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성 전투의 배후 옥천 성치산성
옥천에 있는 중요한 산성들을 돌아보았는데 성티산성을 답사하지 못해 늘 숙제처럼 안고 다녔다. 길눈이 어두워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용기를 냈다.
성티산성은 말등산과 성재산 사이에 포곡식으로 쌓은 석성이다. 서쪽에 성치산이 있어 성치산성이라 부른다. 그렇게 부르면 대전시 동구 찬샘 마을에 있는 성치산성과 혼동되어 성티산성, 혹은 옥천 성치산성으로 부르겠다.
6월 날씨답지 않게 30도를 넘는다. 물과 점심으로 먹을 빵 한 조각을 챙기면서 쓸데없이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산성에 가기 전에 느끼는 엷은 공포감이다. 핸드폰 여벌 배터리, 칼과 라이터까지 챙겨 넣었다. 멧돼지의 공격을 받거나 무너지는 성석에 다리를 끼어 의식을 잃어버리면 어이없이 끝나게 된다.
경부고속도로 옥천 나들목으로 나가서 군서면 우리 손자 규연이 연재 외가 마을인 아름다운 동평리를 지나 상지리 정자나무 아래 차를 댔다. 유월의 볕이 옥천 들판에 바늘을 쏟아 붓듯 따갑다. 개천을 건너는데 다리 아래서 어떤 50대 초반 여인이 다슬기를 줍고 있다. 성티산성을 어디로 가냐니까 무슨 산성이 있냐고 되묻는다. 마을 사람들도 산성의 존재를 잘 모른다. 여성들은 이곳에서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은행리 쪽으로 걸어가다 산성이 있는 산기슭에 있는 수렛길을 따라 올라갔다. 그런데 묘소에 입석공사를 하느라 경운기가 올라간 길이었다. 산소를 지나치자 길은 없어졌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올려치는 것이다. 2km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깎아 비탈 오르막이라면 더 걸릴 것이다. 그래도 올려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다행히 리기다소나무 아래라 잡초가 없었다. 청미래 덩굴도 산초나무도 없다.
땀이 엄청 난다. 가뭄에 바짝 마른 활엽수 낙엽에서 나오는 먼지 때문에 기침이 자꾸 난다. 생각해 보면 기침도 참 좋은 효과를 낸다. 마을까지 내려오는 멧돼지도 사람의 기침 소리나 쇳소리를 들으면 제가 먼저 피할 것이다. 날망을 하나 지나 내리막길을 조금 내려서니 고갯길이 보였다. 아마도 은행리와 상지리의 연결 고갯길인 것 같다. 아니면 명경저수지에서 성으로 올라오는 길인가 보다. 요즘은 야산의 제왕이 된 멧돼지들이 사람이 다니던 길을 다닌다. 멧돼지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은 옛 이야기이다. 다시 가파른 길을 따라 오른다.
산행 들머리부터 짖어대던 까마귀는 아직도 짖어댄다. 어디서 낙엽 밟는 소리가 난다. 사람인가? 그 때 기침이 나왔다. 망설이다가 일부러 큰 소리로 기침을 했다. 온갖 두려움이 기침을 통해서 밖으로 튀어 나가는 기분이다. 내친김에 옛날 아버지가 새벽기침 하시듯이 가슴에 온갖 탐욕과 두려움을 응어리로 만들어 크게 토해 버렸다. 가슴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던 시인 김수영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탐진치貪瞋癡를 다 내품어 버리니 사방이 고요하다. 모든 건 마음에서 이는 것이다. 까마귀가 아무리 악을 쓰며 짖어대도 나는 산을 오른다. 까마귀는 나를 보고 짖는 것일까,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짖어대는 것일까. "까왁까왁" 악을 쓰며 짖어댄다. 영물에게는 귀신도 보이겠지만 나도 까마귀 소리쯤은 넘어설 수 있다.
이쯤에서 SNS 가족사랑방에 글을 올렸다. ‘성에 간다. 여기는 옥천군 군서면 상지리와 은행리 사이의 성티산성이다.’ 딸에게서 금방 답이 온다. "날도 더운데 조심하셔요." 곧이어 바로 이곳이 고향인 며느리가 답을 보냈다. "조심하세요." 가족이 든든하다. 참 세월 좋다. 사이버공간의 가느다란 줄이 내게 동아줄이 되었다.
나무를 잡고 몇 걸음 올라갔다. 그때 활엽수 사이에서 성벽이 보였다. 찾았다. 아마도 남문지인 것 같았다. 무너진 돌무더기를 누군가 다시 쌓아 올렸다. 성벽 아래는 옛날 그대로 견고한데 윗부분에 돌을 덧얹었다. 예비군 초소 같다. 견고하게 남은 부분을 보니 돌의 크기가 상당하다. 작은 것은 가로 38cm,세로 25cm 정도 되고 큰 것은 가로 70cm 정도 되면서 정사각형인 것도 있다. 돌은 다듬어 썼는데 연한 활석으로 보였다. 스틱 끝으로 돌에 그어보니 줄이 그어진다. 이런 돌이 어떻게 천년을 버티었을까?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 흙에 묻혔다. 성벽을 따라 동쪽으로 돌았다. 언뜻 보면 성벽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땅 속으로 들어갔다. 심하게 비탈져서 발을 옮길 때마다 미끄러진다. 나무 등걸을 잡고 겨우 균형을 유지한다. 북벽은 성곽의 윤곽이 뚜렷하다. 나무와 흙에 묻힌 성벽에서 성석이 삐죽삐죽 나왔다. 이곳은 지표를 조사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험한 성벽 아래로 내려가서 성벽을 짚으면서 돌아보았다. 날이 가물어 뱀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아 맘을 놓았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흙을 걷어내기 전에는 별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아 다시 성벽 위로 올라왔다.
말등산 정상 부근이다. 나무들 사이로 기름진 옥천 땅이 보인다. 은행리 금산리 쪽은 비닐하우스가 꽉 들어찬 들판이다. 내가 지나온 옥천 삼양리 삼거리에서 성왕사절지가 있는 월전리, 동평리 그리고 주차한 마을인 상지리에서 마전 추부 금산으로 이어지는 성왕로가 한 눈에 들어 올 듯하다. 관산성이라 알려진 삼성산성 용봉산성 동평산성 마성산성이 있는 산줄기와 대전 남부의 식장산에서 뻗어 내려온 옥천 북부 산줄기가 마주 보고 있다. 마주본 두 산성의 띠는 때로 함께 성왕로를 지키기도 했을 것이고 때로 대적할 때도 있었으리라.
관산성 전투의 주무대가 마성산 줄기에 있는 네 개의 산성과 옥천 동북부의 환산성이었다면 성티산성은 전투의 배후가 되는 산성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성은 둘레가 400m에 못 미치는 작은 포곡 산성이지만 성의 위치가 매우 높고 대전 동남부의 삼정리 산성, 갈현성, 능성의 산성이 이어진 줄기를 하나의 성으로 친다면 성티산성은 성왕로 쪽으로 툭 튀어나와서 마치 치성과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정상에서 다시 남문 쪽으로 내려왔다. 남문지에서 서쪽 성벽으로 돌아가다가 보니까 골짜기에 널찍한 공터가 나왔다. 정상에서 성벽이 동남쪽 능선을 타고 내려가고, 또 한 줄기는 서남쪽 능선을 타고 내려갔는데, 그 사이 골짜기 삼태기 같은 안에 건물이 있었나 보다. 건물지라 생각된다. 아마도 저수할 수 있는 시설이나 우물도 있었을 것이다. 남문지에서 서쪽 성벽으로 약간 안으로 구부러들면서 구릉에 있는 성벽이 온전하게 남았다. 무너진 성벽의 돌무더기를 밟고 허겁지겁 살아남아 있는 성벽으로 다가갔다. 그러다가 돌이 움직여서 다리가 끼일 번했다. 조심해야 한다. 돌 사이 낙엽 속에서 갈색으로 변장한 살모사가 튀어 나올지 모른다. 여기서 일을 당하면 난리가 날 것이다. 방송에도 나올까? "충북수필회장을 지낸 충북의 수필가 이방주가 산성답사를 하다가 살모사에게 물려 그 자리에서…." 생각만 해도 창피하다. 장관후보자가 짝사랑하는 여인의 도장을 파서 몰래 혼인신고를 한 이야기보다 더 창피하다. 성에 기어오르다가 떨어진 것도 아니고 뱀에게 물리다니 망신이 아닌가. 그러니 조심하자. 서두를 일이 아니다. 찾은 성이 도망갈 일도 없고 1500년 버틴 성곽이 금방 무너질 리도 없지 않은가?
성벽은 22단 정도가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성돌의 세로는 대충 45cm 정도 되었다. 남은 성벽의 높이는 8~9.5m 정도 된다. 돌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일정하지 않은 돌을 맞추어 정교하게 쌓았다. 여기에 놀랄만한 것은 수구가 원형대로 남았다는 것이다. 먼데서 보면 두 개의 수구가 마치 눈을 번쩍 뜨고 부라리며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성벽을 기어 올라가 수구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수구의 깊이는 70cm정도 되는 정방형이다. 성돌이 가로 5개 정도 되어 보이고 세로는 두 겹으로 세로쌓기를 하였다. 깊이가 꽤 깊어서 4m는 충분히 될 것 같았다. 아마도 성의 내부에 저수시설과 통해 있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바로 계곡으로 물이 떨어졌을 것을 생각하니 기막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수구를 암문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수구의 크기가 커서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부분에서 보니 밖은 돌로 견고하게 쌓아 올리고 안은 흙으로 메운 외축내탁법으로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성석은 약간 붉은 빛과 황색을 띠는 활석이었다. 성석을 다듬기는 화강암보다 쉬웠을 것이다. 성벽의 너비가 4m나 되기 때문에 크기는 작아도 견고한 성이다. 성의 모습도 정상부에서 산줄기를 따라 포곡식으로 쌓고 성벽 가운데를 이어서 필요에 따라 포곡식과 테메식 축성법을 겸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남문지로 올라와 은행리 쪽으로 하산하였다. 올라오는 길에 많지 않던 멧돼지 흔적이 엄청나게 많다. 내려오는 길을 따라서 방금 지나가며 주둥이로 낙엽을 헤집어 놓은 것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방금 지나간 자리이다. 아직 도토리가 남아 있나. 점심거리를 찾으려고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 녀석들이 두렵고 저 녀석들은 내가 삶의 영역을 침범한 훼방꾼으로 보일 것이다. 그놈들은 성을 쌓을 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성을 쌓아 적을 방어한다. 까마귀 울부짖음은 언제 그쳤는지 모른다. 온 산이 고요하다. 아랫마을에서 염불소리가 들려온다. 염불소리 때문에 까마귀가 짖기를 그쳤을까. 산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길을 막아 울타리를 쳤다. 출구를 찾을 수 없다. 멧돼지나 고라니의 훼방을 가로막기 위해 개바자를 쳤다. 현대판 성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연과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누가 이길 것인가. 사람이 이기면 자연이 무너지고 자연이 이기면 인간이 멸종되겠지. 결국 다 망하는 것이다. 공존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가뭄은 온 들판을 말려 버렸다. 수로에도 물이 말랐다. 논에는 물이 괴어 있으나 밭에서는 단내가 난다. 상지리 마을까지 오는데 달구어진 길이 품어대는 열기가 온몸에 불을 지피는 듯하다. SNS 가족사랑방에 ‘하산 끝’을 보고했다.
상지리 마을 유래비 앞 정자나무 아래에서 물을 마시고 준비해 간 빵으로 점심을 먹었다. 내가 앉아 있으니 마을 노인들이 다가와서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사람은 63세라 했고 한 분은 7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63세인 사람은 성티산성에 대해 이야기만 들었다 하고, 70대 노인은 나무하러 가서 보았다고 한다. 그렇게 멀리까지 나무를 하러 갔었냐고 하니까 예전에는 그랬다고 한다. 수구가 있는 것도 정확하게 알고 있고 옛날에 전쟁할 때는 성벽을 기어 올라가고 위에서 돌을 던지고 했다는 것까지 상상해서 설명했다. 다만 수구를 굴이라고 표현해서 내가 수구라 하니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그 안으로 사람이 드나든 곳이다'면서 큰 소리를 했다. 주민들은 자기 지역의 문화유적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문화와 지역 역사를 제대로 알려 긍지를 갖게 하는 것도 고향 사랑의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논쟁을 해도 내가 이기지 못할 것 같아 가뭄 이야기를 했다. 옥천을 거쳐 경부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를 되짚어 돌아왔다. 후련하다.
▣ 위 치 : 군서면 은행리 상은부락 서쪽 말등산 정상(해발 342m)
▣ 형 태 : 포곡식 석축산성 내탁외축식
▣ 규모 : 둘레 약 400m, 높이 낮은 곳은 1.8m, 남아 있는 곳은 6~8m, 너비 4m
▣ 시 대 : 삼국시대(백제계성)
▣ 답사일 : 2017년 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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