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한국의 사찰

백제의 恨 - 운주산 비암사

느림보 이방주 2013. 10. 20. 23:05

백제의 한이 서린 운주산 비암사

 

비암사는 절집이 아름답다는 말을 언뜻 듣고 가까우니 한 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고복 저수지 근방은 많이 가 보았기 때문에 길이 설지 않았다. 가는 길에 들렀던 연화사 스님의 그윽한 염불소리가 잔영으로 남아 귀에 쟁쟁하다. 비암사로 올라가는 길에 도깨비 도로라는 곳이 있어 실험을 해 보니 신비함을 느낄 수 없었다. 절 진입로가 하도 한적해서 빨리 사찰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다시 시도는 하지 않았다. 산 중턱까지 올라가는 찻길은 좁은 1차선 도로가 구불구불하다. 사바세계를 버리고 정토 세상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굽어 있을까?

 

 

절 아래에 주차장은 보이지 않고 정원을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정원은 세련된 미모를 자랑하는 이십대 젊은 여인의 신선한 아름다움이라기보다 오십 고개를 막 넘어선 가을의 여인처럼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주차장은 정원보다 위에 있었다. 절의 규모에 비해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지 않는지 주차장은 그리 넓지 않았다. 마치 큰집의 바깥 마당처럼 정답다. 차에서 내리는데 돌계단 위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사천왕 대신 부처님을 수호하고 있었다. 돌계단을 올라서니 마음이 턱 놓이고 가슴이 따뜻해 오는 기분이었다. 보통 새로 짓는 절집에 가 보면 대웅전이 어마어마해서 위압적이고 대웅전 옆에는 사찰의 크기에 어울리지 않는 대불이 버티고 서 있기 때문에 공포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사찰은 안온하고 포근하다. 마당 한 가운데에 3층 석탑이 혼자 얌전하게 서 있었다. 절은  나즈막한 산이 양팔을 벌려 한 아름에 쓸어 안을 수 있을 만큼 아담하고 정겹다. 산은 높지도 낮지도 않아 어머니 품처럼 따듯하다. 산은 온통 숲이다. 날카로운 바위 한 점 없어 더 포근하다.

 

본전인 극락보전의 빛 바랜 단청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극락보전이라는 현판은 마치 정토 세상에 도달한 어는 묵객이 대충 써서 걸어놓은 것처럼 순진한 필체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날카롭고 힘찬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석으로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기단 위에 널직널직한 덤벙주추를 놓았다. 지붕을 받치고 서 있는 기둥은 흔히 말하는 배흘림 기둥이었다. 기둥마다 주련의 필체는 현판보다 아름답다. 지붕을 떠 받들고 있는 서까래나 도련, 부연이 다 정교하고 아름답다.

 

아미타부처님은 매우 높은 불단에 모셔졌다. 아미타 부처님은 매우 아름답다. 극락보전이 세종시에서 지정한 유형문화재 1호이고 아미타 부처님도 세종시 유형문화재라고 한다. 극락보전에는 아미타불이 사바세계를 굽어 보고 밖에서는 아무렇게나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부처가 되어 서 있다. 불전이나 불당 밖이나 세상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 불계나 사바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 부처님의 심중일 것이다. 오전 예불을 올리는지 스님의 모습과 신도 몇이 보인다. 아내와 함게 극락보전에 들어섰다. 스님 두 분과 열 남짓 신도가 예불에 참여하고 있었다. 삼배를 올렸다. 거룩하다. 왠지 다른 절에서 보다 더 거룩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님의 독경은 더욱 청아하고 신도들의 기도가 거룩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미타부처님의 정토세상이라 그런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도 않다. 그냥  왠지 두렵지 않고 조심스럽지도 않고 편안하다. 볕은 불당 안으로 끝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하늘에는 새가 날아간다. 불당에서 나오노라니 정원이 온통 꽃밭이다. 아니 온 세상이 꽃밭이다. 내 영혼이 꽃밭이다. 몇 십년을 두고 드나들었던 우리절 보살사 불전처럼 그렇게 편안하다.

 

주존불인 아미타부처님은 극락보전 절집에 비해 조금 커 보였다. 17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유형문화재라고 한다. 다른 부처님에 비해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호상이 자연스럽고 평온해 보였다. 이 부처님은 목조나 철제가 아니라 진흙으로 빚어져 모셔졌다고 한다. 흙으로 빚어서 만들었기에 안내판에도 전의 비암사 소조아미타여래좌상으로 설명되어 있다. 듣기는 운주산 비암사라고 들었는데 설명에는 전의 비암사라고 한 것이 궁금했다.  

 

아내와 불당에서 나와 주변을 돌아보았다. 절 마당은 잔디가 깨끗하다. 어느 하나 가지런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늘에 구름도 정갈하고 나무들이 물들어 가는 모습도 정갈하다. 불당의 축대를 쌓은 해묵은 돌덩이도 먹을 만큼 나이 때를 입고 있었으나 정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정원에 심은 꽃나무들이 전지를 한 흔적이 없이 제멋대로 자랐는데도 정갈하고 조화롭다. 마당에 티끌 한 점 없다. 불당의 뒤안까지도 잡초 하나 없다. 스님들의 수행이 이쯤 미쳤다면 신도들이 받는 감동 또한 배가 되리라.

 

삼층 석탑은 극락보전 아미타불 좌측으로 몇 보쯤 빗겨서 서 있다. 탑은 보물처럼 보호 철책을 세워 놓았는데 어쩐지 기단과 상륜부가 보수한 흔적이 있다. 1960년 상륜부에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이 발견되어 국보 160호로 지정

된 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불비상이 발견된 것은 연화사에 보관된 것과도 공통점이 있는데 이것은 연기군 지방에 사찰에서 발견된 불비들과도 관련성이 있다. 문화재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 이 절 이름이 비암사라고 한 것을 두고 지역 주민들이 뱀절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어울리게 뱀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아마도 그것은 지역 주민들이 절에 관한 선성함을 주기 위해 만든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불비가 발견되고 나서 이절 이름이 비암사가 된 연유가 밝혀 졌다니 그것도 다행이다. 탑은 일부 훼손되기는 했지만 고려시대부터 건립된 것이라니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라 하겠다. 다만 궁금한 것은 이 탑에서 불비만 나온 것인지 아직도 부처님의 진신 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극락보전 바로 뒤에 대웅전이 있다. 극락보전과 대웅전이 함께 있는 것이 이상했는데, 역시 문화해설가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게 되었다. 극락보전에서 <전의 비암사 영산회 괘불탱화>가 발견되었는데 탱화에 모셔진 부처님이 석가모니부처님이라 한다. 그래서 탱화의 주인공을 모시기 위해 대웅전 불사를 바로 몇 해 전에 시작하여 대웅전을 건립했다고 한다. 괘불 탱화는 1657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린 사람과 연대가 확실히 전해지는 드문 탱화라고 한다. 나는 이 탱화가 보고 싶었지만 아무날 아무에게나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매년 4월 15일에 탱화를 내걸고 야단 법회를 연다고 한다. 그 때는 반드시 참석하여 탱화를 보고 부처님의 은혜를 감지하리라 마음 먹었다. 또 대웅전에는 삼층석탑에서 나온 불비가 모셔져 있다. 연화사에 모셔진 불비는 진품인데 비해 여기 모셔진 불비의 진품은 국립청주박물관에 있고 여기 모셔진 것은 모조품이라고 한다.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안타깝다.

 

비암사는 매우 의미 있는 절이다. 백제가 멸망하고 12년만에 세워졌는데 그 이유는 바로 지역 주민이나 백제 유민이 백제의 남은 정신을 지탱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여기서 산줄기를 타고 계속 올라가면 운주산이 나오고 운주 산성을 만나게 되는데, 산 정상에 <백제의 얼> 탑이 있다. 운주산성이 백제 부흥 최후의 산성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마도 그것과 관련이 될 것이다. 백제 유민들이 이 운주산 줄기에서 성을 쌓고 최후까지 백제 부흥을 위해서 버티다가 결국은 그 꿈을 버려야만 했을 것이다. 통일 신라는 백제를 차지하고 고구려를 당에 헌납한 뒤 백제와 고구려의 역사를 철저히 말살했다. 물론 백제나 고구려의 정신까지 모든게 땅 속으로 스며들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렇게 완전히 백제가 멸망하고 나니 당으로 끌려간 많은 백제인들이나 백제 왕족의 떠도는 영혼을 위로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백제 유민이나 연기 지역의 주민들이 조금씩 정성을 모아 여기 운주산 자락에 절을 세우고 역대 왕의 유혼을 달래게 되었다고 한다. 4월 15일에는 바로 유혼을 달래기 위한 야단법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날 백제 역대 왕의 영혼에 대한 재를 올린다고 한다.

 

운주산에 가면 고산사가 있다. 문화재해설가의 말에 의하면 비암사가 있는 이 산이 운주산이고 고산사가 있는 지금의 운주산은 고산이라고 한다. 그래서 고산사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지역민들의 말을 들어 잘못 기재하는 바람에 고산이 운주산이 되고 진짜 운주산은 금성산이 되었다니 그 말은 운주산을 서로 쟁탈하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 생각에는 운주산으로부터 여기까지 끊이지 않고 뻗어 내려온 것이 모두 운주산이기에 비암사를 운주산 비암사라고 일컫는게 아닌가 한다. 지금은 1번 국도에 의해서 끊어졌지만 결국은 이 산줄기에서 유민들의 백제 부흥 운동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비암사 구석마다 백제인들의 한이 서린듯하다. 백제 유민의 영혼이 그들의 숨결이 나무에도 돌에도 다 스며 아직도 숨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산 줄기는 고려시대 몽고에 대한 치열한 항거가 연기대첩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고, 임진왜란 때나 치열한 격전지였다고 한다. 물론 6.25 전쟁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개미고개 전투가 아직도 전사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용맹스러운 고구려 군대도 이 운주산 줄기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한다. 그에 따라 지역 주민들의 삶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 생각해 볼 만하다. 역사는 그 때마다 이 지역 사람들에게 고통만 안겨 준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 역대왕의 영혼을 위로하는 재를 올리기 위하여 사찰을 건립했다니 얼마나 갸륵한 일인가?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어려움을 알고 슬픔을 당해본 사람이 진짜 슬픔을 안다. 

 

<비암사의 전설>  

옛날 어느 날 저녁 비암사에 젊은 청년이 찾아와 절을 둘러보고는 탑을 돌기 시작했다. 찾는 이가 많지 않는 깊은 산중에 밤 깊도록 매일 탑을 돌다가 아침이 오면 사라진다. 스님은 심상치 않은 궁금증에 물과 음식을 건네며 사연을 물어보아도 웃기만 하고 청년은 대답이 없었다. 더욱 궁금해진 스님은 뒤를 밟기로 하고 탑돌이를 끝낸 청년의 뒤를 쫓았다.


청년은 마을이 아닌 절 뒤의 산으로 오르더니 바위굴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상한 생각에 굴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간 스님은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커다란 구렁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스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스님이 뱀에게 묻자, 아무도 모르게 100일 동안 절에서 탑돌이를 하면 구렁이 몸을 벗고 사람이 되는 소원을 이룰 수 있었는데 99일을 기도를 하고, 그만 하루를 남겨두고 스님에게 굴이 발각되어 소원을 영영 이루 수 없게 되었다.


잘못된 호기심 때문에 구렁이의 환생을 막게 된 스님은 그날부터 자신 때문에 사람이 되지 못한 죄책감이 들어 구렁이를 돌보며 평생을 보냈다고 한다. 비암사 동쪽 산 정상에는 실제로 바위굴이 있다 하니 옛 전설이 더욱 신비하게 들린다. 그 후 비암사는 뱀 절이라고 불리었다고도 한다.

 

절에서 돌아 내려오는데 담벽에 "아니 오신듯 다녀가소서"라고 쓰인 목판을 발견 하였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새겼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와서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고민한다. 역사에 무엇이든 남기고 가려고 발버둥친다. 그러나 제행이 무상이다. 다 헛것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사실 내가 남기는 몇 편의 글도 몇 권의 책도 모두 세상의 쓰레기이다. 누가 역사에 어떤 업적을 남기든 그것은 쓰레기나 다름없다. 산에 갔다가 발자국 남기는 것도 산에게 미안스럽다던 친구 연선생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우리 발자국 자체가 쓰레기고 세상에  폐를 끼치는 것이다. 남기려는 삶은 다 버리고 이제 하나씩 내려놓는 삶을 살아야겠다. 그러나 내려놓을 것을 내려놓는 곳은 과연 어디인가? 그곳은 바로 세상이고 역사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이 세상에 온 것 자체가 벌써 쓰레기이다.  

 

극락보전 앞에 거북이 입에서 나오는 감로수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물을 감로수 한 구기를 마시니 시원한 기운이 온몸에 전해지는 느낌이다. 바로 옆에 달마스님석이 참선에 들어 있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꼭 달마의 상호를 닮아 그렇게 혼자 이름 붙여 보았다. 물은 끊이지 않고 흐른다. 역사는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지우려  한 행위가 역사에 남는다. 그러므로 원가 남기려 하지 않아도 남게 마련이다. 세상에 뭔가 남기려 발버둥치면 그 발버둥의 그림자가 역사에 드리워지게 마련이다. 그냥 가는 것이다. 아니 온 듯 그냥 가는 것이다. 산줄기를 타고 금이성에 가고 싶었으나 아내가 힘들어 해서 그냥 돌아 나왔다. 그렇게 해야 바로 또 오게 된다. 바로 또 찾아 오고 싶은 절이다. 아니 온듯 다녀 가야 또 올 수 있다. 마음을 두지 말고 가슴을 비우고 가야 한다. 내려 놓을 것도 없이 가져 갈 것도 없이 그냥 허한 마음으로 돌아가자.

(2012.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