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의 山城 山寺 찾기】
이성李城과 금이성 사이의 보루가 된 작성鵲城
작성은 이성에서 남쪽으로 머지않은 봉우리에 있다. 걷기 좋은 임도를 지나서 대전가톨릭대학교 뒷산인 작성산으로 가는 가파른 길을 오른다. 숨도 고를 겸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성직자 묘지인 대전가톨릭대학교 하늘묘원이 보이고, 그 아래로 대학 건물도 보였다. 이곳에서 전의를 거쳐 운주산으로 뻗은 산줄기와 서쪽으로 전의에서 유구로 향하는 길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성에 오르니 안내판도 없이 작성산이라는 표찰만 나무에 걸려 있었다. 성벽이 무너져 전해지는 대로 동서 7m, 남북은 8m의 장방형이라는 것은 확인하기 어려웠다. 무너져 구르는 성석은 이성과 크기가 비슷하다. 백제시대의 비슷한 시기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석은 두께 20cm, 너비 40cm 정도로 다듬은 흔적이 뚜렷하다. 주변에 잡목이 우거졌어도 전망은 좋다. 가까이 이성이 보이고, 동으로 전의면 마을이 다 보인다. 동으로 구름이 맴도는 운주산도, 남으로 금이성이 있는 금성산도 손에 잡힐 듯하다. 이곳에서 주변의 산야와 도로에 유동하는 것들을 다 조망하였을 것이다.
규모는 작지만 요새였음이 분명하다. 어느 문헌에는 봉수대였다고 했지만 봉수대로 보기는 주변 산봉우리에 비에 너무 낮다. 요즘 군대 규모로 본다면 1개 분대 정도가 주둔한 보루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이성과 금이성 사이를 연락하는 보루 역할을 했을 것이다. 금이성이나 이성에서 몇 명의 군사가 파견 나와 두 성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도 하고 주변 경계를 맡았을 것이다. 운주산성에서 이성, 금이성을 거쳐 공주까지 가는 동안 성과 성 사이에 많은 보루가 존재하는 것은 선조들의 지혜를 잘 말해준다. 발굴하여 세상에 알리고 보존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백제의 산성이 이렇게 흔적이라도 남아 있는 것은 우리 문화의 자랑이다. 산성에 대하여 사람마다 설이 많은 것은 그 지나온 세월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백제 때 쌓은 산성을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소용 닿는 대로 고쳐 쌓기도 하고 건물을 다시 짓기도 하면서 사용했을 것이다. 변하는 시대에 따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나 소용이 흔적으로 남게 된다. 축성법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에 묻어 있는 이야기나 생활의 양식도 마찬가지이다. 전의 이씨 전설도 여기에 묻어 있는 하나의 생활 문화이고 소중한 우리의 자산이다. 모두 다 소중한 우리 역사 문화의 보물이다.
전에 답사한 적이 있는 금이성으로 가려고 작성산을 넘으니 임도를 다시 만난다. 이성이 있는 전의면 신방리에서 비암사가 있는 다방리까지 임도로 연결되어 있어서 차량으로도 이동할 수 있다. 차를 타고 이성, 작성, 금이성을 답사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 금이성에는 학예사들이 학술 조사를 하고 있었다. 성을 복원하기 위해 지표조사와 아울러 축성법을 조사하는 것 같았다. 일부를 복원한 삼년산성이나 계족산성 운주산성의 실패를 거울삼아 제발 원형대로 복원해 주기를 빌고 또 빌었다. 나는 무슨 산성 수호자라도 된 것처럼 남아 있는 성벽의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신비스러운 조상의 흔적을 사진이라도 남겨야 한다. 비암사로 돌아오는 동안 어느 문헌에도 나와 있지 않은 보루 한 군데를 발견하였다. 비암산 보루라고 이름 짓고 싶다.
지금까지 옛 연기 지역의 전의면, 전동면에 걸쳐 있는 산성을 답사했다.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한 후 많은 산성을 쌓아서 충청 지방에만 250여 개의 성을 가진 산성의 나라이다. 특히 고구려, 신라 등 삼국과 접하는 국경 지역인 천안에서 연기지역 일대에 운주산성을 비롯하여 전의 향교 뒤의 토성土城, 이성, 작성, 금이성 등 15개 이상의 산성을 조밀하게 쌓았다. 오늘 약 4시간 30분 정도 등마루를 밟으며 이 지역의 산성 위치와 역사를 어렴풋이나마 윤곽을 잡게 되었다. 팍팍한 발길을 돌려 백제 부흥 운동의 슬픈 역사를 아직도 안고 있는 비암사로 향했다.
(2016. 3. 26.)
[느림보의 山城 山寺 찾기] 이성(李城)과 금이성 사이의 보루가 된 작성(鵲城) | ||||||
이방주 충북수필문학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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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은 이성에서 남쪽으로 머지않은 봉우리에 있다. 걷기 좋은 임도를 지나서 대전가톨릭대학교 뒷산인 작성산으로 가는 가파른 길을 오른다. 숨도 고를 겸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성직자 묘지인 대전가톨릭대학교 하늘묘원이 보이고, 그 아래로 대학 건물도 보였다. 이곳에서 전의를 거쳐 운주산으로 뻗은 산줄기와 서쪽으로 전의에서 유구로 향하는 길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성에 오르니 안내판도 없이 작성산이라는 표찰만 나무에 걸려 있었다. 성벽이 무너져 전해지는 대로 동서 7m, 남북은 8m의 장방형이라는 것은 확인하기 어려웠다. 무너져 구르는 성석은 이성과 크기가 비슷하다. 백제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작지만 요새였음이 분명하다. 어느 문헌에는 봉수대였다고 했지만 봉수대로 보기는 주변 산봉우리에 비에 너무 낮다. 요즘 군대 규모로 본다면 1개 분대 정도가 주둔한 보루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이성과 금이성 사이를 연락하는 보루 역할을 했을 것이다. 금이성이나 이성에서 몇명의 군사가 파견 나와 두 성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도 하고 주변 경계를 맡았을 것이다. 운주산성에서 이성, 금이성을 거쳐 공주까지 가는 동안 성과 성 사이에 많은 보루가 존재하는 것은 선조들의 지혜를 잘 말해준다. 발굴하여 세상에 알리고 보존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변하는 시대에 따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나 소용이 흔적으로 남게 된다. 축성법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에 묻어 있는 이야기나 생활의 양식도 마찬가지이다. 전의 이씨 전설도 여기에 묻어 있는 하나의 생활 문화이고 소중한 우리의 자산이다. 모두 다 소중한 우리 역사 문화의 보물이다. 전에 답사한 적이 있는 금이성으로 가려고 작성산을 넘으니 임도를 다시 만난다. 이성이 있는 전의면 신방리에서 비암사가 있는 다방리까지 임도로 연결되어 있어서 차량으로도 이동할 수 있다. 차를 타고 이성, 작성, 금이성을 답사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 금이성에는 학예사들이 학술 조사를 하고 있었다. 성을 복원하기 위해 지표조사와 아울러 축성법을 조사하는 것 같았다. 일부를 복원한 삼년산성이나 계족산성 운주산성의 실패를 거울삼아 제발 원형대로 복원해 주기를 빌고 또 빌었다. 나는 무슨 산성 수호자라도 된 것처럼 남아 있는 성벽의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신비스러운 조상의 흔적을 사진이라도 남겨야 한다. 비암사로 돌아오는 동안 어느 문헌에도 나와 있지 않은 보루 한 군데를 발견하였다. 비암산 보루라고 이름 짓고 싶다. 지금까지 옛 연기 지역의 전의면, 전동면에 걸쳐 있는 산성을 답사했다.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한 후 많은 산성을 쌓아서 충청 지방에만 250여개의 성을 가진 산성의 나라이다. 특히 고구려, 신라 등 삼국과 접하는 국경 지역인 천안에서 연기지역 일대에 운주산성을 비롯하여 전의 향교 뒤의 토성(土城), 이성, 작성, 금이성 등 15개 이상의 산성을 조밀하게 쌓았다. 오늘 약 4시간30분 정도 등마루를 밟으며 이 지역의 산성 위치와 역사를 어렴풋이나마 윤곽을 잡게 되었다. 팍팍한 발길을 돌려 백제 부흥 운동의 슬픈 역사를 아직도 안고 있는 비암사로 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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