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내가 생각하는 좋은 수필(수필미학 세미나 자유발표 원고 20240328)

느림보 이방주 2024. 3. 19. 20:21

수필미학 세미나 자유발표 원고/ 2024. 3. 28./ 이방주

내가 생각하는 좋은 수필

- 읽히는 수필을 위하여-

수필문단의 가장 큰 문제는 읽히지 않는 것이다. 일반 독자들은 물론이고 수필가도 다른 작가의 수필을 읽지 않는다. 대부분의 수필가들은 자신의 글에만 도취되어 있는 것이다.

밥은 육신의 에너지원이 되기도 하지만 맛의 여운도 소중하다. 밥은 먹고 난 뒤 몇 시간이면 공복이 되고 남은 향기도 사라지지만 좋은 수필은 읽고 나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배가 고프고 여운도 더 진하게 남는다. 그러한 공복에서 오는 쾌감과 여운이 우리네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작가는 창작 과정에서 변환과 성장을 가져오고 독자는 읽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고 갈등을 해결한다. 이와 같이 수필을 치유의 문학이라고 하지만 읽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수필 작가는 독자를 의식해야 한다. 독자가 없는 수필은 자기의식의 독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수필은 생산하는 사람과 수용하는 사람의 쌍방 간의 소통에 의해 효과를 얻어내는 언어예술이라는데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다.

최근에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몇 가지 유념하면서 더 좋은 수필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첫째, 주제 의식의 전환이다. 우리 문학에서 수용한 전통적인 주제 의식을 바탕으로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의식을 접목하려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고전을 읽고 고전에 드러난 자연에 관한 의식, 윤리에 관한 의식, 삶과 죽음에 관한 의식, 종교에 관한 의식 등을 공부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변환이 요구되는 생태주의나 페미니즘 같은 의식세계를 접목하고자 시도한다.

둘째, 수필은 고백의 문학이다. 자의식을 고백하여 독자에게 울림을 주는 문학이다. 이때 자기도취에 빠져 일상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협소한 의식 체계는 독자를 지루하게 한다. 그래서 세계 속에서의 자아, 남과의 관계 속에서의 자아의 실체를 탐색하고자 꾸준히 노력한다. 고백은 사실의 고백이지만 남김도 없고 꾸밈도 없어야 한다. 그런 고백이 독자의 의식세계를 변환시킬 수 있는 진실성이 있고 문학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글을 쓰려고 최선을 다한다.

셋째, 전통수필에서 주제 전달을 위한 구성의 특징을 공부하여 나의 수필 창작에 접목한다. 고려말의 수필에서 조선시대 수필로 이어져서 근대에 들어 서구의 에세이가 들어오면서 유지되고 계승 진화하는 우리 수필만의 구성법을 찾아 수용하려고 한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사유 단계와 구조가 시공을 초월하여 공통점이 있기에 오늘의 독자들의 사유 체계로 이어져서 큰 공명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넷째, 수필이 사실의 문학이라 해도 상상이 없으면 미적 울림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상에 대하여 전략적인 수필적 상상을 통하여 개념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때 수필의 언어도 상상의 세계를 함축할 수 있는 문학적 언어로 걸러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수필을 위하여 인근 문학 양식에 대하여 본질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서사의 기법이나 보여주기 기법을 배우고, 시를 통하여 시적 사유를 시적 언어로 형상화하는 기법을 공부하여 수필에 수용하려 노력한다. 희곡의 특성을 공부하면서 수필의 극적 반전의 비법, 역할에 대한 배치를 배우려 노력한다. 수필은 서사를 뼈대로 서정으로 조화하여 주제를 강조함으로써 감동을 주고 극적 반전으로 읽는 재미를 주어야 하는 문학예술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독자와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응답이 없다고 포기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수필을 읽지 않는 이들도 문학적 미감에 대한 끊임없는 공복감은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계속 글을 쓰면 언젠가는 빛을 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지금 빛이 나지 않으면 죽어서라도 글은 남게 되므로 그때라도 빛을 낼 것이라 믿는다. 우리 문학사는 이렇게 글을 써온 선배 문인들에 의해서 발전을 거듭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