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름덩굴꽃에서 임하부인林下婦人까지
2019년 5월 5일
좌구산 바람소리길에서
사랑은 그리움을 부른다. 아프지만 내 안에 그대가 남아 있기에 그리움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대가 내 안에 남아 있는데도 그대는 이미 내 옆에 없으니 그리울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간의 사랑이다.
전복 한 상자가 배송되었다. 여름 보양식으로 딸내미가 완도에 주문했다고 한다. 생산지 직송 전복이라 말 그대로 싱싱하다. 스티로폼 상자를 열고 잠을 깨우니 꼼지락꼼지락하다가 조금씩 움직임이 커진다. 거뭇거뭇한 무늬가 있는 입술을 오므렸다 벌렸다 한다. 입에 군침이 돈다. 산 채로 그냥 혀를 대어보고 싶은데 아내가 어느새 숟가락으로 조갯살을 따낸다. 공연히 아쉽다. 흘기지도 않는 아내 눈을 슬며시 피한다. 쓸데없이 ‘내가 뭘?’하고 발명을 할 뻔했다.
이 조개는 왜 꼭 이 모양이어야 할까. 참으로 딱하게도 생겼다. 숟가락으로 따낸 조갯살을 도마에 놓고 착착 썰어서 초고추장과 함께 식탁에 올린다. 딱하고 징그럽다. 그래도 혀에 전해지는 식감은 연하고 맛은 고소하다. 고소한 맛이구나. 나는 장난삼아 살아서 꼼지락거리는 전복 다섯 개를 동그랗게 벌여놓아 보았다. 와 이건 정말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다. 전복이 제 모습을 잃어버리고 묘한 그림이 되어 버렸다. 가을에 본 으름 모양도 닮았다. 전복에서 으름을 보고 으름에서 전복을 봐야 한다. 자연은 자연끼리 통하고 그것은 또 아름다운 인체와 통한다.
쌍곡에서 막장봉에 이르는 길고 깊은 계곡을 걸어본 일이 있다. 웬만한 사람은 중간에 포기하는데 나는 길고도 깊은 그 계곡이 좋았다. 이른 봄 눈 녹아 흐르는 물소리도 좋지만, 산열매 익어가는 가을이 더 좋다. 농익는 가을 열매를 바라보기도 하고 소나무 향기를 맡으며 두어 시간 남짓 갈잎 밟히는 소리를 듣노라면 그야말로 막장봉에 이른다. 막장봉 막바지에 가파른 비탈길을 오를 때는 아무리 가쁘더라도 주변을 살펴야 한다. 계절에 따라 다래가 소복하게 익어가는 덩굴을 발견할 때도 있고 주렁주렁 매달린 으름이 보일 때도 있다. 거기서 으름을 보았다.
으름 열매는 바로 쳐다보기 참 민망하다. 어떤 것은 열매 다섯 개가 조금 작은 바나나 모양으로 매달려 있다. 한 10cm쯤 되는 것들 다섯 개가 모여서 덩굴에 매달려 있어서 ‘그 놈 참 실하다.’라는 남성들의 부러움을 사고도 남는다. 그런데 바로 옆에 노랗게 익어가면서 한 쪽이 쩌~억 벌어진 것도 있다. 정말 민망한 모습이다. 전복 5개가 쩌~억 벌어져 나뭇가지 아래에 매달려 있다. 이때 내 정서를 억누르고 욕구를 가라앉히려면 ‘전복 같다’라고 하지 말고 점잖게 ‘임하부인林下婦人’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다. 그러노라면 노란 입술 속에 거뭇거뭇한 씨앗을 품고 벌어진 임하부인은 한 술 더 떠서 하얗고 되직한 액체를 방울방울 떨어뜨리고 있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혀를 대보면 달콤한 맛에 흠뻑 취할 것만 같다. 자연은 왜 이렇게 인체를 닮아서 점잖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지 모르겠다.
임하부인을 열매만 봤으니 꽃이 궁금했다. 꽃은 얼마나 예쁠까. 임하부인은 어떤 모양으로 꽃을 피울까. 이토록 점잖은 사람의 정서까지 흔들어 놓는 열매는 어떤 꽃의 열매일까. 그런데 그 꽃을 보고 말았다. 올봄에 좌구산 바람소리길에 갔는데 입구에서 우연히 으름덩굴의 꽃을 만났다. 이 꽃을 정을 가지고 관찰한 것은 처음이다. 엷은 보랏빛으로 피어난 것도 있고 붉은 보랏빛으로 피어난 것도 있다. 모두 꽃잎 석 장을 바짝 오그리고 있다가 활짝 피어난다. 참 예쁘다. 열매를 생각하니 꽃이 이렇게까지 예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예쁜 꽃에서 어떻게 그렇게 민망한 열매가 맺힐 수 있을까? 오그린 꽃잎 속에 수술 다섯 가닥이 고만고만하게 올라와 있다. 그런데 손톱보다도 작은 수술 모양이 꼭 수컷을 닮았다. 끄트머리는 동그스름하게 거북이 머리를 닮아 있고 그 아래는 영락없는 거북이 모가지의 축소판이다. 어찌 저럴 수 있을까. 저것들이 자라서 바나나 모양의 열매가 되었다가 농익으면 임하부인이 된단 말인가. 그렇지만 수컷이 어찌 열매로 자랄 수가 있겠는가. 바나나 모양의 열매는 아무래도 암컷에서 연결되었을 것이다. 꽃송이들이 소복소복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있다. 그 한 송아리가 나중에 으름의 열음모둠이 되었다가 익어 쩌~억 벌어져 임하부인이 되겠지. 농익어 끈적한 액체도 방울방울 맺혀 사람들 심정을 어지럽히기도 하겠지. 자연은 이렇게 부분 부분이 인체를 닮아 있다.
사람은 작은 우주이다. 으름덩굴꽃이 수술 다섯 개를 품고 있듯이 인체는 자연의 구석구석을 다 오그려 품고 있다. 인체는 자연의 축소판이고 대우주를 상징하는 모형이다. 여기에 착한 영혼까지 스며있으니 인간은 자연의 섭리를 모두 품고 있는 소우주이다.
으름덩굴꽃이 임하부인이 되는 봄부터 가을까지 모습을 민망하다고 말하지 말자. 그것은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엿보이고 있는 것이다. 으름덩굴은 커다란 나무를 타고 올라가 소우주의 모양을 은밀하게 보여주는 임하부인이다. 으름덩굴꽃은 열매를 그리워하고 열매는 봄을 품고 있다는 자연의 섭리까지 가르치고 있다.
봄이 가을을 그리워하는 것은 가을이 봄의 흔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 열매에 봄꽃의 그림자는 남아 있어도 붉은보랏빛 고운 꽃잎은 간 곳을 모르니 그리울 수밖에 없다. 봄꽃은 가을이 그립고 가을 열매에는 봄의 기억이 그립다. 이렇게 자연은 인간의 사랑과 그리움까지 닮아 있다. 인간은 과연 소우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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