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미선尾扇과 부채 바람

느림보 이방주 2019. 6. 12. 09:20


미선尾扇과 부채 바람

 

 

2019531

미동산수목원에서

 


단오는 양기가 성한 날이다. 그저 양의 숫자만 겹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온 누리에 양기가 이들이들하다. 이때는 산딸나무, 층층나무, 때죽나무 같은 활엽수들이 하얀색 꽃들을 피우기 시작한다. 하얀색 꽃들은 더 짙어진 녹색 나뭇잎 사이에서 지순한 얼굴을 감추기도 하고 녹색에 대비되어 더 새하얗게 피어나기도 한다. 꽃보다 녹음이 성한 것도 양기의 덕이고, 녹음에 대비되어 순결하게 보이는 것도 양기가 넘치는 모습이다.


단오에는 임금이 신하들에게 단오부채를 나누어 주었다고 전한다. 부채를 하사받은 사람들은 부채에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그렸다. 사대부들은 사군자를 그리고 기생이나 무당은 버들개지 복사꽃을 그려 지녔다는데 이것이 선면화扇面畵이다. 부채에서 금강산 바람이 불기도 하고, 사군자나 복사꽃 바람이 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보다 풍습이 낭만적이라 옛 사람이 부럽다.


단오가 꼭 한 주일 남은 금요일에 미동산수목원에 갔다. 고희古稀가 바로 저기인 우리 네 남자도 솟아오르는 양기만큼은 참을 수가 없다. 수목원 둘레길 이십 리를 걷는 두 시간 동안 화제는 변화무상하다. 백제 역사를 더듬다가 중국 전국시대로 넘어간다. 힌두교와 불교의 교리를 넘나들다가 유현진의 야구나 손흥민의 축구로 들어서기도 한다. 법성게를 말하는 친구, 초한지를 말하는 친구, 오이농사에서 삶의 철학을 논하는 친구도 있다. 나는 늘 백제부흥운동사에 침을 튀긴다. 막바지에서 차를 한잔 마실 때쯤 우리는 어느새 새 책 세 권을 읽은 것만큼이나 배가 부르다. 한 주 동안에 머리에 낀 이끼를 깨끗이 헹구어낸 셈이다. 이럴 때는 입으로 오른 양기도 쓸 만하긴 하다.


차를 마시고 일어설 때쯤 반갑게도 나의 수필창작교실 문우 강 선생을 만났다. 그래서 잠시 그니와 동행하게 되었다. 한 모롱이를 돌아서는데 길가에서 미선나무를 발견했다. 이른 봄 운 좋게 꽃 사진을 촬영한 곳이다. 사진 작가이기도 한 그니를 보자 지금쯤 미선나무 열매가 달렸을 것이란 생각이 일었다. 친구들과 떨어져 그니와 미선나무 열매를 찾으려고 주의 깊게 살폈다. 드디어 찾았다. 미선나무가 작고 앙증맞은 초록색 부채를 나폴나폴 매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맑은 바람이 일어날 것만 같다. 가지마다 초록색 미선尾扇이 소복소복 매달렸다.


오늘따라 주체할 수 없이 넘치는 양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미선나무 열매를 보면 왜 미선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바로 알 수 있는 그런 모양새이다. 바로 그 열매가 미선이다. 미선은 옛 궁중 연회 때 임금의 좌우에서 시녀가 들고 있던 마치 귓불을 맞붙여 놓은 것 같은 커다란 부채가 바로 그것이다. 미선은 대나무로 얇은 살을 만들고 그 위에 한지를 붙여 만들었다. 궁중의 큰 의식이나 연회 때 사용한 부채의 일종이다. 그런데 미선나무 열매가 꼭 미선을 닮았다.


단오 때 미선나무 열매는 초록색이다. 그런데 열매가 익어가면서 차츰 연분홍색으로 변한다. 가장자리부터 연분홍색이 시나브로 붉은 색으로 변하다가 완전히 익으면 고운 빛은 퇴색하여 갈색이 된다. 갈색 열매는 미선의 완성된 색이다. 미선이 익어가는 모습은 어쩌면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초록에서 분홍으로 이글이글 타는 붉은 색이었다가 성숙한 갈색이 되는 과정이 말이다. 사람살이의 한 틀이기도 하다.


작고 앙증맞은 미선을 보며 미선과 미선나무 꽃과 열매의 인연을 이야기하는 동안 친구들은 멀리 가버렸다. 나는 갑자기 민망해서 도망가듯 친구들의 꽁무니를 찾았다. 그니는 다른 길로 가고 나는 친구들을 따라 오느라 서둘렀다. 나는 어느새 산에서도 선생이 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쑥스러웠다. 그러면서도 그니만큼은 나의 이야기를 부채처럼 생긴 미선나무 열매에서 나오는 맑은 바람으로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는  과분한 욕심을 부렸다.


단오에 임박해서 청곡 오근석 화백의 선면화전이 있었다. 역시 수필교실 문우인 여원 송 선생이 포스터까지 구해다 주면서 권하기에 공예관으로 찾아갔다. 오근석 화백은 명성만 들었지 일면식도 없어 인사 나눌 때 나를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해 드렸다. 청곡선생은 친절하게 부채에 그린 그림의 내용, 동기와 아울러 어려움까지 설명해 주었다. 전시회에 가서 작가의 설명을 듣는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


부채가 바람을 일으키듯 그림도 바람을 담고 있었다. 난에서도 대나무에서도 바람이 일었다. 눈 덮인 산야에서도 동트는 산에서도 바람이 일었다. 화가라도 바람을 선면扇面에 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바람은 투명해서 스스로 존재를 드러낼 수 없기에 하는 말이다. 바람은 누군가를 흔들어 깨워야 비로소 자기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청곡 선생은 내면의 바람을 선면화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선생은 난이든 대나무든 마음의 바람을 일으켜 우리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다. 화첩에 섬동 김병기 선생이 쓴 발문을 보니 시대의 새로운 문화를 일으키는 시풍時風이라고 했다. 작품 중에 미선은 없어 아쉬웠지만, 미선나무 열매를 발견했던 감동을 되새기기에 충분했다. 나도 섬동 선생의 소망처럼 그 바람이 맑은 바람이기를 발원했다.


청곡 선생의 자상한 설명을 듣다가 한손으로는 부치기도 어려울 만큼  커다란 방구 부채를 발견했다. 걸려 있는 부채에 그림은 여백이 많지만 선생의 음성만큼이나 맑은 바람이 이는 듯했다. 부채는 커도 내게 불어오는 바람은 오히려 안온했다. 안온한 바람이라도 마음은 오히려 더 크게 흔들린다. 부채는 부채로만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선면화에 담은 작가의 마음이 대중을 향해서 바람을 보내는 것이란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선면화에서는 작가 내면의 바람이 분다면 옛 궁중의 미선에서는 어떤 바람을 일으켰을까. 왕을 섬기는 궁녀의 진정한 사랑이 담겨 있었을까. 백성에게 보내는 임금의 충정을 담아 보냈을까. 꽃이 지고 막 제 모양을 갖춘 미선나무 열매를 처음 봤을 때 내 가슴에 일었던 바람은 과연 문우인 강 선생 일행의 가슴까지 전해졌을까. 미선나무 작은 열매이지만 단오절 초록 양기만큼이나 그들 가슴에 큰 흔들림으로 전해졌을 것이라 믿고 싶다.

단오절을 맞이하여 나는 운 좋게 부채라는 화두에 묻혀 살았다. 문우 강 선생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서 만나지는 못했지만 나의 수필교실 모든 문우들에게 보내는 나의 한 마디 말씀이나 한 줄의 글에서도 청곡 선생 부채 못지않은 맑은 바람이 일어 커다란 울림으로 전해지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