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느림보의 山城 山寺 찾기

23. 고란사에는 불은佛恩 같은 물맛이 있었네

느림보 이방주 2016. 10. 27. 22:35

느림보의 山城 山寺 찾기

 

고란사에는 불은佛恩 같은 물맛이 있었네




부소산성을 돌아보는 중에 반드시 들러보게 되는 사찰이 있으니 고란사이다. 부소산에 갈 때마다 들러오지만 그때마다 새롭다. 낙화암에 있는 백화정에서 돌아 오른쪽으로 돌계단을 밟고 10여분 내려간다. 내려가는 돌계단이 싫은 사람은 백화정에서 백마강만 바라보다가 그냥 돌아가 버린다. 조금만 내려가면 가까이에서 아름다운 백마강을 볼 수 있는데 말이다. ‘삶은 은총의 돌계단 어디쯤이라 하지 않는가?


돌계단을 조심스럽게 밟고 내려가니 1500년 백마강을 바라보고 서 있는 사찰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고란사는 그 연혁이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백제 때 왕들이 기도하던 내불전이라고도 하고, 백제 멸망 이후에 왕과 대신들의 놀이터였던 것을 삼천궁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었다고도 한다. 대부분 신라 사찰이나 백제 사찰의 경우 원효대사, 의상대사 등의 고명한 스님들의 창건기나 연기설화가 존재하는데 고란사는 그 설이 분분하다. 부여군에서 발행한 안내서에는 고려시대에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고 되어 있었다. 믿어지지 않는다. 아마도 백제시대 왕들의 내불전이라는 말이 맞을 것 같다. 고란사 연혁이 제대로 전하지 않는 현실만 봐도 땅에 묻힌 백제의 역사가 안쓰럽다. 웅진에서 64, 천도 후 멸망할 때까지 사비시대(538~660) 122년의 왕궁지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니 말이다.


절이 앉은 자리는 그리 넓지 않지만 바로 앞에 백마강이 있어 답답하지 않았다. 절 바로 아래 백마강 유람선 승선장이 있어서 오는 손님을 맞기는 편하겠지만, 스님은 세속의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며 염불을 외야 하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유람선 안내 방송이나 음악소리가 더 시끄러울 것 같았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니 날마다 들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삼으면 어지러울 까닭도 없을 것이다.


고란사 당우는 단순하다. 본전으로 극락보전이 있고, 영종각이 있다. 뒤편으로 삼성각이 바위 위에 간신히 몸을 의지하고 붙어 있었다. 극락보전은 정면이 7칸 측면이 5칸으로 주변의 공간에 비해 비교적 큰 편이었다. 겹처마로 팔작지붕이다. 단청이 곱다. 벽에 그린 불화 심우도尋牛圖가 아름답다. 진리를 찾아 떠나는 동자의 모습이 갸륵하다. 종각은 대부분의 사찰이 범종각이라 하는데 영종각靈鐘閣이라 이름 지었다. 영종각은 비교적 높이 있어서 종소리가 강을 어루만지며 이 땅에 스며있는 모든 백제의 영혼을 울릴 만하다. 삼천궁녀의 죽음이 사실이라면 백마강에 잠긴 한스런 영혼들이 위로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란사는 조용하다. 본전인 극락보전은 열려 있으나 스님은 자리를 비웠다. 마당가에 기념품 가게 아주머니는 절을 찾아온 관광객을 상대로 흐트러진 이야기로 흥겹다. 마당을 가로질러 오른쪽 계단으로 바로 극락보전으로 향했다. 백제의 산성은 대개 사찰을 품고 있고 아미타여래를 모신 극락보전이 본전이다. 백제 유민들의 한이 얼마나 크면 백제 지역의 고찰들은 대부분이 극락보전일까. 본존 부처님인 아미타여래(목조아미타여래좌상,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418)는 미소가 없다. 아미타부처님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은 오른손을 가슴까지 올리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아미타부처님 왼쪽에는 흰색의 관음보살이 앉았다. 양식은 약간 다르다. 두 손 모두 무릎 위에 올려놓았고 왼손에 병을 들었다. 중생을 위한 약을 담은 병인가? 후면으로 수많은 나한상이 있다. 아마도 극락왕생을 위하는 신도들의 기원이 담기었을 것이다.


촛불이 꺼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스님은 멀리 가지는 않은 것 같다. 삼배를 올렸다. 삼배를 올리면서 어떤 생각이었을까? 이번만은 정말 가족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성왕이나 의자왕의 한을 생각했다. 성왕이 어이없이 변을 당했던 옥천 구진벼루 냇가에 서있는 유적비나, 고산사에 있는 의자왕위령비가 그려진다. 언제라도 땅에 묻혀버린 백제의 역사가 고물고물 솟아올라서 이 하늘 아래 퍼져 나가길 기대했다.


영종각을 돌아 고란정으로 갔다. 바위 석벽 저 아래에 아득하게 물이 괴어 있었다. 물은 마시기만 하고 담아가지는 말라고 적혀 있다. 맞아, 물은 담아가서는 안 된다. 자루가 기다란 구기를 들어 물을 길어 올렸다. 키가 작은 사람이나 어린이들은 물을 뜨다가 사고가 날 우려도 있어 보였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하다. 그러나 속까지 시원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그냥 가슴이 서늘하다. 부처님의 은혜는 이렇게 서늘한 것인가? 물을 담아가지 말라는 말을 어기고 배낭에 있는 물병에 담았다. 병에 물은 떨어지고 얼음 덩어리만 있었기에 부처님의 은혜를 담아가듯 담았다. 그러나 큰 욕심은 내지 않았다.


삼성각에는 가지 않았다. 극락보전 벽에 그려진 심우도를 보다가 아쉬움을 남긴 채 마당으로 내려왔다. 스님이 계셔서 다만 한 5분이라도 사찰과 부소산성의 연유를 듣고 싶었다. 스님은 자리를 지키며 신도나 탐방객에게 말씀을 주셔야 한다. 스님은 부처님의 제자이고 대중의 스승이다. 그래서 대중을 부처님께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대중이 원하는 곳에 존재해야 한다. 스님은 부처님과 대중을 이어주는 나무[world tree]가 되어야 한다. 스님은 대중의 영혼에 영양을 주는 영양사가 되어야 하고, 대중의 영혼을 맑게 헹구어주는 세탁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스님은 법문을 거부하거나 피해서는 안 된다. 스님의 말씀은 부처님의 은혜를 대신 전하는 고란정 물맛이어야 한다. 스님도 못 뵈었는데 고란초가 다 무슨 소용이고 조룡대가 다 무슨 소용인가?


기념품 가게 여인은 아직도 절 마당을 서성이고 있다. 스님 대신 그녀에게 합장했다. 그녀도 손을 모은다. 가슴은 텅 비었는데 몸은 무거워 돌계단을 힘겹게 올라 부소산문을 나왔다.

(2016. 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