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3·20 대란이라고 하는 KBS, MBC, YTN 등 방송사 통신망과 금융망 장애는 전국을혼란속에 빠뜨렸다. 폭력을 저지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쾌재를 올리고 있을 것이다.
북에서는 핵실험을 하고 3,4분이면 이 땅을 초토화시킬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소름끼치는 말이다. 남에서는 그렇다면 북의 지휘부까지 공격하겠다고 받아쳤다. 북에서는 서해 5도 부근에서 연일 포격 훈련을 하고, 남에서는 한미 합동 군사훈련으로 응답했다.
드디어 미 공군의 가공할 만한 B-52 폭격기가 한반도 상공에 날개를 폈다. 맑고 푸른 하늘을 덮을 듯이 날개를 펼치고 네 줄기 검은 구름을 긋는 모습이 폭력적이다. 수소폭탄 등 각종 포탄을 장착하고 괌에서 4시간이면 날아와서 북녘을 초토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오산 기지에 내려앉은 B-52 폭격기 앞에 열을 맞추어 진열해 놓은 포탄들이 우리를 경악하게 한다. 남북이 주고받는 폭력적 언사를 감당하기 어려울 텐데도 우리는 이미 둔감해졌다.
폭력을 주고받는 것은 남과 북 사이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3·20 대란이 있던 날, 국회는 우여곡절 끝에 합의했던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순간에 깨버렸다.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이 가관이다. 국민들이 실망하는 것은 어느 한쪽에 대해서가 아니라 국회라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지도급 인사들이 저지르는 탈세, 병역기피, 전관예우 등 파렴치한 행위들이 뉴스를 더럽힌다. 이 모두 국민에 대한 폭력이다.
얼마 전 학교 폭력에 견디다 못한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보도는 우리를 가슴 아프게 했다. 그런 보도 끝에 방송사들은 학교에 설치한 CCTV는 관리가 안되어 무용지물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실제로 취재를 핑계로 학교에 들이닥쳐 CCTV를 확인하기도 했다. 보도의 방향을 미리 정해놓고 취재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폭력이란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낙인(烙印)이라는 말이 있다. 죄수의 몸에 범죄 사실을 불도장으로 찍는 형벌을 말한다. 당국은 폭력 행위를 저지른 학생의 생활기록부에 폭력 사실을 기록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아이들에게 낙인을 찍고 나면 가르침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현장 교사들은 기가 막힌다. 폭력은 폭력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최근 어떤 학부모는 자식을 체벌했다고 친지들을 동원하여 교사를 집단폭행하고 교장실 기물을 파괴한 사건이 일어났다. 교사의 체벌은 벌이 아니라 폭력이라 오해한 것이다. 당국은 그들을 입건했다. 폭력의 연쇄반응이다. 학교 폭력을 예방한다는 핑계로 교내에 CCTV를 설치하고, 교문에서 복장을 검사하고, 강제로 머리를 자르게 하고, 핸드폰을 압수한다. 가치관의 변화를 꾀하는 설득이 없이 제재만으로는 효과가 없다.
다른 아이들에 대한 배려 없이 제 자식만 수십만 원짜리 다운재킷을 입혀 등교시키는 부모도 간접적인 폭력자이다. 아이들에게 폭력을 가르치는 것은 어른들이다. 학교에 폭력을 불러들인 것은 폭력적인 사회이다. 사회는 학교가 전인교육을 포기했기 때문이라 말하지만, 지식 교육을 중심으로 인성 교육을 하면서 아울러 입시지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사회로부터 삶을 배운다. 사회의 폭력적 분위기를 답습한다. 폭력적인 사회는 아이들을 사랑의 세계로 이끌어 낼 수 없다. 아이들에게 문화와 예술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들이 시를 좋아하고 문학작품을 읽으며,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면서 감성을 키워나갈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지은 노랫말에 곡을 붙여 함께 노래하는 동안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해야 한다. 미래의 가치는 권력의 독선이 아니라 나눔과 사랑이라는 것을 일러주어야 한다. 사랑으로 사랑을 가르쳐야 하는 것은 학교만이 아니라 사회의 공동 책임이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