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해외 여행

네팔 인도 성지순례 4일차 12월 8일 룸비니 → 바라나시

느림보 이방주 2016. 12. 9. 18:25

네팔 인도 성지순례  4일차 12월 8일  룸비니 바라나시


▣ 찾아간 곳 : 룸비니에서 바라나시까지 12시간 이동


오전 4시에 기상했다.

따뜻해서 짧지만 잘 잤다. 5시에 아침 식사하러 내려갔다. 쌀죽을 한 탕기, 토스트 두 장, 삶은 달걀 한 개, 감자 튀김 몇 조각을 담았다. 맛이 괜찮았다. 좋았다. 깔끔하다. 친절에 감동이다. 그런데 가끔 갑자기 잠깐씩 정전이 된다. 전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란다. 아침 일찍 출발하려고 일찍 일어나 이른 아침 먹고 부산을 떨었다. 그런데 인도에서 우리를 태우러 오는 차가 국경에서 어젯밤 10시 걸려서 넘어오지 못했단다. 인도 국경은 10시면 더 이상 통과를 시키지 않는다고 한다.공무원이 퇴근해 버리니까.  그 바람에 6시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7시에 출발한다고 한다. 객실로 다시 들어왔다. 7시가 되어도 연락이 없다. 잠이나 더 잘 걸-----

 

8시 출발, 

수리야씨가 인도 가이드를 소개했다. 여기서 인도 가이드로 교체되는 것이다. 농담도 잘하고 별 부담없이 과일도 잘 사주는 수리야씨와 이별이다. 이제 바라나시로 이동한다. 인도에서 온 버스는 네팔 버스보다 훨신 고급이다. 더 크고 조수까지 딸린 기사가 듬직했다. 그러나 기사 심성은 타 보아야 한다. 12시간 족히 걸린다고 한다.

가이드는 네팔의 수리야보다 우리말이 서툴다. 이름은 '찬단'이다. 한국 울산대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유학하고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서른세 살 인도 청년으로 힌두교 신도 같아 보였다. 그러나 사고는 많이 진보적이었다. 자신은 한국에 가서 알을 깨고 나왔다고 했다. 어떤 한국 여학생을 사랑했는데 여자친구로부터 실연을 당했다고 한다. 그 여성이 인도에 와서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을 자신이 없다고 해서 헤어졌는가 보다. 말로는 소똥 많고 더러운 인도에 와서 시부모까지 모시고 살겠냐고 우리에게 반문한다. 그렇다. 한국에서도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분위기는 아니지 않는가?  나라도 딸을 이렇게 먼 곳으로 보내는 건 달갑지 않겠다.

버스는 45인승으로 큰데 안전벨트가 다 망가져서 자리를 골라 앉아야 한다. 안개가 자욱하다. 국경에서 입국수속이 빨리 끝나야 한다. 룸비니에서 바라나시까지 340km라고 한다. 그런데 12시간 예상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서너 시간이면 족할 텐데 말이다.

 

들이 매우 넓다. 대부분 볏논이다. 벼를 벤 포기자리가 보인다. 논은 경지 정리가 된 곳도 있고 자연 그대로인 곳도 있다. 벼는 2모작 3모작이 가능하다고 한다. 볏논 중간중간 유채꽃이 노랗다. 남부지역은 들이넓어 생활이 나아 보인다.

 

거리는 승용차보다 오토바이 자전거가 많다. 오토바이에는 많게 세 명까지 탔다. 이곳 룸비니에는 자전거를 인력거처럼 개조해서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람이 밟아야 가는 자전거를 뒤에 편하게 앉아 가는게 정말 괜찮은 일일까? 아직도 계급은 남아 있다.

 

국경에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인도로 들어섰다. 국경 입국 수속은 예상보다 빨랐다. 러시아에서 핀란드로 갈 때나 핀란드에서 러시아로 들어갈 때를 생각하면 정말로 쉽게 끝났다. 인도 국경 출입국 사무소 직원들은 국격에 비해 많이 떨어졌다. 의자에 떡 버티고 앉아 거만한 태도로 사람을 맞았다. 그리고 일을 빨리 처리하는게 아니고 저희들끼리 뭔가 자꾸 지껄이면서 늑장을 부렸다. 차가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도 말이다. 

 

붓다 마야 가든호텔

호텔 로비에 있는 불화

인도에서 우리를 태우러 온 버스

물건을 싣고 자동차 사이를 빠져나가는 상인

이른바 릭샤라고 하는 인력거

지저분한 시장과 말끔한 선거 벽보

달리는 차 안에서 본 농촌 풍경

툭툭이 오토바이 자전거가 뒹엉킨 시내 거리

인도의 거리

선거 벽보와 상점가

상점이 있는 거리

야채상이 있는 거리


인도

힌두어로는 Bhārat 또는 Bhāratavarsha(전설적 현인군주인 '바라트의 땅'이라는 뜻)라고 부른다. 공식 이름은 인도 공화국(Republic of India)이다. 인구 1266백만이다. 국토 면적이 세계에서 7번째로 넓고 인구는 세계에서 2번째로 많다. 북서쪽으로는 파키스탄, 북동쪽으로는 중국· 네팔·부탄, 동쪽으로는 미얀마와 국경을 접하며 북동부는 방글라데시를 3면으로 둘러싸고 있다. 남동쪽 면은 벵골 만, 남서쪽 면은 아라비아 해와 접한다. 남동쪽 앞바다에 섬 나라인 스리랑카가 있다. 수도는 뉴델리이다.

  인도는 매우 다양한 인종적 혈통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다양성은 인도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 인도 대륙에 자리 잡았던 사람들 혹은 그 이후의 침입자들의 혈통이 뒤섞인 데서 기인한다. 공식 언어는 힌두어와 영어이고, 벵골어·카슈미르어·마라타어·우르두어 등이 포함된 다른 인도-유럽 언어들, 드라비다어, 그리고 수백 개의 다른 어군을 사용한다. 종교는 힌두교와 이슬람교, 그리스도교, 시크교, 불교, 자이나교이다. 화폐단위는 루피(rupee/Re)이다.

  인도는 지형적으로 크게 3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인도 북부 국경을 따라 위치한 히말라야 산맥 지역, 갠지스를 포함하여 3개의 커다란 강의 작용으로 쌍인 토사 퇴적층으로 이루어진 갠지스 평원, 데칸 고원으로 유명한 남부 지역이다. 주요농산물로는 쌀, , 면화, 사탕수수, 코코넛, 향신료, 황마, 담배, , 커피, 고무가 있다. 제조업 분야에는 다양한 중공업과 고도의 기술 산업이 발전해 있다.

  인도의 정치 형태는 양원제를 운영하는 공화국이다. 국가의 수반은 대통령이고, 행정부의 수반은 수상이다. 인도 지역에는 수천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아왔다. 인도에서의 농업은 BC 7000년 전부터 시작되었고, 인더스 강 유역의 도시 문명은 BC 2600년경에 이루어졌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BC 6세기에 발생하였다. 그것은 베다교와 이를 계승한 힌두교에 의해 만들어진 카스트 기반 사회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이슬람교도의 침략은 대략 AD 1000년경에 시작되었다. 이들은 1206년의 장기간 유지되었던 델리 술탄국을 설립하였고 1526년 무굴제국을 세웠다. 1498년에 인도를 향한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는 수 세기에 걸쳐 계속된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 영국인, 프랑스인들 간의 무역 경쟁을 가져왔다. 18~19세기에 걸친 영국의 지배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통치로 이어졌고, 1858년 대영제국에 의한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다.

   모한다스 간디가 1947년에 영국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데 기여한 이후, 자와할랄 네루는 인도 최초의 수상이 되었다. 그리고 네루,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 그의 손자인 라지브 간디가 몇 해를 제외하고는 1991년까지 계속 국가의 운명을 이끌었다. 인도 대륙은 2개의 나라로 분열되었는데, 힌두교가 대다수인 인도와 이슬람교도가 대다수인 파키스탄이 되었다. 후에 파키스탄과의 분쟁은 1971년에 방글라데시의 건국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시크교도는 펀자브에 독립 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인종과 종교적 갈등은 인도 다른 지역에서도 발생했다. 서북쪽의 카시미르 지역은 끊임없는 긴장을 제공했다.

 

힌두교Hinduism

인도에서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브라만교(婆羅門敎)과 민간신앙과 융합하여 발전한 종교

'인도교(印度敎)'라고도 한다. 힌두교를 범인도교라 함은 힌두(Hindū)는 인더스강의 산스크리트 명칭 신두(Sindhu:大河)’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도와 동일한 어원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기원전 2500년경의 인더스 문명에까지 소급될 수 있으며, 아리안족의 침입(기원전 2000기원전 1500?) 이후 형성된 브라만교를 포함한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아리안 계통의 브라만교가 인도 토착의 민간신앙과 융합하고, 불교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300년경부터 종파의 형태를 정비하여 현대 인도인의 신앙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에 특정한 교조와 체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다양한 신화·성전(聖典) 전설·의례·제도·관습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을 통일하여 하나의 종교로서의 구체적인 기능을 가능케 하는 것은 카스트 제도이다. 이것의 기원은 브라만교에 규정된 사성(四姓: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 제도이지만,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변천하여 현대의 카스트 제도에는 종족·직업·종교적인 모든 조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인도인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인도인은 힌두교로 태어난다고 하며 카스트 제도에는 엄격하지만 신앙에는 상당히 관용적이다.

  고대 브라만교와 차이점이 있다면, 브라만교가 베다에 근거하여 희생제를 중심으로 하며 신전이나 신상(神像) 없이 자연신을 숭배하는 데 비해, 힌두교에서는 신전·신상이 예배의 대상이 되고 인격신이 신앙된다는 점이다. 또한 공희(供犧)를 반대하여 육식이 금지되고 있다.

   힌두교의 근본 경전은 베다우파니샤드이며 그 외에도 브라흐마나, 수트라등의 문헌이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은 인도의 종교적·사회적 이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또한 경전에 준하는 것으로 마하바라타, 라마야나2대 서사시가 유명하다. 특히 마하바라타의 일부인 바가바드기타는 널리 애창되고 있다. 이외에 푸라나, 탄트라, 아가마, 삼히타등이 힌두교 각 파에서 존중되고 있다.

   힌두교는 브라만교에서 많은 신관(神觀신화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다신교 같아 보이지만, 신들의 배후에 유일한 최고신을 설정하고 그 신들을 최고신의 현현(顯現)으로 통일시키고 있는 점에서 일신교적 형태를 취한다. 푸라나문헌 등에 나타나는 트리무르티(삼신일체(三神一體), 또는 삼위일체)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별도의 기원에 속하는 우주창조신 브라흐마, 유지신(維持神) 비슈누, 파괴신 시바의 세 신을 일체로 하여 최고의 실재원리로 삼는 것이다. 그 중 비슈누와 시바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힌두교의 대종파를 형성하였다. 비슈누파는 학문적 성격이 강하며, 비교적 사회의 상층부에 속한다. 비슈누는 인간과 동물의 모습으로 지상에 출현하는 것으로 신앙되고, 비슈누의 10권화(權化) 중의 라마와 크리슈나는 2대 서사시의 영웅이다.

  시바파는 수행자의 고행·주술, 열광적인 제의(祭儀)가 특색이다. 또한 인도에서는 예부터 신비(神妃) 숭배가 성하여 브라흐마에게는 사라스바티, 비슈누에게는 락슈미가 배우 여신으로 간주되며, 시바신의 배우 여신으로는 두르가·파르바티·우마·칼리 등 많은 이명이 있다. 이들 여신을 샤크티(여성적 창조력)라고 하며, 이들을 숭배하는 샤크티파도 있다.

  힌두교의 특징적인 사상은 윤회(輪廻)와 업(), 해탈(解脫)의 길, 도덕적 행위의 중시, 경건한 신앙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윤회와 업 사상은 민간신앙을 차용한 것으로 이미 우파니샤드에 나타나며 마하바라타에 이르러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인도인의 도덕관념을 키웠지만, 한편으로는 숙명론을 심어줌으로써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인간의 사후 운명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이 있었다. 신들도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그러한 속박에서 해탈하는 방법으로서, 출가 유행(遊行)의 생활과 고행 또는 요가가 교설되었다.

  힌두교 사회에서 도덕관념의 기초는 브라만교의 법전에 규정되어 있는 다르마(·의무)이다. '바르나슈라마 다르마(Varnashrama-dharma)'라고 부르는 4(계급)제도와 4생활기(브라마차리아(학생기그리하스타(가주기바나프라스타(은둔기산야사(유행기))가 중심이 된다. 이는 개인이 속하는 카스트에 따른 의무의 수행을 강조한다. 최고신에 대한 박티(信愛)와 그 은총은 능력·성별·직업·계급 여하에 관계없이 일반 민중의 구제를 위하여 교육된 것이다. 또한 힌두교는 이슬람교 및 그리스도교와 접촉하여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아 근세에는 브라마 사마지(1828년 창립), 아리아 사마지(1875년 창립) 등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스와미 비베카난다(18631902)의 라마크리슈나 교단(1897년 창립)은 모든 종교가 하나로 귀일(歸一)한다고 보며 보편주의적 종교관을 갖고 있고, 세계적으로 많은 신자를 가지고 있다.(두산백과)

  


카스트Caste 제도

수천 년간 인도인의 생활 규율 역할을 해 온 카스트제도는 현재 법적으로 폐지되었으며 근대화 및 교육의 영향으로 점차 약화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인도인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 관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카스트제도는 아리안족이 인도를 정복한 후 소수집단인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동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부색 또는 직업에 따라 승려계급인 브라만(brahman), 군인·통치계급인 크샤트리아(ksatriya), 상인계급인 바이샤(vaisya) 및 천민계급인 수드라(sudra)로 크게 나누어지며, 이 안에는 다시 수많은 하위카스트(subcaste)가 있다. 최하층 계급으로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untouchable)이 있다.

    카스트제도가 생긴 최초에는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으나 오랜 역사적 흐름과 더불어 다른 카스트와의 결혼 불허 등 많은 금기를 가진 사회규범으로 굳어졌다. 엄격한 카스트제도 하에서 인도인들은 자기가 속한 카스트의 행위 규범을 준수해야 했다. 예를 들어 브라만은 반드시 해가 지거나 뜰 때 기도를 해야 했고 경을 외워야 했다. 이러한 계급제도는 인도 사회를 안정시키고 결속시키는 데 도움이 된 면도 있다고 하나, 인권을 침해하고 사회를 정체시켜 활력을 잃게 하는 부정적 영향이 크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를 포함한 많은 사회 개혁 운동가들은 불가촉천민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를 위해 노력하면서 불가촉천민들을 신의 자식이라는 뜻에서 하리잔(Harijan)으로 부르고, 이들이 힌두 사원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천민 보호에 앞장섰다.

   오늘날 인도에는 1억 명이 넘는 하리잔이 있다. 인도 정부에서는 입학이나 취업 시 일정 비율을 하리잔에 배정해주는 등 혜택을 주고 있어 하리잔 출신이 장관까지 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아직도 카스트제도가 많은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힌두교 주신

아래의 목록에서 트리무르티(삼주신)는 일반적인 나열 순서인 창조자 · 유지자 · 파괴자(변형자) 순으로 나열되어 있으며, 나머지 신들은 중요도에 관계 없이 가나다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트리무르티(Trimūrti · 삼주신)

브라흐마(Brahmā): 창조자, 불경의 범천(梵天)

비슈누(Viṣṇu): 유지자, 비슈누파의 최고신

시바(Śiva): 파괴자 또는 변형자, 시바파의 최고신, 불경의 대자재천(大自在天 · Maheśvara)

   

인도로 들어오니 건물 규모가 더 커보였다. 넓은 도로는 포장은 잘 되었으나 정비되지는 않았다. 도로 주변은 농토가 널리 펼쳐졌다. 소와 개는 주인이 없다고 한다. 소는 시바신을 의미한다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시바신이 황소를 타고 다녔기에 소중하게 여긴다고 한다. 인도는 천천히 하면 쉽게 이루어진다고 믿는다고 한다. 깊은 철학에서 삶이 이루어진다.

 

울산대학교 한 학기 공부했다는 가이드는 이름이 찬단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인도 모디스 수상은 2년만에 엄청나게 변화시켰다며 '인도의 박정희'라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인도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한국을 부흥시킨 영웅으로 알고 있다. 자기 나라의 수상에 대한 지지를 '인도의 박정희'라 표현해서 감사했다. 가이드는 인도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네팔, 파키스탄에 반감이 있었다. 또한 이슬람교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지고 이었다.

 

인도 과거 정치인들은 국민을 발전시키지 않고 자기 발전만 꾀했으나 모디 수상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선거가 있는지 선거 벽보가 걸려있다. 국민들의 삶은 이런데 표를 달라는게 정치인들의 행태이다. 거리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뭐하는 사람인가, 인도에 위조지폐가 너무 많아 신권 2000루피 짜리를 발행하고 구권을 못 쓰게 하고 신권 2000루피자리만 쓰도록 했기 때문에 환전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11시 40분

어느 작은 도시 갠지스강 지류를 건넜다. 멀리 강가에 사람들이 앉아 있고 불이 타오른다. 화장하는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12시

 호텔 madhuban에서 점심 식사했다. 처음 먹어보는 인도 음식이다. 아주 낯선 음식은 피하고 밥을 많이 가져다가 파김치랑 먹었다. 둥근파, 양배추볶음, 달걀 조림도 그냥 먹을 만하다. 감자조림이나 양고기 볶음은 먹지 않았다. 인도식 난은 네팔 것만큼 맛이 있지 않았다. 바나나 옥수수 죽은 단맛이 강하다. 음식은 깨끗한 편은 아니다. 그릇은 플라스틱이고 스푼이나  포크도 질이 떨어진다.

 

연료로 쓸 쇠똥과 똥탑

마을 모습

정비업소인듯

마을 광장

인도에는 이런 철학자가 많다

사원인듯

집에서 기르는 소

이발소


강가에서 화장하는 모습


오후 1시 출발한다.

2차선 도로에 차가 가득하다. 소도읍을 몇개 지났다. 특징으로 지저분하고 사람이 많고 질서가 없다는 것이다. 버스는 대개 트럭을 개조한 것으로 대형버스가  있다. 사람이 꽉 차서 고등학교 시절 우리 시내버스가 생각난다. 오토바이, 자전거, 자전거 변형 인력거는 룸비니와 같은 모양이다. 삼륜차는 트럭이 있고 삼륜트럭을 개조하여 사람을 태우고 다니는 승합차도 있다. 이 차에도 사람이 만원이라 뒤에 앉은 사람 은 문짝에 걸터 앉기도 했다. 오토바이를 개조하여 사람을 태우고 다니는 캄보디아의 툭툭이도 있다. 대부분 낡고 먼지 투성이다.

 

우리가 탄 대형관광 버스도 시장 한가운데를 비집고 지나간다. 물론 멀리 다른 도시로 가는 대형 트럭도 마찬가지이다. 시장통길에 사람과 차, 자전거 오토바이와 대형차가 뒤엉켜 움직이지를 못한다. 우회도로는 왜 못냈을까? 고속도로도 없는데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길을 따라 문명이 들어간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여기 오니 60년대, 70년대 우리나라가 생각나고, 박정희의 과보다 공이 더 새롭다. 인도에서도 영웅으로 아는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내일 탄핵 표결에 붙여진다.  박근혜는 참 나쁜 딸이다. 참 나쁜 여성이다. 참 나쁜 대통령이다.

 

농토가 넓다. 일하는 농부도 많다. 그러나 가난해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가이드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계속한다. 농촌이나 도시의 집은 붉은 벽돌 집이 많다. 벽돌집은 대개 오래된 건물이다. 무너진 벽돌 더미도 여기저기 보인다. 밭 가운데 아주 오래된 붉은 벽돌집 무너진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래선지 벽돌 공장 굴뚝이 여러군데 보였다. 소는 주인없이 거리를 돌아다닌다. 이렇게 주인 없는 소가 더 많다고 한다. 아무데나 배설하고 아무거나 주워 먹는다. 그런데 매놓고 기르는 소도 많다. 일은 시키되 고기는 먹지 않는다니 과연 신은 신이다.

 

장터가 있는 마을을 지나노라면 남자 노인 두세 명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함께 앉아 있어도 생각은 다 각각 다른 모습이다. 무슨 생가일까? 힌두교나 불교나 사색의 종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이들은 생활이 곧 철학이고 철학이 곧 생활이다. 밭에는 대부분 여인들이 일을 하고 있다. 남자는 사색을 하고 여인은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나 보다.

 

시장은 주로 식료품 가게이다. 청과물이 많다. 가지, 호박. 둥근파, 무우, 콩, 땅콩, 계란, 석류, 귤. 토마토, 감자 등이다. 닭을 그 자리에서 잡아 팔고 물고기도 있다. 튀깅 같은 것을 파는 아주 작은 가게도 있다. 시장 사람들은 여럿이 서서 일제히 우리를 쳐다보는데 적대하는 것 같지는 않아도 무표정한 그 눈빛이 그리 고와 보이지는 않는다.

 

농촌지역에는 쇠똥을 옛날 깻묵 모양으로 납작하게 빚어서 쌓아놓고 말린다. 땔감으로 쓴다는데 나무도 참 많은데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쇠똥 탑이라고 이름지어도 될 법하다. 여기서는 아주 중요한 연료인가 보다.

 

오후5시경

해가 붉어지더니 지평선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가이드가 자기 차를 길가 공터에 세우더니 " 뱀조심하십시오."한다. 소변을 보라는 것이다. 우리는 대로변에 일렬로 서서 인도 사람들 흉내를 냈다. 남자들은 그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는데 여자들은 참 불편할 것이다. 소변만 보려 해도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이렇게 휴게소도 화장실도 없는 곳에서 참으로 난처할 것이다. 여자 분들은 어찌했을까. 숲속에 들어갔다 나온 건 틀림없다.  갔다 오신 분들 중에서 자꾸 신발 바닥을 닦는 분도 있었다. 사람이 눈 똥을 밟은 것이다. 누구일까? 그건 배달겨레 명예에 관련되는 민족적 기밀이다. 다시 출발하는데 세상은 금방 칠흑처럼 어두워진다.

 

오후 7시 30분

농담이 아니고 정말 12시간에서 30분 빠지는 시간에 바라나시 city inn호텔에 도착했다. 로비에 가방을 로비에 놓은 채 식당으로 들어가서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평범한 호텔식이다. 인도 음식을 먹기 어렵다더니 그냥 먹을 만했다.

 

객실은 넓고 깨끗하다. 그런데 난방은 되지 않는 것 같다. 할 수 없다. 춥게 자는 거지 뭐. 와이파이가 안된다. 12시간에 3불이란다. 별수없이 3불을 주고 살 수밖에 없다. 그래야 인터넷도 하고 아이들에게 카톡을 보낼 수도 있고 며느리가 보내주는 아가들 사진을 볼 수 있다. 따뜻한 물에 12시간 묻은 먼지를 씻어내니 개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