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임 수필가의 《언어를 줍다》
여울에서 길어 올린 그리움의 언어
이방주(수필가, 문학평론가)
1. 들머리
수필은 체험의 문학이라고 한다. 그런데 체험에 해석이 없으면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 수필은 작가의 철학이 바탕이 된 삶의 해석이 생명이다. 어떤 이는 수필을 신변잡기라 한다. 신변을 소재로 상상도 해석도 구성도 없이 썼다면 그것은 잡기이다. 신변을 소재로 해석과 상량이 있고 형상화가 있을 때 비로소 문학이란 지위를 얻어낸다. 이런 측면에서 최명임의 《언어를 줍다》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내 글의 발원지는 아랫녘, 청보리색 바람이 자주 불고 어린 노루가 사립을 기웃거리던 청련한 산골이다. 시인이 아닌 아이가 있었을까. 나도 가슴에 시 한 편 품고 자랐다. 노루만큼 찬란했던 호기심과 올새 고운 감성이 시인의 창을 들락거리다 세상으로 날아왔다. 해사한 언어들이 날조된 생에 묻혀버렸다.
-<책머리에> 중에서-
<책머리에>는 그의 문학적 언어의 근원을 밝힌 글이다. 최명임 수필가의 언어는 그리움을 품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시인의 가슴으로 호기심과 울새 고운 감성을 지니고 살았다. 그러나 그의 눈으로 보면 날조된 세계에 그의 언어는 묻혀버렸다. 묻힌 언어라 할지라도 그것이 그리움이든, 현실 비판이든, 삶의 지혜이든, 바라보이는 세계에서 저절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작가는 대상을 해석하면서 ‘그리움’이란 언어를 하나하나 주워 올렸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의 언어는 숨어 있는 의미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서사성도 소중하지만 시적 서정성도 소중하다는 말이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인식과 해석을 통한 문학적 형상이 제대로 갖추어질 때 수필은 신변잡기가 아니라 신변이라는 깊은 바위 덩어리에서 캐어낸 예술적 언어가 되는 것이다. 최명임은 형상화의 어려움에 대하여 이렇게 술회한다.
흔적 하나로 기틀을 잡으면 어느 접점에서 곡절을 풀어헤쳤다. 알 수 없는 용기가 나를 부추기고 요소요소에 들어간 낯선 언어들이 산고를 치르면 나의 글은 오롯한 희열이 되었다. 그 든든한 희열을 다시 들여다보다 부끄러움에 수없이 좌절하곤 했다.
-<책머리에> 중에서-
누구나 사상과 정서를 풀어내는 데는 산고가 필요하다. ‘흔적 하나로 기틀을 잡으면 접점에서 곡절을 풀어헤치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산고를 거치고 나온 낯선 언어들은 작가의 희열이 된다. 마치 종교적 깨달음의 기쁨처럼 말이다. 그 기쁨도 잠시 문인은 부끄러움에 좌절하기도 하다. 그것은 작가로서의 겸손이라고 생각한다.
최명임 수필가의 두 번째 수필집 《언어를 줍다》는 49편)의 작품을 6부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6개의 소제목을 붙여 8~9편씩 수록한 작품의 공통점을 살펴보니 주제나 소재를 통하여 묶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작품의 주제는 그리움, 생태환경에 대한 의견, 여행과 일상에서 감회, 세태 비판, 존재의 확인 등으로 대별하여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움’ 제재 작품은 고향, 어머니 아버지, 혈육, 생활 풍습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기도 하였고, 외래 생물이나 환경오염으로 파괴된 생태환경에 대한 안타까움과 환경파괴 이전의 자연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여행과 일상을 소재로 한 글에서 그는 삶의 지혜와 터득한 인생철학을 아주 조심스럽게 토로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역사와 시대에 대한 고민도 드러나서 날로 변해가는 세태에 수필가로서의 근심과 견해를 밝혔다.
최근 서구의 에세이와 우리의 전통 수필을 구분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매우 반갑고 바람직한 일이다. 수필은 한국문학의 풍토서 자생하여 오늘까지 계승 발전하여 온 것이지 서구의 수필을 이식한 것은 아니다. 최명임 수필가의 《언어를 줍다》는 한국 전통 수필의 맥을 이으려고 노력하는 일면을 보이고 있다. 최명임의 《언어를 줍다》가 지향하는 형상의 방향이 한국 전통 수필을 따르면서도 서구의 에세이를 닮은 논리성을 중시한 작품도 보인다. 하지만 이 또한 수필문학 발전의 일가를 형성해가는 과정이라 보고 싶다.
돌의 언어는 간결하다. 바람과 물살에 승화된 가슴과 무색무취한 산소로 빚어내는 웅숭깊은 언어는 나를 사로잡는다. 사람의 언어도 그랬으면 좋겠다. 돌을 줍는 날은 나의 언어도 돌을 닮아 가는 듯 음전해진다. 붓방아질을 하다가 잡다한 언어로 사설만 늘어놓은 내 글도 언젠가는 돌의 언어처럼 간결해지리라 믿는다. 한 편의 명수필로 내 글에 정점을 찍게 되는 날을 꿈꾼다.
-<돌에서 언어를 줍다> 중에서-
《언어를 줍다》의 언어는 돌을 닮아 있다. 그는 돌의 언어는 간결하다고 한다. 간결한 언어를 지향한다는 말이다. 깊은 철학이 담겨 있는 언어는 오히려 단순하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붓방아질만 하다가 잡다한 사설만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돌의 언어처럼 삶의 철학이 담긴 간결함을 추구할 일이다.
2. 그리움과 존재의 확인
한국 전통수필은 체험에서 의미를 찾아 그것을 삶의 교훈으로 삼는다. 교훈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자칫 교술에 빠질 우려가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수필을 문학의 범주에서 제외하기도 한다. 《언어를 줍다》에 수록된 49편 작품은 교술의 차원을 넘어 대상에 대한 고도의 해석이다. 그의 해석은 자신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수필적 상상을 통하여 의미를 천착한 결과이다. 이러한 독창적 시선은 체험의 여기저기에서 배어나온다. 자연에서 삶의 지혜를, 일상에서 자아의 성찰과 반성을, 세태에서 역사의 아픔과 꾸짖음을, 인간관계에서 따뜻한 인간애를 찾아내고 있다. 이러한 그의 의미 구현을 인간의 근본적인 그리움과 존재의 확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독창적인 인식의 시선을 찾아보기로 한다.
(1) 그리움은 시공時空을 넘어 오늘의 서정으로 남아
그리움이란 ‘어떤 대상을 좋아하거나 곁에 두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어서 애타는 마음’이다. 문학은 그리움을 말하는 언어이고, 그리움은 언어로 형상화되고 해결되어 문학으로 승화한다. 문학은 시간, 계절, 사람, 고향 같은 지나가버린 것에 대한 아픔을 언어로 소생시켜 해결한다. 이렇게 부활한 그리움은 아름답기 때문에 모든 이가 공감한다. 자연적인 시간은 흘러가지만 문학은 흘러간 시간을 되살려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최명임 수필가의 그리움은 삶의 어떤 부분에 존재하는지 탐구해 보기로 한다.
나는 아직도 기억 저편에 초가를 품고 있다. 가끔 후끈한 온돌방에 몸을 누이는 상상을 한다. 후드득 봉창으로 뛰어드는 빗소리와 짚 지붕의 소리 없는 빗소리를 들으며 한잠 푹 자고 싶다. 누가 뭐라 하겠는가. 아직도 초고속으로 몰려오는 개화의 물결 속에 고요히 찾아드는 저 아슴푸레한 시간을⋯.
초가는 의당 벗어나야 할 문맹이었다. 하지만 내겐 삼베 적삼에 배어있던 어머니 체취였다. 그래서 그 양반의 아집처럼 꼭꼭 붙들고 있다.
-<고향을 불러내다> 중에서-
고향 집의 어지러운 정경에 눈물이 난다. 깨진 항아리 조각과 내려앉은 서까래, 뒤틀린 문짝에 남은 문풍지가 바람에 갈갈거린다. 이끼 수북한 돌담과 구실을 잃어버린 아궁이가 나를 맞는다. 백 년을 내다보던 감나무도 참 많이 늙었다. 1년 새경을 미리 받고 머슴살이 왔던 아재가 흥감스레 누렁소 엉덩짝을 후려치던 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그 논과 밭은 성성한 풀숲이 되었다. 산 같은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그런 새끼들을 위해 아버지가 애면글면하셨던 곳이다.
-<흔적을 붙들고> 중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은 그리움이란 정서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배우게 마련이다. <고향을 불러내다>는 고향 초가를 통하여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흔적을 붙들고>는 고향집 감나무, 풀숲, 누렁소를 통하여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부모에 대한 그리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타당한 그리움이고 가장 기본적인 그리움이라 할 수 있지만, 초가에서 ‘삼베 적삼에 배어 있는 어머니의 체취’를 감각하고, 성성한 풀숲에서 ‘산 같은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기억해 내어 감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하였기에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기었다.
그리움이 너무 진해지면 그 주체를 찾아 떠나보든지 한 차원 높게 내려놓아 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어머니는 가슴에 오빠를 묻은 채 떠나셨고 세월은 내가 보내지 못한 오빠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갑자기 고향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그간의 세월은 생무덤이 앉은 따비밭을 숲으로 만들어 놓았다. 살았으면 허연 머리를 하고도 씨익 웃으며 반겨줄 오빠가 없다. 묻고 돌아선 뒤 자그마치 17년 만이다.
-<달맞이꽃> 중에서-
봄비 속을 걸으면 그때 나를 마음에 품어 준 그 머슴애가 공연히 생각난다. 코흘리개 그 머슴애도 잘살고 있을까. 어느 길모퉁이에서 우연이라도 한번 만나고 싶었다. 얼굴엔 살 색 분가루로 주름을 덮고 흰머리는 검정색 물을 들여 봄비 속 찻집에서 만나고 싶다. 유리창에 아른거리는 세월일랑 묻어두고 그때로 돌아가서 활짝 웃어보아도 좋으리. 기다림을 가져 볼까? 추억 한 아름 몰고 온 봄비가 바람이다.
-<봄비는 얄궂다> 중에서-
<달맞이꽃>은 따비밭을 통하여 일찍 타계한 오빠를, <봄비는 얄궂다>는 봄비 내리는 날 어린 시절 자신을 좋아하던 고향 머슴애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고 있다. 따비밭의 생무덤으로부터 연상되는 오빠의 이미지가 그리움으로 그리고 그를 가슴에 묻고 떠나신 어머니로 연결되어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봄비는 얄궂다>에서는 봄비 속에서 머슴애를 그리워하면서 ‘주름을 펴고’ ‘흰머리는 검정색 물을 들여’ 오늘의 찻집에서 만나기를 소망하고 있다. 여기서도 과거에 오빠라는 혈육의 남성과 머슴애라는 이성적 남성에 대한 그리움이 현재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선생님이 만난 초로의 신사 내외가 앉았던 벤치는 비어있다. 어느 낯선 도시에서 생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을까. 굳이 먼저 가셔야 했던 사연이 없었으면 나도 선생님을 뵐 수 있었으련만, 책으로 만난 인연이라도 간간히 그분이 그립다. 그날 저문 산사의 분위기와 다르게 해가 막 중천을 비켜가고 한낮의 열기로 마당 곳곳에 열화같이 꽃이 핀다. 세상 떠나신 뒤에 더욱 빛나는 선생님의 문향이 군데군데 배어있다.
-<불영사를 찾아서> 중에서-
<불영사를 찾아서>에 담긴 그리움의 대상은 감명 깊게 읽은 작품의 작가이다. 여기서 ‘선생님’은 수필 <불영사에서>란 작품을 쓴 우리고장 수필가 목성균이다. 최명임 수필가는 목성균의 작품집 《누비처네》에서 이 작품을 읽고 문득 남편과 함께 불영사를 찾아가게 된다. 불영사 곳곳에서 목성균 수필가의 체취를 느끼며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 그 분을 그리워한다. 시간을 초월한 한 공간에서 옛 작가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문학은 시공을 초월하여 선배 작가의 날숨을 들숨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이와 같이 그리움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서정으로 남아 생생한 감각으로 다시 탄생하는 것이다.
(2) 생태환경을 바라보는 인간적 시선
인간은 자연에서 산다. 자연과 인간은 대결하거나 대비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생태환경의 파괴는 곧이어 인간의 파멸을 의미한다. 최명임 수필가는 인간에 의하여 파괴되는 생태환경을 냉철한 시선으로 비판한다.
꽃이 핀다. 꽃이 진다. 공연히 지는 꽃이 서럽다. 지는 내가 서러운 건가? 머지않아 봄도 떠날 것이다. 다시 올 적에는 강남으로 떠난 제비를 불러 모아, 나비와 더불어 오는 봄이었으면 좋겠다. 사립문에 웅크린 제비꽃이 실눈 뜨고 기다리던 몽환의 봄을, 내 까마득한 기억 속에 자리한 그 봄을 많이 닮아있으면 좋겠다.
-<봄이 전설이 될라> 중에서-
어느 날 불같이 일어나는 이기적 문명을 보았을 것이다. 그 숲이 영원하길 소망하며 아이들에게 청빈의 사냥 법은 물론 그들이 기대어 살아온 숲의 내력을 누누이 들려주었다. 그럼에도 안타까워 매 순간 자각하며 살기를 바람으로 만든 것이 부메랑이 아니었을까. 사냥감을 향해 날렸지만, 분명 그 염원에서 비롯된 소산물이었을 거다. 내게서 나간 것은 내게로 돌아온다는 삶의 이치를 반원에 새겨 넣고 나머지 반원은 후손들이 채워 완성을 이루면 좋겠다는 염원의 도구였을 거다. 그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고 부메랑은 시공을 넘어와 21세기를 날고 있다.
-<부메랑> 중에서-
<봄이 전설이 될라>에서는 환경오염으로 인해서 나비가 사라지고 꽃이 제대로 된 봄을 맞지 못하는 현실을 가슴 아파한다. 그래서 봄이 전설 속에 묻혀버릴 것 같은 현실을 두려워하고 있다. <부메랑>은 인간이 추구한 이기적 문명이 자연을 파괴하고 결국은 인간을 파괴하게 될 무서운 현실을 ‘부메랑은 시공을 넘어와 21세기를 날고 있다.’고 토로하였다.
시대적 현실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문학이 아니라고 했다. 이 말은 문학이 현실문제 해결의 과정이라는 말과도 통한다. 문학이 문제를 제시하고 해결 방법도 넌지시 제시하면 감동한 독자들은 문제 상황을 인식하고 나름대로 방법을 찾게 된다. 소설은 이러한 문제를 가상의 세계를 이야기로 구성하여 보여주지만, 수필은 자신이 체험한 문제를 상상을 통하여 생생하게 재현한다. 소설은 가공의 세계를 구성할 때 그 개연성을 중시하지만, 수필은 체험을 보여주므로 진실성이 중요하다. 진실성은 현실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인상적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에 의해서 성패가 좌우된다. 현실을 바라보는 최명임 수필가의 시선은 분석적이고 과학적이며 해석은 매우 인간적이다. 그래서 수필이 철학과 문학의 사이에 있음을 보여 주는 문학 양식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3) 일상과 여행에서 줍는 철학
어떤 평론가는 수필이 일상에서 떠나 있어야 문학으로서 대접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수필이 체험과 사색의 문학이라고 한다면 과연 일상을 떠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일상의 체험에 머물러 버린다면 신변잡기가 되겠지만, 일상에 대한 철학적 사색을 통하여 삶의 지혜를 발견하여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면 그것이 곧 수필의 문학성 구현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최명임 수필가의 다음 작품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빨래는 매일 내 손에서 환탈을 한다. 아침 댓바람부터 지니를 불러내고 부랴부랴 나서는 식구의 입성을 앞태 뒤태 돌아본다. 빨래를 걷어 들이고 전쟁터로 나가는 투사의 옷을 정성으로 다림질을 한다.
나도 매일 거듭난다. 육신은 어제의 내가 아니고 내일의 내가 아닐 테니 거듭남은 분명하다. 나는 거듭나 본 적이 있던가. 환탈이 아니어도 나인 척 내 안에서 행세하는 모순덩어리 하나쯤 버리는 노력은 해보아야 할 것 같다.
내게서도 향기가 나려나.
-<빨래의 의미> 중에서-
저 농도 짙은 묘약은 마늘의 사나운 냄새를 가라앉힐 것이다. 덤으로 화급한 성질까지 잡아 순한 심성으로 바꾸어 줄 것이다. 겁 없이 몇 톨 집어 먹어도 탈이 없는 평이해진 맛이 내 몸의 난을 평정한다니 믿어보련다. 마늘의 일해백리 중 한 가지 흠을 없애는 과정이다.
-<일해백리하다기에> 중에서-
이 두 작품은 일상에서 삶의 지혜를 발견하는 과정을 드러내었다. <빨래의 의미>는 누구나 일상으로 행하는 빨래의 과정에서 다시 태어나는 옷을 보면서 자신의 육신도 환골탈태하는 것을 본다. 그렇게 생각하면 육신만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정신세계를 암시하는 것이다. <일해백리하다기에>에서는 마늘 까는 일상에서 마늘에 대한 의미를 생각한다. 일단 마늘의 설화적 해석으로 접근한다. 마늘 껍질 속에 갇혀있는 마늘 알갱이를 찾아내면서 ‘열두 대문을 닫아걸고 비밀도 아닌 것이 비밀에 싸여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면서 ‘가아假我의 껍데기를 수백 겹 벗겨나가다’ 드디어 ‘구중궁궐 속에 숨어있는 환심장할 진아眞我의 자태’를 찾아낸다고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마늘만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나를 찾아내는 것이다. 마늘의 본질을 통하여 ‘화급한 성질을 가라앉히고 순한 심성으로’ 거듭나는 자기 성찰과 자기 본질의 구현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일상에서 건져 올리는 삶의 지혜는 모든 작품에서 드러나지만 특히 <어우렁그네>, <페이지가 없는 공간> 같은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온다. 가슴이 포만감으로 온통 차버리니 상대적으로 몸이 느끼는 공복감이다. 별천지 같은 섬에서 바다 냄새 가득한 진수성찬을 받았다. 여기에는 별도 무성하지 않을까. 하늘도 흠뻑 젖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올려다보니 무수히 많은 별이 숨어서 수군거린다.
-<파도를 타야 닿을 수 있는 곳> 중에서-
어둠이 바다를 가득 채웠다. 귀항하는 만선의 희락이 불빛으로 춤을 춘다. 출항하는 밤배는 파도를 가르고, 멀리 띄엄띄엄 떠도는 불빛이 꿈을 꾸기 시작했다. 부두에 매인 배는 무엇일까. 집착인 듯 멍에인 듯 단단히 묶여있다. 매인 배가 내 안에서 술렁인다.
이 저녁 세상사에 얽매인 범부의 가슴으로 밀물과 썰물이 고동치며 들락거린다. 바다 돌을 닮으라는 다그침일까.
-<바다는 내게> 중에서-
여행은 일상의 탈출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착각이다. 여행도 사실은 일상의 한 모서리이다.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 여행지에 도착하면 그곳은 곧 일상이 되어 버린다. 최명임 수필가의 여행은 대개 남편과 동행한다. 이렇다면 분위기까지 일상에 가깝다. 여행도 일상의 한 모서리라 하더라도 시선이 닿는 모습은 사뭇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서 발견하는 삶의 지혜도 조금을 새로울 것이다.
<파도를 타야 닿을 수 있는 곳>이나 <바다는 내게>는 여행지 체험에서 얻은 삶의 지혜이다. 바다의 깨우침을 ‘밀물과 썰물이 고동치며’ 범부의 가슴을 드나들며 바다를 배우라고 한다. 여행지의 자연에서 삶의 섭리를 배우는 작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4) 세태에 대한 비판
다산 선생은 그의 아들 <연아에게 부치는 글>에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시대를 상심하고 시속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뜻이 서지 않고 배움이 순수하지 않으며 큰 도를 듣지 못한’ 자는 시를 쓸 수 없다며 문인의 도를 말했다. 오늘도 시대와 역사에 대한 고민이 없는 글은 문학이라 할 수 없다는 데 대해 이견이 없을 줄 안다. 이 책에서 작가의 시대와 역사 세태에 대한 근심을 찾아보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내가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고 대대적으로 청소를 해도 알 수 없는 한구석에는 먼지가 습을 만나 썩어가고 있을 거다. 탐관오리의 가당찮은 행위와 갑의 폭력에 멍들어가는 민초들 아직은 많으리니, 촛불이 바람에 스러지지 않도록 부디 초심을 잃지 말라 중간보고를 드린다.
-<○○○님 귀하> 중에서-
아이들은 우리의 녹슨 심장을 부둥켜안고 기어코 하늘로 올랐다. 판관 앞에 속죄양이 되었다. 더는 부패해가는 어른들의 세상을 볼 수가 없어서 스스로 제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대도 우리도 죄 없다고 우길 일이 아니다. 그 자리에 앉아 무심하였던 죄, 목숨을 담보로 욕망을 채운 죄, 세월호인 죄, 사람인 죄, 아이들을 제물로 바친 죄….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중에서-
미투me-too의 확산이 그 소리이다. 그 소리가 어린 소녀의 미래를, 여성의 세계를 당당히 구축하게 된다는 말이다. 과감히 용기를 내어 철벽같은 남성의 그 무례한 성역을 무너뜨리고 사회악을 고발하는 그녀들의 반란이 밀려온다. 참으로 오랜 시간 짓밟히며 살아온 한 맺힌 여자의 후손들이 비로소 내는 저 소리가 여자의 역사를 다시 써 내려 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 소리의 영속성이 여자의 세계를 확고하게 세울 것이다.
-<소리, 그 소리> 중에서-
<○○○님 귀하>는 탐관오리에 대한 질책이다. 집안 청소를 하다가 일이 커져서 곳곳의 부정한 것들을 걷어내면서 사회의 부정을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청소는 일종의 상관물이 되고 거기서 삶의 지혜를 깨닫게 된다. 청소를 하다보면 처음에는 ‘뒤숭숭하기 짝’이 없지만 청소를 끝내놓고 보면 ‘대대적인 조치로 안정을 되찾은 정국의 평화로움에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대적인 청소를 해도 알 수 없는 한 구석에서 먼지가 습을 만나 썩어가고’ 있을 것을 지적하며 현 정국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그것은 맞는 말일 것이다. 먼지와 습은 어디든 존재하므로 항상 유념하고 닦아내야 함을 청소라는 상관물을 통하여 깨우치고 있다.
<천 개의 바람이 되어>는 세월호 사건을 두고 우리 모두가 죄인임을 참회하고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세월호 사건은 내 잘못이 아니라 어느 누구 한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작가는 그것은 모든 기성인의 책임이고 어른의 책임이라고 참회하는 진정한 작가 정신을 이 글에서 보여 주었다. 이 두 작품은 정국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소리, 그 소리>는 여자의 일생, 여자로 살아온 일생을 소재로 하였다. 특히 소설 《82년생 지영이》를 읽고 여자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성적 불평등에 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그는 자신이 ‘지영이의 엄마이며, 내 할머니가 곧 지영이의 할머니의 전형’이라고 말하고 ‘분노하지 못한 분노가 정신을 갉아 먹는다’고 했다. 오늘날 미투의 확산은 곧 82년생 지영이의 외침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작품으로 인해서 작가의 말처럼 여자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정치와 사회의 부패와 불균형 부자유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작품은 일상을 소재로 했지만 단순한 일상이 아님을 웅변으로 말하고 있다.
(5) 존재에 대한 고민과 자아의 발견
수필은 자기 존재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출발하는 문학양식이다. 대상을 통하여 자기 존재 의미를 확인하고, 일상에서 존재를 확인하는 것도 수필 창작의 한 과정이고 그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모란은 오롯이 꽃으로 보아야 아름답다. 무궁화와 벚꽃까지 심어놓고 치열하게 논한다면 알력이 생겨 오류를 범할 수가 있다. 사람도 사람으로 볼 때 진정한 가치가 보인다.
모란 앞에 서면 오래 머물러 생각이 많아진다. 살아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시 살고 싶다. 그러면 모란의 향기 없음을 탓하지 않고 사람의 향기를 가늠하는데 서두르지 않겠다. 가식의 탈을 벗어 던지고 내가 진정이 되겠다. 선방의 여승이면 좋고 향기로운 모란이면 더욱 좋겠다. 후생에라도 꼭 한번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모란이 피었다> 중에서-
우리는 평범함 속에서 번뜩이는 존재감을 발견할 때 그 위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평범은 보통에 불과해서 예사롭고 개성도 색깔도 없다 말하지만, 내재한 힘이 터져 나오면 왕후장상도 고개를 꺾는 수가 있다. 유사시에는 그 위력이 존재감으로 하늘을 찌르는데 밤낮을 울리는 저 쩌렁쩌렁한 촛불의 함성과 동학군의 깃발이 그 좋은 예다.
-<보편적 가치> 중에서-
<모란이 피었다>에서는 ‘가식의 탈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나’를 지향하고 있다. 모란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있지만 모란은 진정 꽃으로 보아야 한다는 확고한 자기 인식을 가지고 후세에라도 모란과 같은 꽃이 되겠다고 자기 존재를 확인한다. <보편적 가치>에서는 개성도 색깔도 없지만 내재한 힘이 울려터지는 존재의 의미를 부각하고 있다. 이끼와 같이 진화하지 못한 존재라 할지라도 내재된 힘으로 민중의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존재에 대한 경외감을 드러내었다.
이 밖에도 <둥지를 트는 일은>에서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이 정한 가치 기준일 뿐 인간이 만든 안경을 벗어버리면 소중하지 않은 존재가 없음을 산까치의 둥지에서 발견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최명임 수필가는 그의 수필집 《언어를 줍다》를 통하여 그리움, 생태환경의 파괴에 대한 고민, 정치 사회 또는 세태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일상에서 깨닫는 삶의 지혜를 작품화하였고, 삶의 주변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을 통하여 수필문학의 문학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3. 돌에서 주워 올리는 언어의 아름다움
《언어를 줍다》의 형상화 과정을 정리하면 이렇다. 우선 인식의 과정에서 세심한 관찰, 독창적인 인식, 사고 과정의 논리성을 들 수 있다. 그의 작품에는 비유와 환유는 물론 의인화에 의한 소통이 발견된다. 이제 이런 과정을 조금씩 찾아보기로 한다.
(1) 보이는 것 너머까지 뚫어보는 철학적 시선
작가가 대상을 바라보고 인식할 때, 우선 오감을 통하여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그것이다. 그러나 감각에 의지한 대상의 인식은 그 허울만을 보기 때문에 독창성이 결여될 수 있다. 18세기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이며 철학자인 노발리스Novalis는 대상에 대한 상상력을 강조하면서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들리는 것은 들리지 않는 것에, 생각되는 것은 생각되지 않는 것에 닿아있다.’라고 일깨우고 있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삶의 총체적 지식 정보는 물론 작가의 삶의 철학을 투과해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외면에 그치지 말고 내면을 보아야 하며, 시공을 초월하여 불가시한 영역을 인식해야 한다.
인식의 과정은 관심에서 시작하여 관찰하고, 사랑하고, 대화하며, 대상과 소통과 공감을 이루어내야 그 곡절을 이해하고 자기만의 세계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학적 인식의 과정을 고려하면서 작품을 살펴본다.
한술 밥은 금방 배를 부르게 할 수는 없지만, 안도감과 함께 허기를 가시게 하는 마력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 내 혈관 속의 잡동사니들이 필터를 통하여 시나브로 걸러지고 푸른 핏빛이 온몸을 돌아 못다 채운 허기가 포만에 들리라. 시간은 짧고 가야 할 길은 아득한데 그곳에 가면 정겨운 이가 호롱불을 들고 서 있다. ‘그대를 위함’이라는 팻말을 달고 있다. 희망이라는 그를 사랑한다.
-<화해의 초대장> 중에서-
인간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졌음에도 진화하지 못한 생명이다. 끝없이 진화해온 인간은 흔적으로 공룡의 존재를 알아내었지만, 이끼는 숲을 누비던 공룡의 울음소리를 기억하고 있을 거다. 소멸과 생성의 틈바구니에서 첫 사람의 생겨남도 지켜보았고 첨예한 대립과 발전도 지켜보았으리라. 이끼를 바탕으로 숲이 생겨나고 꽃물은 선명해지고 나무는 더욱 높이 올라갔다. 이 아름다운 은화식물은 우울한 땅에서 사려 깊은 안목과 진중한 처세술로 빛을 발하고 있다.
-<보편적 가치> 중에서-
<화해의 초대장>에서는 한술 밥이라는 물리적 소재에서 안도감이라는 허기를 면할 수 있음을 발견한다. 물리적 허기감이 아니라 정신적 허기감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한술 밥’에서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는 그 너머의 것을 인식한 것이다. 그래서 한술 밥에 의하여 혈관에 흐르는 잡동사니들의 걸러내어 미래의 호롱불까지 보게 되는 것이다. 예순 번째 생일날 남편이 그간의 ‘독재’를 내려놓고 끓여준 미역국을 ‘그가 내게, 내가 내게 건네준 화해의 초대장’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보편적 가치>는 보잘 것 없는 초록 이끼를 보면서 생명의 근원과 인간의 위력과 존재감을 발견한다. 곧 ‘이끼를 바탕으로 숲이 생겨나고 꽃물은 선명해지고 나무는 더욱 높이 올라갔다’고 한다. 그렇게 비록 평범한 존재들도 내재한 힘이 터져 나오면 ‘왕후장상도 고개를 꺾는다’고 경계하고 있다. 그 예로 ‘촛불의 함성과 동학군의 깃발’을 들었다. 산중의 이끼나 초록 식물 그 너머를 발견한 것이다.
이 두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최명임 수필가는 대상의 그 너머를 천착하여 언어를 길어 올리는 철학적 시선을 가지고 관찰하고 소통하는 작가이다.
(2) 변증법적 사고의 과정
수필을 ‘체험의 기록’이라고 하는 말은 맞지 않는 말이다. 수필은 체험을 토대로 사색과 상상의 세계를 구현하는 문학이다. 문학적 상상력은 자발적인 존재생성의 동력으로서, 본래부터 인간의 내부에 잠재해 있다가 대상과 문학작품을 인식할 때마다 이미지의 형태로 존재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 이론가들은 문학적 상상력이 이루어지는 체계를 물질적 상상력, 변증법적 상상력, 역동적 상상력, 원형적 상상력 단계의 순서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수필문학에서 상상력은 대상의 물질적인 본질 추구에서 유추되는 인생의 반추와 성찰을 하는 변증법적 상상의 단계를 거친 다음 역동적 상상력 단계로 이어지게 된다. 역동적 상상력의 단계란 바람직한 보편적 가치세계를 찾아가는 창조적인 탐색과 승화와 초극의 의지를 갖는 단계이다. 다음에는 상상력의 최종단계라고 할 수 있는 보편적 진리의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원형적 세계에 이르게 된다. 다음 작품에서 이러한 상상의 단계를 확인해 보기로 한다.
㈎ 어머니의 손은 덕석같이 거칠다. 저승꽃이 만발했고 내어 준 것이 많아서인지 지문도 닳아 희미하다. 손바닥에는 어머니의 생애를 말해주듯 수 갈래 길이 나 있는데 주름살처럼 깊이 패었다.
㈏ 한 세기를 살아오신 어머니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눈물이 맺혔다. 아기가 움켜쥔 손을 놓지 않아 살그머니 벌리는데 힘이 만만치 않다. 열 달 내내 세상과 맞설 준비를 하였나 보다.
㈐ 자랑해도 흔쾌하게 수긍할 텐데 언제나 겸손하다. 그다지 부를 누리고 살아 보지 못 했고 빨간 딱지가 집안 곳곳에 붙을 만큼 험한 시간을 보냈어도 낙천적이다. 나는 그의 정직한 사고에 한 번도 토를 달아 본 적이 없다. 사람이 생각대로 한결같이 살 수 없지만, 그리 살고자 애쓰는 노력이 보이기 때문이다. 손이 그를 닮아서 불굴의 의지와 사람의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 변화무쌍한 세상을 향해 무소처럼 치닫지 않고 박쥐처럼 웅크리지 않고 천천히 우회하는 아름다운 저 손들이 세상 한 영역을 꾸려간다는 사실에 우리의 심장은 또 한 번 고동쳐야 한다.
-<손의 이력> 중에서-
<손의 이력>에서 어머니의 손과 자신의 손을 보면서 상상력을 이끌어가고 있다. ㈎는 어머니 손의 물질적 본질을 묘사하여 제시하였고, ㈏는 어머니의 일생을 반추하고 자신의 생을 돌아보는 변증법적 상상의 단계이다. ㈐는 ‘손이 그를 닮아서 불굴의 의지와 사람의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며 바람직하며 보편적인 삶의 가치세계를 찾아가는 역동적 상상의 단계이다. ㈑는 ‘손들이 세상 한 영역을 꾸려간다는 사실’을 깨닫는 원형적 상상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수필 작품이 대개 ㈑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에서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서 작가의 상상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수필이 수필다우려면 서사성과 서정성을 담는 것은 물론 철학적 사고과정을 거쳐야 한다. 수필은 개성적 문학이라고 한다. 이 말은 수필의 주관적 인식과 주관적 정서를 강조한 말이다. 그런데 수필은 보편적 진실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그렇다면 수필은 보편적 진실을 주관적 인식과 주관적 정서로 표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수필문학의 사색의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변증법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칸트의 철학을 계승한 헤겔은 인식의 대상은 반드시 모순이 존재하게 마련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떤 존재에서 모순을 발견하여 그것을 드러내어 인정함으로써 정正과 반反이 함께 통일된 진리인 합合을 구현할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통일된 진리를 절대 정신이라고 한다. 이러한 칸트의 이론을 수필에 적용시키면 감각단계와 지각단계, 절대정신의 단계로 생각할 수 있다. 감각적 이해단계에서 대상의 외면을 이해했다면 지각단계에서는 대상에 대하여 모순과 내면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사고 단계를 거쳐 종합적 총괄적으로 새롭고 항구적이 개념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단계를 헤겔의 변증법에 적용하면, 감각단계(正) 지각단계(反) 절대정신의 단계(合)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작품을 본다.
㈎ 손을 보면 그 사람이 대략 보인다. 수 없이 보아오지만, 그들의 삶이 다 다르듯이 느낌도 다르다. 손 전문 모델인 그녀를 보았다. 진정 그녀의 손을 두고 섬섬옥수라 하겠다. 30여 가지 화장품으로 관리를 하고 신주 모시듯 한다. 세모시같이 결이 곱기도 하지만 연분홍 살 색이 돋보인다. 꽃가지에 걸린 달처럼 긴 손가락 끝마다 반달이 걸려 있고 달빛을 머금은 손이 해맑기도 하다.
㈏ 그 손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순결한 아기의 손과 비교 할 수 없다. 기도하는 손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노동으로 다져진 손도 비할 데 없이 훌륭하다. 삶의 끈을 놓은 사람의 손도 보았는데 힘이 빠져버린 두 손은 창백하지만, 그리 편안해 보일 수가 없었다. 손도 그 사람을 닮아 텅 비어 있었다.
㈐ 사연 많은 그 손으로 술잔을 들면 주변이 울리도록 목소리가 우렁우렁해진다. 나는 그의 손을 우리 어머니 손과 사랑스러운 피아니스트 희아의 손 다음으로 꼽는다.
-<손의 이력> 중에서-
㈎는 아름다운 그녀의 손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묘사하였다. 보이는 그대로 감각단계라 할 수 있다. ㈏는 대상에는 어디나 존재하는 모순을 지적하였다. 지각단계라고 할 수 있다. ㈐에서 절대적인 손에 대한 영원불변하는 총괄적이고 항구적 가치를 종합하여 드러내었다. 절대 정신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의 과정은 작품의 품격을 한결 돋보이게 한다.
(3) 세심한 관찰과 비유적 묘사
수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상적인 이미지이다. 한국 전통수필이 현대화하면서 이미지의 인상적 표현은 점점 더 고급화되었다. 인상적 표현에서 묘사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최명임 수필가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세심한 관찰과 인상적 묘사를 다 설명할 수 없어 다음 몇 가지만 살펴보기로 한다.
촌로의 유일한 매물은 푸성귀 한 자루, 떡장수, 두부 장수, 바퀴벌레 약장수, 닭집에서 홰치는 소리, 뻥이요-. 왁자한 난장에서 쿵쾅거리는 맥박 소리가 허벌나게 들린다. 이 역동적 삶의 현장에 들어서면 거부할 수 없는 에너지로 살맛이 난다. 사는 재미가 없을 때 시장엘 가보라던 누군가도 덤으로 희망을 얻어 간 경험이 있을 거다.
-<마수걸이와 덤> 중에서-
지루함을 비껴가려고 장난을 했다. 막 캐낸 마늘이라 물기를 머금은 껍질이 두툼하다. 한 겹 벗겨보았더니 외압을 견뎌낸 겉옷은 결이 굵은 삼베옷 같다. 또 한 겹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홍조 띤 비단옷이 드러난다. 대여섯 겹 무리 없이 걸쳐 입은 옷을 다 벗겼더니 알맹이가 오종종히 머리를 맞대고 있다. 희한도 해라. 보석이라도 되는 양, 한 알 한 알 비단보에 옹차게 싸여 있다. 마지막 보자기를 풀어헤치니 아른아른 비치는 모시 한 겹이 휘장을 치고 있다. 그마저 열고 보니 막 목간한 아기의 속살같이 반들반들하고 포동포동한 알맹이가 나온다. 달처럼 뽀얀 살결에 생김도 오달지다.
-<일해백리하다기에> 중에서-
마늘각시는 왜 열두 대문을 닫아걸고 비밀도 아닌 것이 비밀에 싸여있을까. 본질은 내밀한 방보다 더 깊은 곳에 감춰져 있는 법, 가아假我의 껍데기를 수백 겹 벗겨나가다 드디어 ‘나’를 만난 웅녀의 명답이다. 속인의 물듦에서 벗어나지 못한 호랑이도, 나도 찾아내지 못한 구중궁궐 속에 숨어있는 환심장할 진아眞我의 자태이다. 인고의 세월이 겁을 이루면 그때는 나도 나를 알아보려나.
-<일해백리하다기에> 중에서-
박문수의 마패처럼 걸레를 쓱 내밀었더니 구석구석 부정한 것들이 드러나 주위를 환기한다. 집 안이 씻은 듯 부신 듯 청정지역이 되었다. 기분이 상쾌하다. 촛불집회가 절정에 달했을 때, 탐관오리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때 국민들이 맛보았던 통쾌, 명쾌, 상쾌와 상통하지 않을까.
-<ooo님 귀하> 중에서-
봄비는 시샘인가, 사랑인가. 꽃대를 잡고 흔들다가 앵 토라진 얼굴로 눈을 흘긴다. 또 어느 때는 꽃잎을 향해 얼굴 붉히며 야릇한 눈빛으로 구애를 한다. 어설픈 객기는 삼각관계일지언정 그중에서도 독보적이 되고 싶다. 턱에 거뭇거뭇 거웃 나고 몽정을 치른 사내 녀석처럼 얄궂다. 봄비는 사랑인가?
-<봄비는 얄궂다> 중에서-
<마수걸이와 덤>은 시장의 모습으로 인상적으로 묘사하였고, <일해백리하다기에>는 마늘 까는 과정을 환상의 세계로 그려내고 있다. 이런 묘사는 환상적 비유라 할 수도 있고 일종의 환유적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환상적 묘사라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다음 부분은 마늘을 설화적으로 비유 묘사하여 매우 인상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님 귀하>는 세태에 대한 풍자적 묘사이다. 작품의 주제에 따라 이와 같이 묘사와 비유의 방법은 적절하게 달라질 수 있다. <봄비는 얄궂다>는 의인법을 통하여 대상을 선명하게 드러내었다.
(4) 다양하게 주워 올린 우리말 어휘
문인은 모국어를 지키고 보존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최명임 수필가는 고유어, 방언, 예스러운 말들을 찾아 살려내는 작가이다.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아름지더니, 옴포동이, 가멸찬, 바글거린다, 삐질삐질, 때깔, 난전, 윤슬, 자그락거림, 황소바람, 말똥싸지, 웅숭깊다, 미맹, 새뜻하다, 구중중하다, 오종종, 뭉근하다, 꼭뒤, 흥감스레, 매칼 없이, 불각시리, 흥감스럽다. 뙈기, 그미, 덜퍽지다, 단바람에, 미쁘다, 실팍한, 행우지, 얼척 없는, 흐벅지다’
이루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렇게 고유어나 방언 같은 어휘를 살려 쓸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이 문장의 자연스러움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사라져가는 우리말 어휘를 되살려 쓰는 중요성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지만 문장의 자연스러움도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
4. 휘갑치기
최명임 수필가는 노력하는 수필가이다. 독서량이 많고 쉬지 않고 습작을 하며 끊임없이 사색하는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흔히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요건으로 말하는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하는 수필가이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수필가로 문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수필 전문지에 자주 눈에 띄는 문제 작가로 알려져 있다.
수필은 서구 문학 양식인 에세이와는 다르다. 수필은 신라시대 기행수필인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에서 발원하여 고려에 이르러 이곡, 이규보 등의 수필로 발전하였다. 우리 민족에 의하여 자생된 우리의 문학인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조선시대의 교술성이 많이 감소되고 서정성과 서사성이 균형을 이루면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어 재미와 감동을 함께 얻을 수 있는 수필의 한 맥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우리의 전통수필이 아닌가 한다.
최명임 수필가의 《언어를 줍다》에 수록된 49편의 작품은 작가를 비롯한 보편적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그리움의 대상을 바위처럼 단단한 일상에서 샘을 뚫어 길어내고 있다. 그 그리움은 과거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고, 밝은 세계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고 따뜻한 인간애를 지닌 삶일 수도 있으며, 인간 존재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다. 그의 그리움은 그의 논리적 사색을 통하여 서정과 서사의 균형을 이루며 독자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서고 있다.
21세기는 읽을거리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다. 그래서 쉽게 다가오지 않는 글은 그것이 금과옥조라 할지라도 외면당하기 쉽다. 독자에게 조금 더 쉽게 다가설 수 있는 가벼운 발걸음을 권하고 싶다.
수필문학을 함께하는 인연으로 이 글을 쓰면서 좋은 그림에 사족을 붙이는 것 같아 두렵기만 하다. 더욱 정진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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