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기가 꽃에는 물을 줘야 하는 것을 어찌 알았을까
우리 손자 규연이가 말을 배운다. 이제 21개월도 안 되는 고 작은 입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 처음에는 단어를 하나씩 말하더니 차츰 두 단어를 붙여서 말한다. 예를 들면 고추를 보면 "매워"라고 말하더니 며칠 있다가 "하부지 고추는 매워요. 규연이는 못 먹어요." 라고 말한다. 단어를 붙여 말하는 듯하다가 1주가 못 되어서 하나의 문장을 만들어서 의사 표현을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하나의 문장에서 성분을 교체해 가면서 말을 만든다. 고모 방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는 "고모 없네. 고모 어디 갔지?" 하다가 제 엄마가 또 슬쩍 없어지면 "엄마 없네. 엄마 어디 갔지?"라고 말한다. 운전하는 할아버지 차에 타고는 "하부지 뭐해요?"하고 묻는다. “규연이 태우고 운전해.”하고 답하면 "하부지 운전 조심하세요."라고 한다. 제 아빠에게 하던 말을 기억해서 할아버지에게는 변화된 상황에 따라 단어를 바꾸어 말하는 것이다. 또 한 일주일쯤 지나서는 이제 말을 만들어 한다. "하무니 안녕하세요?" "하무니 규연이 왔어요." "하무니 어디 갔다 와요?" 이런 말을 순서에 따라서 할 줄 안다.
말을 배워가는 과정이 신비롭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말을 알아듣기만 하고 자신의 의사를 음성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때 있던 일을 기억해서 말하는 것이다. 말을 하지 못할 때 보여 준 그림, 불러준 노래, 장난감 이름 같은 것들을 다 기억해 낸다. 백지에 잠자리를 그리면 대번에 "잠자리"하고 소리를 지른다. 한 달에 한 번 볼까 말까하는 고모 사진을 보고도 "고모"라고 말하며 "고모는 왜 안 오지?"하고 궁금해 한다.
아기를 아기로만 보는 무식한 할아버지는 반성해야 한다. 아기는 말하지 못하니까 알아듣지도 못하고 생각도 정서도 인격도 없을 것이라고 치부해 버린 할아버지는 반성해야 한다. 아기도 나름의 정서가 있고 느낌이 있고 기억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기도 섭섭하고 어른들의 나쁜 말 때문에 상처를 받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는 아기들의 연한 가슴에 맺힌 정서적 상처는 더 오래 갈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규연이가 거실 탁자에 몸을 의지하고 힘을 준다. 아마도 '응가'를 하는 모양이다. 할아버지는 그냥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하무니 규연이 응가했어요."
할머니가 달려와서 호들갑을 떤다.
"그래? 아이고 착하지 우리 규연이 응가 했어요? 잘했어요. 아이고 착하지. 그럼 응가 닦으러 가야지."
거기까지 좋았는데 바보 할아버지가 쓸데없이 화장실에 따라갔다.
"아이 냄새. 규연이 응가 냄새 지독하네."
바보 할아버지의 이 말은 따지고 보면 엄청난 비난이다. 하얀 화선지 같은 규연이 마음에 먹물을 쏟은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상처를 주고도 그게 아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깨닫지 못하고, 아기 응가를 변기에 넣으면서도 기저귀를 싸서 휴지 봉지에 넣으면서도 계속 "아이 냄새."를 반복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이 녀석이 소리를 지른다.
"아니야. 아니야. 하부지 저리 가. 하부지 저리 가."
그래도 나는 내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몰랐다. 여린 아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몰랐다.
이틀 후에 규연이가 또 놀러 왔다. 그래도 손자는 할아버지를 싫어하지 않고 함께 잘 놀았다. 그림도 그리고, 그림책도 보고, 자동차도 굴리면서 한참을 잘 놀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이 녀석이 구석진 옷방으로 들어간다. 문을 살며시 닫으면서 "하부지 오지 마."하고 당부한다. 그래도 궁금해서 들여다보려니까 "하부지 오지 마. 저리 가"하고 문을 닫는다. 그러더니 의심이 가는지 문틈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별로 위험할 게 없는 옷방이므로 멀찍이 있다가 궁금해서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인가? 아기는 옷방 사다리를 붙잡고 힘을 주고 있었다. 응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아가가 왜 숨어서 응가를 해야하는지를 몰랐다. 한참 후에 문을 열고 나오기에 물었다.
"우리 아가 응가 했어?"
"아니야 응가 안 했어요."
"하부지가 한 번 볼까? 닦아줄게."
"아니야. 하부지 저리 가."
이 때 할머니가 쫓아 왔다. 그리고는 할머니에게 순순히 안겨 화장실로 갔다. 나는 그제서 엊그제 내가 준 상처를 기억해 냈다. 할아버지가 손자의 자존심에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내가 이제 막 말을 배운 손자에게 '저리 가'야 되는 불쌍한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까닭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기를 데리러 온 며느리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규연이 뿐만 아니라 아기들 앞에서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까지 조심하고 의도적이었던 며느리에게 미안했다.
아기들의 여린 정서에는 교육적인 의도가 결여된 작은 농담 한 마디도 상처가 된다. 이제 3월이면 규연이가 어린이집에 가야 한다. 3월에 둘째를 낳고 또 1년이 지나면 교사인 규연이 엄마는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 일하는 며느리를 안심시킬 수 있는 할아버지의 인품을 준비하지 못한 나는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요즈음은 어린이집에서 선생님들이 아기들 뺨도 때리고 패대기도 친다는 뉴스가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장식한다. 할아버지의 농담에도 상처를 받는 여린 아가들이 젊은 보육교사의 매운 손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사회에 대한 분노를 아가에게 폭발하는 보육교사에게 아기를 맡겨야 하는 것이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자랑하는 이 나라의 오늘이다. 일하는 엄마들을 안심시키지 못하는 이 나라가 점점 더 걱정스럽다. 할아버지도 어리이집 보육교사도 이 나라도 아가들에게 모두 '저리 가'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2015.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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