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느림보의 山城 山寺 찾기

4. 시대의 보루 고려산성

느림보 이방주 2016. 2. 14. 23:48

<느림보의 山城 山寺 찾기>

 

시대의 보루 고려산성

 

운주산 고산사에서 스님과 헤어져 씁쓸한 마음으로 고려산성을 찾았다. 내비게이션에 '아야목 마을 회관'을 입력하고 1번 국도를 타고 북으로 달렸다. 아야목 마을회관은 고등1리 경로당이었다. 노인 한 분이 나오기에 고려산성을 물으니 마을 앞을 지나 산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면서 바로 저기지만 오늘은 저물었으니 가지 말라 한다. 그저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절대 가지 말라 한다. 나는 옛 산성에 오르면 꼭 옛 사람의 숨소리와 이야기를 들으려 하는 버릇이 있다. 어둑한 산성에서 더구나 백제 부흥군의 한 맺힌 영혼이 모여 앉아 내일의 공격을 상의하고 있을 텐데 그들과 만남을 어르신이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 같다. 내가 망설이자 어르신은 더욱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되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아침 다시 찾아간 마을은 남향이다. 고려산성이 있다는 해발 305m 고려산은 묵은 참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봉우리에서 북으로 흘러내린 줄기가 마을을 감싸 안았다. 마치 두툼한 어깨와 울퉁불퉁 근육질 두 팔로 그리 하듯이 말이다. 마을은 볕이 들어 따뜻하다. 북으로 바람을 막아 논밭에 풀이 파랗다. 마을이 끝나고 산이 시작되는 지점에 늪지가 있다. 갈대가 무성하고 버드나무가 우거졌다. 물이 나는 늪이구나. 길이 질퍽하다. 초행길인데 어디고 길을 일러주는 이정표는 없다. 올라가는 길이 제법 가파르다.

숨이 턱에 닿을 때쯤 마루에 도착했다그러나 성벽은 보이지 않고 너른 평지만 보였다. 성의 모습은 역력하다. 외부는 돌로 쌓고 내부는 흙으로 채운 토석혼축형이라는 것이 뚜렷하다. 그런데 성안의 흙이 넘쳐 성석을 덮고, 그 위에 잡초와 잡목이 무성하다. 게다가 무성한 참나무 낙엽이 온통 뒤덮어 성석은 찾을 수조차 없다. 윤곽만 보이는 성의 높이는 대개 3~5m 정도 되어 보였다. 가파른 산인데다가 성을 높게 쌓아서 밖에서 공격해 들어오기는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 같았다.

성을 한 바퀴 돌았다. 성석은 보이지도 않더니 동쪽 끝 마을로 내려서는 길옆에서 널브러진 성석을 발견하였다. 성석은 다듬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자연석을 적당히 맞추어 쌓았나 보다. 성 안 평평한 대지 위에는 참나무만 드문드문 서 있고 성벽 쪽으로는 낮아서 평평하고 가운데는 불룩 나와서 높다.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니 250m쯤 되어 보이는 성 안이 한 눈에 다 들어온다.

한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사람들이 쌓았는지 나지막한 돌탑이 있다. 별로 정성을 들인 것 같지는 않은데 용하게 비바람을 견디고 있다. 돌탑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기와편이 보였다. 기와 조각은 잿빛이었으나 붉은 보랏빛이 배어나올 듯 붉은 빛을 띠기도 했다. 그런 틈에 토기 조각도 보인다. 토기 조각은 두꺼운 것도 있고 얇은 것도 있다. 두꺼운 것은 큰 그릇이고 얇은 것은 작은 그릇일 것이다. 토기는 몇 개의 조각만 보아도 그릇의 종류가 꽤 여러 가지인 것으로 생각된다. 기와 조각이 있는 것은 건물이 있었던 증거이고, 토기 종류가 다양한 것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오랫동안 정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착해서 살았든 농성을 했든 많은 사람이 지속적으로 머물러 살림살이를 했을 것이다. 토기는 안쪽으로 보이는 곳은 무늬가 없고 바깥쪽은 빗살 비슷한 무늬가 있었다.

성 안 바닥은 돌이 많지 않고 흙이 부드럽다. 사람들이 오래 동안 머문 흔적일 수도 있다. 건물은 어디에 있었을까 내부의 가운데에 있었을까 아니면 성의 둘레에 있었을까? 터의 모양을 보면 마을 쪽으로 널찍널찍한 것으로 봐서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표조사를 하면 바로 주추가 드러날 것만 같았다. 기와가 발견되는 것으로 봐서 건물은 꽤 견고했을 것 같았다. 정북토성 건물지처럼 기둥 자국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 높지 않은데도 주변의 산이 다 아래로 보인다. 백제는 475년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성을 많이 쌓아서 고구려와 신라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청주를 중심으로 세종시( 연기지역), 옥천, 대전 부근에 약 200여개의 성을 가진 산성의 나라이다. 그 중 옥천의 산성은 백제가 쌓은 것도 있고 신라가 쌓은 것도 있다. 신라가 쌓은 산성을 백제가 보수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충청의 산성은 의미가 있다.  

연기 지역은 신라 고구려와 백제가 접경을 이룬 곳이다. 이 부근 연기 일대의 운주산성(고산산성)에서 전의 지역의 토성, 이성, 작성, 금이성 등 15개 이상의 산성이 있다. 신라가 충주와 경기 일부를 점령하면서 백제의 근거지이며 중국으로 가는 길목인 서해 바다 쪽을 공략하기 위해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을 진천에 주둔하게 하였다. 진천은 북으로 고구려, 서로 백제와 국경을 이루는 곳이기 때문이다. 백제는 이러한 신라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막기 위해 연기 지역의 산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보루라고 여겨도 될 만큼 아주 작은 산성이지만 주변이 다 내려다보이는 것으로 봐서 삼국쟁패의 시대나 고려시대나 요새가 되었을 것이다.

고려 산성이 운주산성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가 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그런대로 일리가 있다. 아마도 주요 근거지는 주류성으로 짐작되는 금이성이고 마지막 근거지가 운주산성이었다면 이곳 고려산성은 그 중간의 초소나 보루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발견되는 와편이나 토기편은 고려 때의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 고려 태조 왕건의 공덕을 기리는 태조묘太祖廟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봐서 사당을 지키는 사람이 살았을 수도 있다. 고려산성은 백제의 최전방 보루였을 것이다. 백제의 보루였던 산성이 시대를 넘어 고려 시대에는 천안 지방의 외곽 역할을 하고 때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니 산성은 시대의 흥망에 따라 성쇠를 다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산성을 내려오면서 금이성에서 운주산성으로 이어지는 백제 부흥군의 파발이 이 산줄기를 타고 여기서도 잠시 머물렀을 것을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하다. 마을 앞을 지나며 당시에도 마을이 있었던지 어쨌는지 아무것도 상관없는 백성들의 고달픔을 헤아려 본다.


<느림보의 山城 山寺 찾기>

 

시대의 보루 고려산성

 

고산사 정대스님과 작별하고 씁쓸한 마음으로 고려산성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에 '아야목 마을 회관'을 입력하고 1번 국도를 북으로 달렸다. 해발 305m 고려산은 해묵은 참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마루에서 북으로 흘러내린 산줄기가 마을을 감싸 안았다. 마을은 볕이 따뜻하다. 논밭에 풀이 파랗고 끝에는 늪이 있었다. 샘이 있어 산성에 생명수가 되었겠다. 산길은 제법 가파르다.


숨이 턱에 닿을 때쯤 마루에 도착했다성벽은 보이지 않고 넉넉한 평지만 보이는데 뚝눈에도 성의 흔적이 뚜렷했다. 외부는 돌로 쌓고 내부는 흙으로 채운 토석혼축형 성벽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성안의 흙이 흘러내려 성벽을 덮고, 잡초와 잡목이 우거지고 낙엽에 뒤덮였다. 흙에 덮인 성벽은 윤곽으로도 높이가 3~5m 정도는 되어 보였다. 가파른 산인데다가 성벽이 높아서 공략하기는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 같았다.


성을 한 바퀴 돌았다. 동쪽 끝에서 무너져 널브러진 성석을 발견하였다. 성 돌을 다듬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자연석을 교묘하게 맞추어 쌓았을 것이다. 성안 평평한 대지 위에는 참나무만 드문드문 서 있고 성벽 쪽으로는 낮아서 평평하고 가운데는 불룩했다. 가운데 불룩한 데서 둘러보니 둘레 250m쯤 되어 보이는 성 안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한가운데 나지막한 돌탑이 서 있다. 성 돌을 모아 대충 쌓았는데도 넘어지지 않았다. 돌탑을 들여다보다가 와편을 발견했다. 기와는 잿빛이었으나 붉은 물이 배어나온 듯 붉은 보랏빛을 띠기도 했다. 돌 틈에 토기편도 보였다. 토기 조각은 두꺼운 것도 있고 얇은 것도 있다. 두꺼운 것은 큰 그릇이고 얇은 것은 작은 그릇일 것이다. 몇 개의 토기 조각만 보아도 그릇의 종류가 꽤 다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와편은 건물이 있던 증거이고, 토기편이 다양한 것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지속적으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 안 바닥은 돌이 많지 않고 흙이 부드럽다. 많은 사람들이 머문 흔적일 수도 있다. 터의 모양을 보면 마을 쪽이 널찍널찍한 것으로 봐서 그 자리에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표조사를 하면 바로 주추가 드러날 것만 같았다. 기와가 발견되는 것으로 봐서 건물은 꽤 견고했을 것 같았다. 정북토성 건물 터처럼 기둥 자국이 발견될 지도 모른다


연기 지역은 신라, 고구려, 백제가 접경을 이룬 곳이다. 이 부근 연기 일대의 운주산성(고산산성)을 비롯하여 이성, 작성, 금이성 등 15개 이상의 산성이 있다. 고려산성은 아주 작은 산성이지만 주변이 다 내려다보이는 요새에 자리 잡아 시대마다 지역의 보루가 되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백제의 최전방 보루였을 것이다. 시대를 넘어 고려 시대에는 천안 지방의 외곽 역할을 했고, 때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니 성돌 하나하나마다 시대의 흥망에 따라 역사의 성쇠를 모두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산성이 운주산성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가 되었을 것이라는 짐작도 그런대로 일리가 있다. 아마도 주요 근거지는 주류성으로 짐작되는 금이성이고, 마지막 근거지가 운주산성이었다면 이곳 고려산성은 그 중간의 초소나 보루가 되었을 것이다.

산성을 내려오면서 금이성에서 운주산성으로 이어지는 백제 부흥군의 파발이 이 산줄기를 타고 여기서도 잠시 숨을 돌렸을 것을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하다. 마을 앞을 지나며 예나 지금이나 아무런 상관도 없이 역사의 질곡에 얽매어야 하는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헤아려 본다.


[느림보의 山城 山寺 찾기]시대의 보루 고려산성
이방주 충북수필문학회장
2016년 02월 22일 (월) 18:03:34충청매일 webmaster@ccdn.co.kr

 

 

고산사 정대스님과 작별하고 씁쓸한 마음으로 고려산성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에 ‘아야목 마을 회관’을 입력하고 1번 국도를 북으로 달렸다. 해발 305m 고려산은 해묵은 참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마루에서 북으로 흘러내린 산줄기가 마을을 감싸 안았다. 마을은 볕이 따뜻하다. 논밭에 풀이 파랗고 끝에는 늪이 있었다. 샘이 있어 산성에 생명수가 되었겠다. 산길은 제법 가파르다.

숨이 턱에 닿을 때쯤 마루에 도착했다. 성벽은 보이지 않고 넉넉한 평지만 보이는데 뚝눈에도 성의 흔적이 뚜렷했다. 외부는 돌로 쌓고 내부는 흙으로 채운 토석혼축형 성벽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성안의 흙이 흘러내려 성벽을 덮고, 잡초와 잡목이 우거지고 낙엽에 뒤덮였다. 흙에 덮인 성벽은 윤곽으로도 높이가 3~5m 정도는 돼 보였다. 가파른 산인데다가 성벽이 높아서 공략하기는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 같았다.

성을 한 바퀴 돌았다. 동쪽 끝에서 무너져 널브러진 성석을 발견했다. 성 돌을 다듬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자연석을 교묘하게 맞추어 쌓았을 것이다. 성안 평평한 대지 위에는 참나무만 드문드문 서 있고 성벽 쪽으로는 낮아서 평평하고 가운데는 불룩했다. 가운데 불룩한 데서 둘러보니 둘레 250m쯤 되어 보이는 성 안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한가운데 나지막한 돌탑이 서 있다. 성 돌을 모아 대충 쌓았는데도 넘어지지 않았다. 돌탑을 들여다보다가 와편을 발견했다. 기와는 잿빛이었으나 붉은 물이 배어나온 듯 붉은 보랏빛을 띠기도 했다. 돌 틈에 토기편도 보였다. 토기 조각은 두꺼운 것도 있고 얇은 것도 있다. 두꺼운 것은 큰 그릇이고 얇은 것은 작은 그릇일 것이다. 몇 개의 토기 조각만 보아도 그릇의 종류가 꽤 다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와편은 건물이 있던 증거이고, 토기편이 다양한 것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지속적으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 안 바닥은 돌이 많지 않고 흙이 부드럽다. 많은 사람들이 머문 흔적일 수도 있다. 터의 모양을 보면 마을 쪽이 널찍널찍한 것으로 봐서 그 자리에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연기 지역은 신라, 고구려, 백제가 접경을 이룬 곳이다. 이 부근 연기 일대의 운주산성(고산산성)을 비롯해 이성, 작성, 금이성 등 15개 이상의 산성이 있다. 고려산성은 아주 작은 산성이지만 주변이 다 내려다보이는 요새에 자리 잡아 시대마다 지역의 보루가 됐을 것이다. 처음에는 백제의 최전방 보루였을 것이다. 시대를 넘어 고려시대에는 천안 지방의 외곽 역할을 했고, 때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니 성돌 하나하나마다 시대의 흥망에 따라 역사의 성쇠를 모두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산성이 운주산성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가 되었을 것이라는 짐작도 그런대로 일리가 있다. 아마도 주요 근거지는 주류성으로 짐작되는 금이성이고, 마지막 근거지가 운주산성이었다면 이곳 고려산성은 그 중간의 초소나 보루가 됐을 것이다. 산성을 내려오면서 금이성에서 운주산성으로 이어지는 백제 부흥군의 파발이 이 산줄기를 타고 여기서도 잠시 숨을 돌렸을 것을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하다. 마을 앞을 지나며 예나 지금이나 아무런 상관도 없이 역사의 질곡에 얽매어야 하는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헤아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