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느림보의 山城 山寺 찾기

47. 옥천 삼양리토성

느림보 이방주 2017. 6. 1. 14:36

옥천 삼양리토성

 


 

오늘은 그동안 벼르던 옥천읍내 낮은 야산에 있는 삼양리토성, 삼거리 토성, 서산성을 답사하기로 했다. 날씨는 참 좋다. 아내는 마침 옥천에서 열리는 생활체육테니스대회에 12일로 참석하였다. 아들이 모처럼 산을 가고 싶어 했지만,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옥천 마을 낮은 산이다. 그래도 지난번 마성산성 답사 때 힘들어하던 아비가 걱정되었는지 운전을 해준다고 한다. 고맙다.

옥천 시외버스 터미널에 주차하고 삼거리 쪽으로 갔다. 옥천에 가면 신혼 초에 여기 살았던 둘째 누님이 생각난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기억에 너무나 또렷한 누님이 가슴 저리도록 그립다. 아들에게 고모 이야기는 나에게 백제와 신라 이야기만큼이나 아득할 것이다. 그러나 대학 본고사를 보러 서울에 갔을 때 어린 조카에게 따뜻한 국을 끓여 먹여 보내던 고모를 잊지는 않을 것이다.

삼양리토성, 삼거리토성, 서산성은 지난번 답사했던 관산성, 용봉산성, 동평산성, 마성산성이라는 산성 고리 끝자락에서 갈라진 세 갈래 산성이라고 보면 된다. 세 갈래로 갈라져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인 이 곳 고을을 드나드는 사람과 우마차를 경계했을 것이다. 용봉산성이나 마성산성이 원거리 경계용 산성이라면, 삼양리토성, 삼거리토성, 서산성은 고을 안에서 근거리를 경계하는 진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옥천이라는 작지만 중요한 고을을 방어하는데 관산성의 부속된 성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을 것이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삼거리 쪽으로 가다가 가게 주인에게 삼양리토성에 대하여 물으니 잘 알지 못한다. 옥천 신문에 실린 향토 사학자 조일권 씨의 답사 결과 보고에 의하면 이정표도 없고 토성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고 한다. 옥천에서 살아본 일이 없는 나로서는 막막하기만 하다.

이리저리 마을을 기웃거리다가 옥천 신문 답사기에서 일러준 대로 삼양리 오른쪽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갔다. 고구마 밭과 들깨 밭을 지나 김장용 배추와 무를 심은 비얄밭을 지나니 토성의 모습이 뚜렷하다. 토성은 뚜렷하지만 철조망을 설치해 놓아서 마음 놓고 들어갈 수가 없다. 넘어 들어갈 수 있었지만 어떤 목적으로 철조망을 쳤는지 알 수 없으니 함부로 넘을 수도 없다. 철조망을 몇 차례 넘나들며 올라가니 이번에는 잡목이 우거져 있고 낙엽에 덮여 길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더 이상 올라갈 수가 없다. 성벽으로 보이는 둔덕으로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겨우 몇 걸음 옮겼다.

올라간 길을 내려와서 마을로 들어갔다. 이 마을은 어떤 역할을 하는 마을이었기에 성으로 감싸 안았는지 기록에도 없다. 아주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찾으니 찾을 수가 없다. 마을 주민에게 물었더니 밭 끄트머리를 가르쳐 준다. 아직 채소나 곡식을 거두어들이지 않은 텃밭 고랑을 밟고 산으로 올라가도 아무도 말하는 이가 없다. 산밤은 어디나 지천이다. 삼양리토성이 남쪽에서 동으로 돌아 가다가 고속도로에 의해 끊어지고, 예전에 북쪽으로 돌아내렸을 법한 산줄기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마을이 있다. 마을은 제법 살기가 괜찮아 보인다. 그러나 밭에서 일을 하는 이들도 삼양리토성을 알지 못한다. 외지에서 들어와 산다는 것이다.

산의 초입은 온통 검은 돌덩이가 널브러져 있다. 돌덩이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다. 거미줄이 얼굴에 마구 휘감는다. 역사의 거미줄은 누구를 얽어 구속해 왔을까? 성의 흔적으로 보이는 둔덕이 보인다. 주변에 성곽 같은 돌무더기가 있어 순수한 토성이 아니라 석축과 토성의 혼축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기록에는 토성으로만 나와 있다. 돌무더기가 여기저기 보이는데 자연석으로 보이기도 하고 깎아 만든 느낌도 든다. 하긴 사람의 손길조차도 세월이 지나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토성도 이미 성벽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잡목이 우거지고 오솔길이 생겼으니 천오백년 세월은 사람도 다 자연으로 되돌리는 것인가 보다.

길은 아주 짧았다. 마루에 오르니 마을이 다 내려다 보였다. 이 마을이 당시에 어떤 역할을 했기에 성이 필요했을까. 이 마을의 앞에는 대전으로 향하는 구도로가 있고 삼거리에서 서쪽 부여로 향하는 성왕로가 있다. 동으로는 보은으로 가는 도로가 있어 명실상부 사거리이다. 그러니 여기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얼마나 요새로 여겨질 것인가? 삼거리를 건너 관산성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뚜렷하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북쪽으로 더 가면 만나는 서산성과 함께 신라에서 올라오는 군사를 겹겹이 막고 공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관산성에서는 숯고개(탄현)으로 공격하는 군사를 방어하고, 서산성과 함께 북쪽 즉 문의나 회인 쪽으로 올라가는 길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삼양리토성은 둘레가 500m쯤 된다고 한다. 보기에 작은 성이지만 당시에 이만한 토목 공사를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인력을 동원했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인력으로 흙을 모으고 등짐으로 져다가 널빤지를 대고 흙을 다져가면서 이런 둔덕을 쌓으려면 지역의 백성이 몇 해를 두고 부역賦役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옥천의 기름진 옥토를 그냥 묵히고 일하지 못하는 겨울에는 앉아 굶어야 했을 서민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봄이 되어 산으로 풀뿌리를 캐고 송기를 벗겨 연명하다가 또 공사장으로 끌려 나갔을 것이다. 그들의 고통으로 옥천은 온통 산성 천지이다. 옥천이라는 소도읍을 차지하기 위한 권력의 횡포가 오늘에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일까. 지금은 그런 황당한 권력이 없을까. 역사는 그들을 응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까. 산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옻나무 등걸을 헤치고 다시 마을로 내려 왔다.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아람 몇 알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산밤은 배낭에 하나 가득 넣을 만큼 널브러져 있다. 나는 두어 개만 맛보면 된다. 그건 내 것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 소유이든지 아니면 다람쥐들의 양식이다. 내 것으로 만들려는 억지나 죽어도 나누어 먹지 않겠다는 탐욕이 성벽을 만든다. 옥천은 그런 권력자들의 탐욕스런 싸움터가 되고 이 고장 사람들은 그런 강자들에게 피해를 보며 살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지역이다. 이 고장 사람들이 이제라도 권력자들의 피해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위치 : 삼양리 시외버스터미널과 고속도로 사이의 작은 능선 (해발 140m)

시대 : 삼국시대(백제계성)

형태 : 포곡식 토축산성

규모 : 둘레 약 500m

답사 : 2011109(함께 간 사람 :아들 이용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