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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인도 성지 순례 5일차 12월9일 바라나시

느림보 이방주 2016. 12. 9. 18:28

네팔 인도 성지 순례 5일차 12월 9일  바라나시

 

▣ 찾아간 곳 : 갠지스강 일출, 사르나트녹야원, 스리랑카 불교사원, 요가체험, 힌두교 제의식 아르띠뿌자 참관


갠지스강 목욕가트


바라나시

인도 갠지스 강 중하류에 있는 힌두교 성지

인구 1,198,491(2011 추계) 면적 1,535km² 인도 힌두교도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7개 도시 가운데 하나로 갠지스 강의 왼쪽 둔덕에 자리 잡고 있다.

옛날부터 사람들이 거주해온 세계 최고(最古)의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 갠지스 강 중류에 아리아인들이 처음 정착한 것이 시작이 되었다. BC 2000년경 아리아인들의 종교와 철학의 중심지이자 모슬린·견직물·향수·상아제품·조각품 등으로 유명한 상업 및 산업의 중심지였다. 석가모니가 활동하던 시대(BC 6세기)에는 카시 왕국의 수도였으며 가까이에 있는 사르나트는 그가 처음으로 설법을 한 곳이다.

인도 순례에 나섰던 중국의 고승(高僧) 현장(玄奬)635년에 바라나시를 방문한 후에 이 도시가 종교·교육·예술 활동의 중심지로서 갠지스 강 서쪽 기슭을 따라 5가량 뻗어 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1194년부터 3세기 동안 계속해서 이슬람교도가 점령하고 있을 때 힌두 사원들의 상당수가 파괴되었고 학식 있는 학자들이 다른 지방으로 피신하는 등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6세기 무굴 황제 악바르가 종교와 문화활동에 대한 통제를 다소 완화시키면서 상태가 호전되었으며 17세기말 무굴 황제 아우랑제브가 통치하는 동안 또 한번의 퇴보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 이후 마라타족이 패권을 잡으면서 다시 부흥하게 되었고 18세기에는 독립왕국이 되었다. 뒤이어 영국에게 지배를 받은 시기에는 상업과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0년 영국은 갠지스 강 건너편에 있는 람나가르와 함께 바라나시를 새로운 주()로 만들었으나 자치권은 부여하지 않았다. 1949년 인도가 독립한 후 바라나시 주는 우타르프라데시 주에 편입되었다.

종교적인 정화를 위해 목욕을 할 수 있는 수십 의 가트(ghāṭ목욕계단)가 있는 강기슭 지역은 인도에서 가장 뛰어난 지리적 입지조건을 갖춘 곳이다. 강가에는 많은 성지·사원·궁전들이 층층이 솟아 있다. 시내의 거리는 좁고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아 자동차로 다닐 수가 없지만 새로 개발된 교외지대는 넓고 좀더 체계적인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 신성한 도시는 판차코시라는 이름의 도로를 경계로 한다. 신앙심이 깊은 힌두교도들은 누구나 일생에 한번 바라나시를 방문하여 그 길을 걸어보고 가능하다면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를 소망한다. 매년 100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방문한다. 바라나시에 있는 여러 사원들 중에 가장 신성하게 여겨지는 곳은 시바 신()을 모신 비슈바나타 사원과 원숭이신() 하누만을 모신 산카트모차나 사원 등이다. 두르가 사원은 사원 가까이 심어진 커다란 나무들에 원숭이 떼가 살고 있어 한층 더 유명한 곳이다. 아우랑제브 대사원도 뛰어난 종교 건축물로 손꼽힌다. 현대적인 사원 가운데서는 바나라스힌두대학교 교정에 자리잡은 툴라시마나스·비슈바나타 사원이 가장 중요한 곳으로 여겨진다. 그밖에도 도시 곳곳에는 수백 개가 넘는 사원들이 있다. 북쪽으로 수떨어진 사르나트에도 대각회(大覺會 Maha Bodhi Society)와 중국·미얀마·티베트의 불교도들이 세운 사원과 고대 불교 수도원의 유적이 있다.

오랫동안 힌두 학문의 중심 도시였던 바라나시에는 수많은 학교가 있으며 전통학문을 계승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브라만 학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바나라스힌두대학교(1916) 같이 규모가 크고 중요한 3개의 대학교와 12개가 넘는 단과대학과 고등학교들이 있다. 미술과 공예, 음악과 춤의 중심지이기도 하며 목재 장신구, 유리로 만든 장식고리, 상아제품, 놋쇠제품과 금은실로 수놓은 비단제품으로도 유명하다.


바라나시 화장터

바라나시를 찾는 것은 바로 이곳 화장터 때문일 것이다 3천년 古都, '바라나시를 보지 않았다면 인도를 본 것이 아니다. 바라나시를 보았다면 인도를 모두 본 것이다' 떠돌던 이들이 강가의 신성함을 넘어 성자가 되고 일 없는 여행자들 또한 바람처럼 흘러들어 머무는 곳 바라나시는 우리에게 어디인가? 바라나시에서는 3일을 머물지 말라는 말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떠나지 못할 것이라 하는데 이른 아침이면 가트 주변은 온통 경건한 자세로 몸을 씻는 힌두교인들로 가득하다. 강가에서 몸을 씻으면 현생 내생 등 삼세의 죄없이 모두 씻어진다고 한다. 윤회의 사슬이 끊어진다고 한다. 이곳에 머무는 순례객들은 지금 평생 소원을 성취하는 중이다. 시체를 향하여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다. 만약, 사진을 찍으면 ''혼이 사진속 에 갇힌다는 인도인들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르나트 불교사원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중생에게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유적에는 스툽파가 1개 있고, BC 3세기 마우리아 황제 아소카가 세운 것으로 현재 인도의 국가 문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유명한 사자받침 기둥 기념물이 있다. 사르나트(Sarnath, Sarnātha)는 인도의 지명이다. 녹야원(鹿野園)으로도 불린다. 바라나시의 북방 약 10 km에 위치해 있다.

불교 전통에 따르면, 고타마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자신과 함께 고행했던 다섯 수행자들에게 처음으로 설법("초전법륜")을 한 땅이다. 불교의 4대성지 중 하나이다.

발굴 결과 아소카왕(기원전 3세기 중엽)경부터 12세기까지의 유적과 다수의 조각이 출토되고, 다르마라지카탑과 근본정사를 중심으로, 굽타 시대에 가장 번성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동방에 현존하는 다메크탑은 높이 약 42m, 기부의 직경 약 28m로 굽타 시대의 귀중한 예이다. 출토품의 대부분은 유적의 남쪽에 있는 고고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입구정면에 있는 아소카왕 석주의 사자상 주두는 같은 종류의 주두 주각 중 가장 장려하며 보존상태도 좋다. 4마리가 등을 마주 댄 사자도, 원형의 정판 측면에 부조된 동물도 세련된 기법으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바라나시 지도



4시 20분 기상 했다.

어제 여행기를 정리하고 6시에 갠지스강으로 출발했다. 버스 안 이상한 향기가 났다. 모기향이라고 한다.  이곳의 모기는 아무에게나 막 달려든다. 버스 안에도 모기가 있다. 밤새 모기향을 피워 모기를 잡았는가 본데 그래고 모기가 날아다닌다. 


목욕가트까지는 길이 좁아 차가 가지 못한다. 버스에서 내려서 복잡한 거리 어둠 속을 한 15분 걸었다. 가는 길이 매우 복잡하다. 길에 쇠똥과 개똥이 널려 있어 밟으면 그야말로 똥밟는 것이다. 

좁은 골목길을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거리는 아침 예배에 참여하려는 시민들과 기도에 쓰이는 물품을 파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차가 가지못하기 때문에 인력거를 타고 가는 이들도 있으나 좁은 골목에는 인력거도 가지 못한다.  2명이 타는 인력거를 타고 성스러운 갠지스강에 기도하고 목욕하러 가는 바라나시 시민들로 길이 붐빈다. 기도하는 꽃 매리골드를 파는 사람들이 앞을 가로 막는다. 길은 아주 조심스럽게 걸어야 한다. 소나 개의 배설물도 있고 때로 사람의 배설물도 있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소똥이 한 무더기 발견한 이방인들이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바라나시 시민들은 용케 밟지 않고 잘도 간다.


일출을 보기는 글렀다. 하늘에 뿌연 구름이다. 배를 탔다. 나룻배다. 한 사람이 노를 젓고 가이드까지 13명이 탔다. 

사람이 노를 젓는 배를 타고 갠지스강으로 나갔다. 이른 아침부터 목욕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도들은 사원에서 예배를 드리고 내려와서 목욕을 하는 것 같다. 아마도 성지순례를 온 사람들인가 보다. 날이 서늘한데 목욕하는 이들이 많다. 물도 그렇게 깨끗한 것도 아닌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많아도 옷을 다 벗고 물로 풍덩 들어가 목욕한다. 주변 사원 건물은 선답 기행문을 읽어서 사진을 보았지만 신비스러웠다. 기도를 끝냈는지 여자들이 한 떼 계단을 밟고 내려온다. 옷을 벗기 시작한다. 목욕을 하려는 것이다. 좋은 기회지만 포기했다. 우리 일행은 모두 기대에 넘쳤으나 사공이 배를 돌린다. 카메라를 들어 당겨 보았으나 가이드가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다.


강가는 사원이다.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힌두사원이 즐비하다. 바라나시 시민들은 생계를 위한 일보다 기도로 사는 것 같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다는데 힌두이즘은 기도하는 사람을 돕는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 사는 건 왜 이렇게 가난해 보이는가? 북유럽의 루터교도들은 생활 속에 신앙을 갖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힌두이즘은 신앙 속의 생활을 한다. 그것이 오늘날 인도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만들어 준 것이 아닌가 한다. 힌두가 치나치게 현세보다 내세를 중요시하는 오류된 윤회 사상이 오늘의 인도를 가져온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간디 같은 진보적 힌두주의자가 개혁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어도 결국 오늘에 머물고 만 것이다. 그래도 자신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그만인 것인가? 힌두교도가 80% 정도 되는 네팔은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문화재가 무너졌어도 스스로 복구하지 못하고 있다. 인도도 역시 힌두교도들이 80% 정도 된다는데 바라나시 거리는 좁고 더럽고 거지가 앞을 가로막는다. 내세를 위하여 현세에는 그렇게 사는 것이 정도인지 여기에 와서 그들의 밝고 행복한 모습을 보니 나도 판단이 서지 않는다.

   

바로 아래 빨래터가 있었다. 두 세명의 남자가 많은 세탁거리를 가지고 와서 빨고 있었다. 하얀색 커다란 천으로 보인다. 아마도 호텔 침대시트가 아닌가 한다. 그럼 어젯밤 우리가 깔고 잔 시트가 바로 여기 빨래한 것이 아닌가? 거기서도 목욕하는 이들이 있다.


사공은 배를 돌려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멀리 화장터가 보였다. 장작더미에 시신을 올려놓고 두세 명이 태우고 있었다. 부근에는 장작더미가 수북하게 쌓였다. 돈이 있는 사람은 장작을 많이 사서 온전히 태우지만 가난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 강물에 장작이 타고 남은 재가 둥둥 떠 있는데 거기서 목욕하는 남자도 있다. 아예 잠수도 한다. 성수가 온몸 속속들이 배겠다. 밝게 불붙은 장작더미 위에 검은 물체가 시신인가 보다. 계단을 오르면서 갑자기 그것이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과 사는 돌고 돌 뿐이지 다른 게 아니다. 모든 법은 하나이지 둘은 아니다.

 

화장터에서 나와 사원이 꽉 들어찬 좁은 골목을 지나 버스가 기다리는 곳으로 왔다. 골목은 매우 좁은데 통행하는 사람이 많고 때로 오토바이도 지나간다. 게다가 개가 떼를 지어 다닌다. 가끔 소가 우뚝 서 있다. 바닥에는 똥무더기가 수두룩하다. 각종 쓰레기가 널려있다. 밟지 않으려고 애쓰며 걷는다. 사실은 더러운 것은 아니다. 내 뱃속에도 저것이 들어 있고 때로 내 생각은 저것보다 더 더러운 것일 때도 있다. 나도 죽으면 살이 썩고 태우면 재가 된다. 더러운 것이 아니다. 더럽다고생각되는 것이 다 나의 모습이다.

 

버스를 타고 8시에 호텔로 돌아왔다. 요가 체험을 1시간 했다. 몸이 풀린다. 9시에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10시 30분 까지 휴식이란다. 객실에 들어오니 여기저기서 힌두의 주문과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갠지스강 가는 길

갠지스강 기도의 계단에 도착

기도의 계단

사원과 아르띠뿌자가 열리는 곳

기도의 꽃을 파는 이들

갠지스강 나룻배들

기도의 계단과 사원

사원들

갠지스강가 수많은 사원

아침 기도 하는 이들

기도를 끝내고 목욕

우리도 배를 타고 - 먼지가 많아 마스크

화장터 근처

갈매기에게 먹이를 주는 이들

하누만 사원인가?

화장터-불빛은 화장하고 있는 모습, 가까이에서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카메라에 담긴다고 믿는다

돌아오는 길 골목- 이효정 대장과 안선생님은 신분이 의심스럽네

조심스럽게 걷는 여성회원들

황소 신에 대하여 경배하는 가이드

좁은 골목을 소와 함께

순례자들

개와 함께

소는 먹이를 찾고


10시30분에 사르나트 녹야원에 간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로 설법하신 녹야원으로 간다. 녹야원 가는 길은 아예 멈추어 서있는 것 같다. 사람, 자전거, 인력거, 오토바이, 툭툭이, 삼륜차, 버스, 대형트럭이 엉켜서 움직이지 않는다. 경적이 신경질적으로 울린다. 그래도 인도인들은 찡그리거나 욕하는 사람이 없다. 소리지르는 사람도 없다. 그냥 한 덩어리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과 차들이 엉켜 있어도 결국 풀리고 앞으로 조금씩 간다. 차와 사람이 부딪칠 듯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부딪칠 듯, 오토바이 바퀴가 인력거에 부딪칠 듯하지만 부딪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냥 한 덩어리가 되어 앞으로 조금씩 흘러간다. 설산에서 커다란 빙하가 조금식 밀려 내려오듯 갠지스강에 물이 흘러가면서 모든 것을 안고 가듯 이 모든 것이 한 덩어리가 되어 흘러간다. 모든 것이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 광합성을 하듯, 혈액이 혈관을 흘러가듯 막힘도 없이 거침도 없이 결국 흘러간다. 인도는 역사, 사회, 사상, 카스트의 모든 신분이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 오늘까지 흘러온 것처럼 생각되었다. 

 

11시 쯤 사르나트 녹야원에 도착했다.

녹야원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뒤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설법을 하신 성지이다.

61미터 불탑은 붉은 벽돌로 쌓았으나 지진으로 무너졌다 한다. 벽돌을 보니 돌보다 더 단단하다. 무늬, 연꽃무늬는 백제 와당과 비슷하다. 벽돌탑 흔적에 금박을 붙이고 기도한 흔적이 보인다. 수많은 불탑이 있던 자리가 남아있다. 붉은 벽돌로 된 본전과 승원이 있었다고 한다. 승원이 있던 자리만 남아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성지로 여기고 참배한다. 무너진 벽돌들은모두 땅 속에 묻혔다고 한다. 세개의 아소카 석주가 유리 속에 보호되어 있다. 석주에는 티벳 문자로 새겨 있어서 역사적으로 쉽게 증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말고사 치약나무를 지났다. 사르나트 녹야원이라는 이름에 맞게 사슴원이 있어서 꽃사슴이 놀고 있었다. 사람들이 먹이를 주는지 사람을 보면 쫓아왔다. 이곳에서 풀을 한 줌에 1달러씩 파는 여인들이 있다. 여기는 젊은이들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이라 한다. 실제로 남녀가 쌍쌍이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높이 약 33m라고 하는 디멕스투파 사원에 올라갔다. 순례자들이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잔디밭에는 어디서 왔는지 수행자들이 모여 앉아 불탑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이 보인다. 불탑에 만다라. 덩굴식물, 부처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또 군데군데 감실에 불상이나 아기부처님, 보살상을 모셨다. 5세기에 세워진 문양을 지금 보고 있고, 그것을 그 시대에 받아들인 백제 문화도 대단하다.

 

바로 옆에 자이나교 사원이 있었다. 건물의 모양은 힌두사원과 매우 유사하다. 자이나교는 불교와 같은 시대에 힌두교를 개혁하고자 하여 생긴 종교이다. 자이나교는 모든 생물은 다 동등한 것으로 본다고 한다. 들어갔으나 참배는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계속 돈을 놓고 참배하라고 종용하는 것을 보았다. 자기 신앙이 엄연히 있다. 자신의 신앙이 아니라도 참배할 마음이 있으면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참배하지 않는다 해도 사원을 관람할 때는 예의를 지켜주면 되는 것이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모두 힌두교에서 발원했다고 할 수 있다. 힌두가 불교를 거부하지 않듯 불교에서도 힌두를 거부하지 않는다. 내가 잘못 판단했는지 모르지만 자이나교는 불교를 적대시하는 느낌이 들었다.

스리랑카 불교 사원은 외양만 보았다.

 

사르나트녹야원은 부처님의 설법하던 성지이다. 수행자들은 여기 와서  명상에 잠기는 곳이다. 명상대도 있다. 함부로 올라가거나 하면 에법에 어긋난다. 이 아름다운 성지가 자연재해로 보존될 수 없었던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우리나라의 성지나 많은 사원의 예술품들이 불타 없어지고 전쟁으로 망가지고 역사의 변화에 따라 매몰되었으니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12시 녹야원에서 나왔다.

복잡한 거리를 지나 오후 1시 비단집에 들렀는데 직접 베틀에 앉아 짜는 모습을 보여준다 . 비단은 매우 아름답고 가격도 저렴한데 여자분들이 관심이 없다. 특히 침대 시트는 매우 아름다웠다. 그러나 실용적이지는 못한 것 같다.  비단의 시대는 이미 지난 모양이다.

 

오후 2시 다시 호텔로 돌아 왔다.

인터넷에 보니 박근혜 탄핵 소추안이 234표 찬성으로 가결되었다고 한다. 사필귀정이다. 이렇게 찬성율이 높으면 헌재에서도 찬성으로 결정될 것 같다. 사필귀정이다. 그래도 고국의 소식이 안타깝다.

 

사르나트녹야원 정문에서

입장을 기다리는 회원들

정문에서 바라본 녹야원 전경

무너진 석탑의 지주들

사르나트 유적과 다멕스투바(Dhamekh Stupa) 그 엽에 뾰족한 자이나사원

아소카 석주

설법 장소의 유적들

금박을 붙인 흔적

유적의 무늬에도 연꽃 문양

무너진 벽돌탑

사원을 배경으로

승녀들과 옷 색깔이 같네

명상의 장소

낯익은 연꽃 문양

녹야원 사슴들

다멕스 스투바를 배경으로

순례자들

다멕스투바의 연꽃 문양

다멕스투바 앞에서

스리랑카 사원

열반한 부처님


들어갈 수 없는 태국 사원

나오는 길 아름다운 꽃

사원 앞의 무질서

돌아오는 길 - 소와 연료로 쓸 소똥을 커다란 배수관에 붙여 말리고 있는 모습

비단 짜는 모습


오후 4시 30분 로비에서 회원들이 모였다.

힌두교 제의식 아르띠뿌자(arti puja)를 참관하기 위해 인력거(릭샤)를 타고  갠지스강으로 나가기로 했다. 인력거 여섯대를 가이드가 미리 주문해 놓았다. 인력거는 자전거를 개조해서 만들었다. 옛날 우리나라 인력거와 비슷한 구조이다.  우리 내외를 태운 인력거를 운전하는 사람은 젊기는 했지만 체구가 상당히 작았다. 내가 체중이 많이 나가 좀 미안했다. 멀쩡한 팔다리를 가지고 다른 사람이 페달을 밟아서 살아가는 수레에 타고 가는 것이 가당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45분 내내 불편했다. 말도 안되지만 내가 끌어 볼까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수많은 차, 자전거, 오토바이, 툭툭이, 인력거와 사람들 사이를 부딪치지 않고 달릴 자신이 없었다. 갑자기 부라만이나 크샤트리아가 되어버린 것 같아 영 어색했다. 그건 돌아오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생계라고 한다.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갠지스강 기도의 계단에 도착했다. 배를 탔다. 이번에는 발동선을 탔다. 배는 강물을 거슬러 화장장까지 간다. 이번에는 아홉 군데나 되었다. 아홉 명의 시신이 이 시간에 불타고 있는 것이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으로 보아 돈푼이나 있는 사람이 죽었나 보다. 일하는 사람들 사이로 언뜻 시신이 보이는 것 같다. 이승의 삶을 정리하고 검은 연기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기를 빌었다. 죽음에 대한 경건함보다 아무리 종교의식이라 하더라도 이런 원시적인 의식을 방치하는 인도 정부가 이해되지 않았다. 현대식으로 화장장을 마련해 주어 가난하든 부자든 죽음의식은 동등하게 해 주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 아닐까 한다.

 

사공은 다시 키를 돌려 기도의 계단으로 왔다. 그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기도의 계단에는 불빛이 대낮같이 환하다. 제단이 차려지고 오색 불빛이 찬란하다. 승려들이 황금색 옷을 입고 앞에서 집전을 준비한다. 계단에 앉은 힌두교도들은 매우 엄숙하고 강에서 배를 타고 기도에 참석한 사람들도 대부분 엄숙하게 참여한다. 때로 이 배에서 저 배로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다. 이윽고 의식이 시작되는지 누군가 확성기에 대고 노래를 시작한다. 곡조가 찬불가와도 거리가 있다 마치 발라드처럼 이야기로 들렸다. 아마도 힌두교의 찬송인 배다인가 보다. 베다 가운데 찬송의 배라라면 리그베다로 시작될 것이다. 노래가 지루하지 않게 끝나자 승려가 주문을 외고 또다시 노래 소리가 들리더니 끝날 무렵에는 승려들이 모두 일어서서 향로를 들고 앞 뒤로, 위 아래로, 좌우로 흔들었다. 다 의미가 있을 것이다. 승려들은 이러한 행동을 서너번 반복하였다.

맨앞에 브라만 사제들이 노란 옷을 입고 의식을 진행하는데 진행하는 승려들은 매우 화려한 옷을 두르고 있으며 위엄이 있어 보였다. 아마도 계급이 브라만이기 때문에 신도의 위에서 지도하는 입장인가 보다. 아무리 봐도 불교 의식과는 너무 달랐다. 불교 의식은 경건한데 비해 어쩐지 원시적으로 보였다. 그래도 선동적이지 않은게 다행이었다. 우리도 꽃불(디아)을 하나씩 사서 강물에 띄웠다. 우리가 띄운 꽃불이 일렬로 열을 지어 떠내려간다. 다들 어떤 소망을 빌었을까. 난 아무것도 빌지 않았다. 부처님은 복을 비는 사람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는다. 복은 스스로 짓는 사람에게 내리는 인과응보이다.

 

가이드에게 이런 기도 의식은 언제 하냐고 물었다. 날짜를 정해 놓고 그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해질 무렵 거행된다고 한다. 힌두인들은 해 뜰 때와 해 질 때 기도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의무라고 한다. 그런데 오늘 기도는 이렇게 성대하고 많은 사람이 모일 수가 없다. 이런 행사를 날마다 시행한다니 힌두는 참 왜 이러나 싶었다. 종교는 생활의 일부이어야 하는데 생활이 신앙의 일부가 되었다. 하던 일을 중지하고 모두 이렇게 달려 나오니 하는 말이다. 사제나 사원에 종사하는 사람이야 종교가 생활의 전부가 되겠지만 일반 중생이야 생활 속에 종교여야 한다는게 내 평소 소신이다.  인도는 힌두를 포기하거나 개혁하기 전에는 사람답게 사는 길이 열리기 어렵다. 날마다 몇 시간씩 이렇게 기도에 매달리니 하는 말이다. 누군가 영웅적 지도자가 나와서 힌두를 개혁하여 현실에 맞게 수정하고 생활과 종교의 균형을 맞추어야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 어떤 수행자가 내 이마에 참석 표기를 붙여준다고 해서 얼른 피했다. 기도가 끝나고 사람들이 몰려나오기 전에 얼른 기도의 계단을 올라서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 인력거가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길을 알면 그냥 호텔까지 걸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골목으로 골목으로 오는  45분 길을 어떻게 찾아오랴. 이 많은 군중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오는 릭샤꾼도 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참을 오다가 갑자기 멈춘다. 인력거꾼이 자기네들끼리 막 떠든다. 우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일행 중에 한 부부가 다른 인력거를 탄 것이다. 큰일이다. 다른 인력거를 탔으면 다른 호텔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한 10분을 그렇게 서 있다가 다시 출발했다. 연락이 잘 되어 그 분들이 돌아왔다. 다행이다. 만약에 다른 호텔로 갔으면 어쩔 뻔 했는가? 왜 인력거를 확인하지 않고 탔는지 모르겠다. 해외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행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 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비밀이다. 우리 여섯집 중에서 한 집이다. 나는 아니다.

사람이 끄는 인력거를 타고 오면서 오늘의 내가 죄업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45분 이 불안했다. 돌아와서 요금은 가이드가 지불했겠지만 팁을 충분히 주었다.


우리를 태우고 갈 릭샤 아저씨- 사람 좋아 보이네

릭샤를 타고 가면서

릭샤에서 내려 걸어가는 거리

저녁 기도를 준비하고 있다.

꽃불을 파는 이들

6개에 1달러

안선생님 부부

갠지스강엔 어둠이 내리고

아르띠뿌자는 시작되고

멀리 화장터에도 불이 붙여진다

우리가 띄운 소망의 불은 갠지스강에 떠간다

화려한 아르띠뿌자

의식이 거행되는 동안 왼쪽 기도의 계단 

절정에 오른 아르띠뿌자-승려들이 모두 일어서서 의식을 진행한다

수많은 인파들

돌아오는 길


저녁식사에서는 힌두이즘보다 박근혜 탄핵이야기가 더 많이 오고 갔다. 만약에 우리가 힌두 국가라면 국민들은 그의 실정에도 관심 없었을 것이다. 내일은 카주라호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