 이해한다. 결국 세 가닥의 서사는 ‘신김치처럼 숙성되어’ 하나로 동화된다.

깊은 사유와 문학적 상상은 자연스런 구성을 이루어낸다. <오늘도 봄동>은 이야기 전개가 자연스러워서 단순한 듯하지만 전략적 사유로부터 기인하는 매우 치밀한 구성이 숨어 있다. 작가는 봄동이라는 대상을 오감을 통하여 물리적 속성을 감지한다. 그리고 봄동의 ‘겨울나기’는 자아가 이겨내야 하는 외로움을 비추어보는 거울로 삼는다. 봄동이 지닌 물리적 속성에서 우리네 삶의 원형상징성을 찾아냈기에 가능한 사유이다. 즉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동안 성숙하고 변환한다는 삶의 철학으로 개념화되었다는 말이다.

이 작품은 자아와 봄동과의 상관성을 연결하는 서사가 단단한 유비구조로 주제를 진하게 드러내는 한편, 우리네 공동심의를 뒤흔드는 서정적 목소리로 깊은 울림을 주었다.

 

<오늘도 봄동> / 정옥순

 

봄동 겉절이를 했다. 정성껏 씻어 소금에 살짝 절여 물기를 빼고 액젓에 불린 고춧가루를 넣고 마늘도 다져 넣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봄동아,/볼이 미어터지도록 너를 먹는다//오랜만에 팔소매 걷고 밥상 당겨 앉아/밥 한 공기 금세 뚝딱 해치운다만/네가 봄이 눈 똥이 아니었다면/…너처럼 당당하지 못하고...’

<황상순 ‘봄동아, 봄똥아’에서>

봄동을 ‘봄’이란 강아지가 쪼르르 길 가다가 눈 연둣빛 똥이라고 노래한 시인의 정취에 웃음이 절로 난다. 봄동을 좋아하는 나도 시인처럼 봄동만 보면 밥상 당겨 앉아 밥 한 공기 뚝딱 해치운다. 마지막 ‘너처럼 당당하지’라는 구절이 나의 심장을 뛰게 한다. 나도 한때 봄동처럼 당당하게 추운 삶을 맞이했던 때가 있었다.

김장철이 끝난 후 결혼했다. 직장 때문에 남편과는 주말부부로 지내며 시어머니와 살았다. ‘시’자가 들어가는 가족관계도 시어머니와 단둘이 먹는 밥상도 낯설었다. 시어머니의 손맛과 입맛에 따라 식탁이 차려졌다. 시어머니는 신김치를 좋아하셨다. 특히 푹 익은 김치를 좋아해서 김칫독에서 조금씩 꺼내 부엌에서 일부러 삭히곤 했다. 반면 나는 겉절이를 좋아했다. 금방 무쳐낸 겉절이 한입 먹으면 남편 없는 허전함도 채워질 것처럼 간절했으나 시어머니의 밥상 앞에서 내색할 수 없었다.

2월 말쯤 식탁에 봄동 겉절이가 올랐다. 저절로 입꼬리가 귀에 붙었다. 하얀 쌀밥 위에 봄동 한 잎 얹혀 먹으니 굳었던 마음도 말랑해지고 외로움도 참을 만했다. 봄동은 질긴 듯하지만 아삭아삭 씹히는 소리도 좋고 씹을수록 달큰하고 고소한 맛이 올라와 사탕 한 알 입에 문 듯 입안 가득 봄 향기가 퍼진다. 내 인생에도 곧 봄이 오겠지. 마음의 낯가림도 벗어났고 새 생명도 품었다. 마음이 봄동 고갱이처럼 노랗게 꽃피었고 헤벌쭉 웃었다. 그런데 주말부부에 지친 남편이 빨리 돈을 모아 함께 살자며 해외 파견근무를 나갔다. 2년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남편이 떠난 후에 나도 청주에서 강화도로 직장을 옮겼다. 다시 모든 것이 낯설었다. 내륙지방에서만 살다가 처음 겪어보는 섬지방 특유의 강한 말투와 배타적인 태도에 혼란스러웠다. 위액까지 토해내는 심한 입덧은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저녁이면 팽팽하게 긴장한 배를 감싸 안고 집 근처의 작은 시냇가를 걸었다. 길을 따라 배추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초록의 풋풋함은 외로움에 힘들어하는 내게 희망의 빛을 보여주는 듯도 했다.

김장철이 끝나자 배추밭은 을씨년스러웠다. 알찬 배추들은 보란 듯이 밑동만 남기고 사라졌다. 속없는 것들만 띄엄띄엄 남아서 선택받지 못한 설움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밤이면 얼고 낮이면 녹기를 반복하다가 체념한 듯 널브러진 배추는 겨울 시린 눈발을 뒤집어쓴 채 숨을 죽였다. 위로의 노래를 불러주던 시냇물조차 꽁꽁 얼어 소리를 낮췄다. 누구의 돌봄도 받지 못하는 그것들이 불쌍해서, 내가 너무 고단하고 추워서 눈물이 났다. 동료들이 은근히 따돌리는 것을 느낄 때면 시꺼먼 숯덩이가 되어 폭삭 무너져 버릴 것만 같은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퍼렇게 분노하며 자존심을 꼿꼿이 세웠다.

힘이 잔뜩 들어간 일상에 지쳐갈 때 구멍 난 마음의 허기를 채워준 것이 봄동이었다. 날것의 자존심을 우걱우걱 씹으며 쌉쌀하고 거친 맛으로 새겨진 냉엄한 현실을 내 안에 받아들였다. 사람들이 버려졌던 배추의 맛을 알고 봄동을 찾을 때가 되면 겨울은 거의 끝나간다. 나의 힘든 시간 또한 그랬다. 겨울이 지나자 그들도 나를 받아들였고 나도 그들에게 동화되어 갔다.

시어머님은 봄동을 보면 “니 생각이 난다.”고 했다. 이유를 여쭤보면 “그냥 니가 잘 먹으니까.”였으나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넉장거리로 땅에 납작 누워 속없이 부실한 봄동 같기만 한 며느리가 걱정되지는 않았을까. 동료들과 원만치 못한 인간관계를 드러내며 저녁밥도 안 먹고 방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아이를 보며 해맑게 웃다가도 밤이면 이국땅에서 온 남편 편지에 숨죽여 우는 며느리의 아슬아슬한 마음 밭을 염려하셨으리라. 되돌아보면 칠십 년을 살았던 고향을 떠나온 시어머니의 공허감이 나보다 더 컸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리산지리산하며 낯선 사람들 틈새에서 허둥대는 며느리를 지켜보면서 언젠가는 단단한 김장 배추처럼 속이 꽉 찬 사람이 되길 바라셨겠지. 신김치처럼 숙성되었다면 더 좋아하셨을 텐데.

봄동 속엔 늦가을 남겨진 서러움 한 움큼, 날것의 자존심 한 움큼, 외로움에 울던 내 눈물 한 움큼, 그리고 “봄동을 보면 니 생각이 난다”는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도 들어있다.

그래서 난 오늘도 봄동 겉절이에 마음도 양념으로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