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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장령산 용암사 해맞이 수행

느림보 이방주 2017. 5. 31. 19:56

장령산 용암사 해맞이 수행

 


 

몇 해 전 관산성과 용봉산성, 동평산성, 마성산성을 다 답사하고 장령산 산줄기를 타고 삼청리 저수지 쪽으로 내려왔으면서 용암사를 가지 못했다. 당시에는 폐렴으로 입원했던 몸이 다 여물지 않아 6시간 30분밖에 안 되는 산행에 다리가 휘청거렸다. 장령산 그림자가 내리는 삼청리 저수지에서 용암사 쪽만 바라보다가 경찰 순찰차를 만나서 얻어 탔던 기억이 난다. 그 뒤 용암사를 마음에 걸어 놓고 살았다.

소한인데도 추위가 약간 누그러졌다. 이날 아침 옥천 장령산용암사를 생각해냈다. 장령산은 오르지 못하더라도 용암사만은 다녀오리라. 빵 한 덩어리를 사서 차에 싣고 내비에 용암사를 치고 출발한다. 서청주 나들목으로 들어가 회덕을 지나 대전 시내를 벗어나니 바로 옥천 나들목이다.

삼청리 저수지를 지나 산문에 이르니 겨울 가뭄 속에서도 길가에 눈이 남아 있다. 움푹 패어난 곳에는 눈이 얼었다. 가풀막진 길은 올라갈수록 눈이 얼어붙었다. 전에 타던 무쏘가 또 생각났다. 연약한 승용차는 마지막 오르막길에서도 힘겨워 걀걀거리지는 않았다.

오를수록 절경이다. 저 앞에 성벽 같은 축대가 떡 막아서는가했더니 거기가 그토록 궁금했던 용암사이다. 대숲 우거진 곳에 주차장이 있다. 물이 흥건하다. 극심한 겨울가뭄 속에서도 여기는 건수가 터졌다. 축대 밑에서 맑은 물이 자비처럼 솟아오른다. 절집에서 나오는 물은 부처님이 중생에게 내려 보내는 자비처럼 맑고 깨끗하다. 사찰은 아주 고요하다. 승방은 자물쇠가 걸려 있다. 성벽 같은 축대 사이로 돌층계를 올라서니 앞에 대웅전이 웅장하다. 단청이 화려하여 오래된 건물 같아 보이지 않았다.

용암사는 원래 신라 때 창건되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번성하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서 명맥만 유지해 왔다고 한다. 아마도 여기 쌍삼층석탑과 마애불 덕분에 그나마 명맥이 유지 되었을 것이다. 대웅전은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단청이 화려하고 웅장해 보였다.

법당 문을 조용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스님도 신도도 없다. 하긴 오후라 예불 시간도 지났다. 불상도 거룩하고 배면 탱화도 아름답다. 아무도 없어 사진을 찍고 싶은 유혹에 마음 졸였다. 그러나 천지天知, 지지地知, 아지我知, 자지子知란 말이 있다. 세상에 아무리 비밀이라 해도 넷에게는 감출 수가 없다는 말이다. 본존불 배면 탱화는 괘불이 아니라 아마도 목각 부조 위에 금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가방을 내려놓고 모자를 벗고 카메라도 내려놓고 아주 조용히 삼배를 올렸다.

임진년 난리를 맞아 불에 타 사라지는 부처님을 상상하니 마음이 뻐근하였다. 용암사가 겪은 왜란은 한 번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절 안에 있는 용바위를 깨부쉈다고 한다. 속속들이 계획적이고 목적이 악랄하고 치졸한 일인들로서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절을 불태우고 용암을 깨고도 남겨 둔 것은 쌍삼층석탑이다. 아마 후환이 두려워서 훼손하지 못했을 것이다. 용암을 깨고 절을 불태운 목적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훼손하는 것 그것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 이후의 우리 민족에게 정신적 좌절감을 심어주려고 했을 것이다. 용바위가 민족의 안위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깨어버리고 좌절감에 빠뜨리는 악랄한 행위 말이다. 결국 언젠가는 신의 노여움이 그들에게 미칠 것이다.

대웅전을 나와 마당에 내려섰다. 해토머리는 멀었는데 마당이 질척거린다. 정초 해맞이 명소라 다녀간 사람들의 온기가 언 땅을 녹였다. 탁 트인 옥천 고을이 가슴 속까지 후련하게 한다. 동으로 저 멀리 보이는 속리산 자락에서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겠지. 희끗희끗한 산안개 속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듯하다. 정월 초하루 태양이 옥천 너른 들판을 붉게 물들일 것이다. 새해 첫날의 태양이나 다른 날의 태양이나 마찬가지라면 여기 스님들은 날마다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있을 터이니 과연 그것만으로도 수행은 충분할 것이다. 신라와 백제가 소유를 수없이 주고받은 곳이 바로 옥천 땅이다. 이름조차 옥천인 이 비옥한 땅을 쉽게 내줄 수 없었을 것이다. 식장산 남쪽 옥천 땅은 주인이 밤낮으로 바뀌어 백성들은 주인을 종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옥천 사람들은 누가 의견을 물으면 글쎄유…….’ 한다는 우스개도 있다.

법주사보다 1년 먼저인 진흥왕 13(552)에 창건했다니 성왕과 무한경쟁을 하면서 이 땅을 지켜줄 것을 부처님께 발원하려고 용바위가 있던 이곳에 절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백제 성왕도 진흥왕에게 딸을 주어 사위를 삼고도 옥천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이곳을 차지해야겠다는 야심을 굳혔을지도 모른다. 권력욕은 딸도 사위도 장인도 눈을 가리는데 하물며 백성의 행복이 안중에나 있었으랴.

범종각에 가 보았다. 범종각도 다시 세운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종의 표면에서 아직도 쇳내가 날 것만 같다. 연꽃 자리에 앉아 구름을 타고 허공으로 오르는 보살의 합장 기도가 간절하다. 종소리는 얼마나 멀리 퍼져나갈까? 아마도 불국토 건설에 대한 꿈의 크기만큼 퍼져 날아갈 것이다.

범종각 옆에 용왕각이 있었다. 용신을 모시는 전각이다. 다른 절에는 없는 전각이다. 감로수가 바로 옆 바위틈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른바 용천이다. 일제에 의해 깨뜨려졌다는 용바위는 어디에 있는가? 살펴보니 골짜기가 커다란 한 마리의 용의 모습으로 보였다. 대웅전이 있는 곳은 용의 가슴이고 용천이 솟아나는 곳은 심장이 아닐까 한다. 대웅전 바로 위에 마애불을 그려 모신 바위는 용이 머리를 치켜들고 하늘로 오르려는 형상에 비유할 만하다. 용천은 물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깨끗한 물이 바위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른쪽 요사채를 돌아 올라가서 자연 암반 위에 세워진 쌍삼층석탑을 만났다. 큰 바위 아래 보물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다. 보물 1338호라고 한다. 암반에 비해 규모가 크지는 않다. 바위에 올라 석탑 가까이 가 보았다. 크기는 비슷하다. 그러나 조금 차이가 난다. 동탑은 430cm, 서탑은 413cm라고 하니 큰 차이는 아니지만 어떤 의미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탑은 대웅전 앞에 나란히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탑은 대웅전 왼쪽에 세웠다. 이것은 자연적 풍수에서 부족한 것을 석탑으로 보충하는 산천비보법에 의한 것이라 한다. 그러고 보니 대웅전을 중심으로 우청룡에 비해 좌백호가 훨씬 미약하다. 그 미약한 산줄기를 쌍탑으로 보충한 것이다. 문의 현암사도 대웅전 왼쪽 나지막한 산줄기를 탑으로 보충한 것을 볼 수 있다. 삼층 석탑은 아주 오래 되어 용암사의 희비를 다 내려다보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 부흥군의 패망, 통일신라의 멸망, 임진왜란 등 그 이후의 민족의 어려운 일을 다 보고 있었을 것이다.

쌍삼층석탑에서 왼쪽 산줄기를 타면 장령산으로 가는 등산로이다. 오늘은 용암사로 만족한다. 우선 마애불을 보아야 한다. 마애불쪽으로 길이 나 있지만 철조망이 있다. 대웅전으로 다시 내려와서 천불전을 지나 마애불로 갔다. 마애불은 창건 당시의 작품이 아니라 신라말이나 고려초의 작품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에 이곳에서 신라가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하면서 슬프게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의태자의 슬픈 모습을 작품화했다고 한다. 사찰에서는 지금까지도 마의태자상이라고 한다. 마의태자는 덕주공주와 함께 하늘재를 넘어와 월악산 아래 덕주사에서 머물렀다는 전설도 있으니 둘 중 하나는 진실이 아닐 수 있다. 마애불은 연좌를 작은 발로 디디고 서 있다. 얼굴은 작고 귀가 아주 크다. 작은 눈, 다문 입술, 미소는 없다. 대부분의 마애불이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것과 달리 미소가 없는 것으로 보아 마의태자의 슬픔을 이야기 할만도 하다. 늘어진 옷자락의 선이 섬세하다. 그런데 몸 전체로 보아 아랫부분은 바위빛이 붉다. 붉은 빛깔이 불상을 자연적으로 화려하게 보이도록 꾸미고 있다.

산신각을 그냥 지나 천불전으로 내려왔다. 천불전은 들어가지 않고 벽화만 보았다. 마침 부처님의 열반 모습의 그림이 있어 한 참을 쳐다보았다. 오열하는 제자들의 모습에 비해 부처님의 모습은 아주 편안해 보였다. 죽음은 그렇게 편안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열반에 드시는 부처님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발원의 깊이만큼 합장의 간절함도 깊어질 것이다. 소망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룸의 씨앗이다.

용암사는 장령산의 끝자락에 있다. 장령산 끝자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대웅전은 무슨 의미일까? 장령산은 옥천읍 한 가운데 삼성산으로부터 용봉, 마대산을 거쳐 옥천을 싸잡아 안고 있는 산이다. 이 산은 신라와 백제 사이의 국경과 같은 산줄기이다. 장령산 끝자락에서 아스라한 동녘을 바라보는 대웅전은 신라를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최후를 맞음으로 삼한일통의 경쟁은 진흥왕의 승리로 끝이 났다. 신라는 옥천의 너른 땅을 차지하게 되었고 백제는 성왕이라는 성군을 잃고 왕권이 땅에 떨어졌다. 그런 안타까움을 담아서 옥천 사람들이 장령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내면을 잘 보이지 않는 옥천 사람들이 백제에 더 많은 정을 가졌는지 신라에 마음을 두고 있는지는 '글쎄유-'이다.

산을 내려오노라니 장령산 긴 산 그늘이 벌써 길을 가렸다. 삼청리 사람들은 마의태자의 울음소리가 들리는지 마는지 마을은 고요하고 저수지에 비친 노을은 곱기만 하다.

 

 

 

장용산 용암사

위치 :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청리 478

역사 :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말사.

천축국(天竺國)에 갔다 귀국한 의신조사(義信祖師)552(진흥왕 13)에 창건

문화재 : 쌍석탑 : 보물 1338(2002312일 지정)

마애불 :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7(19761221일 지정)

답사일 : 201616일 오전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