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0일,
아내와 함께 도명산에 갔다. 처음에는 미동산 산책길을 걸을까 하다가 도명산 단풍 구경을 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도명산은 초보자들이 가는 산으로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처음에 올라 갔다가 작으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에 반했다. 그 후 5월 쯤인가 갔는데 정상에서 첨성대 쪽으로 벋어내린 산줄기의 녹음 빛깔에 아주 빠져 버렸다. 틈만 나면 들렀는데 최근 몇년 동안 다른 산에 다니느라 소홀했다.
1. 길
주차된 버스나 승용차가 많았지만 너른 주차장에 비해 한산한 편이다. 주차를 하고 등산 준비를 한 다음 아내와 함께 학소대까지 걷기로 했다. 주차장에서 운영담까지 가는 길은 등산하는 사람들이 여유있게 걷고 있었다. 양쪽에 심어놓은 각종 나무들이 종류에 따라 다른 색깔로 물들이기를 하고 있었다. 떨어진 낙엽이 뒹굴고 소슬 바람이 불 때마다 몇 잎씩 날리기도 한다.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 가을 하늘은 햇살을 내리쏟고 있었다. 사람들은 바쁠 것도 없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좋은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 간다.
첨성대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를 지나 학소대로 가는 길이 아내는 지루하다고 하지만 흐르는 물과 주변의 단풍을 보면서 천천히 걷는 맛이 있었다. 박이문 교수는 그의 수필에서 길은 인간과 자연이 최초로 만나는 흔적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 산책로는 블럭을 깔아 그런 자연적인 맛은 나지 않지만 인간과 자연의 만남이라는 의미는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길을 통하여 인간과 인간이 소통을 이루고 길을 통하여 문화가 들어오고 문명 속에 시달리던 인간이 자연과 만나게 된다. 우리는 지금 길을 통하여 자연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학소대에서 다리를 건너 본격적인 등산로를 걷기 시작했다. 길은 평탄하고 좋았다. 정상 가까이 가자 돌계단과 철 사다리이다. 사람들은 자연을 그냥 두지 않는다. 하긴 이렇게 계단을 만들어 놓으면 산은 덜 훼손된다고 한다. 그러나 만들어 놓는 것 자체가 훼손이 아닐까? 돌계단과 철사다리가 없는 곳은 나무뿌리들이 나와서 사람들의 발길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사람이나 나무나 남의 발에 밟힌다는 것은 가장 큰 괴로움일 것 같다. 그러나 가급적이면 나무뿌리를 밟지 말자. 가능하면 남을 밟지 말아야 한다.
전화가 왔다. 서비스지역이 아니라는데 요행이 통했다. 11월 24일 한국수필 모임 때 나더러 작품 발표를 하란다. 그러나 그날 참석할 수 없음을 알렸다. 전화를 받는 사이 아내는 쏜살같이 올라갔다. 이제 산에 오면 아내를 따라갈 수 없다. 아무리 걸어도 보이지 않는다.
올라가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올들어 내 마음이 배배 꼬여 있다. 자연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왜 그럴까?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세상이 검게 보인다. 내가 어떤 모순을 만들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하는데 남들이 만드는 모순을 찾으려고 눈이 발갛다. 耳順이 되면 눈과 귀가 순해진다는데 노여움만 늘어난다. 내가 내뱉는 말들에는 분노와 미움이 담겨 있다. 내가 쓰는 글에도 분노가 가득하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돌아보았다. 이렇게 오르막길에서 나는 나에 대한 슬픔을 만난다. 말을 줄이자. 노여움을 풀자. 나를 돌아보자. 시야를 넓히자. 보이는 대로만 보자. 세상에 따뜻한 손을 내밀어 보자. 입에 온기를 담고 말하자. 땀에 전신이 젖었다. 숨이 가쁘다. 그러자 바로 우뚝 마애불이 막아 선다. 내안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듯 미소가 깊다. 잔잔한 미소가 얼굴에 가득하다. 마지막 철계단을 돌아 아내를 만났다.
주차장에서 화양서원으로 가는 길
2. 운영담
운영담은 오전 햇살이 바위벽에 부딪혀 물에 그림자를 담그고 있다. 알맞게 솟은 암벽 아래 구름 그림자가 어리는 물이 있다. 주자의 시 天光雲影共徘徊가 아니라도 쪽빛 물에 잠긴 구름과 단풍이 발길을 머물게 한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모래가 깨끗하고 물이 맑은 것인지 물이 맑아 모래가 깨끗하게 보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바위 사이를 시끄럽게 흐르던 물이 이 만동묘 앞에 와서 머물러 배회하는 이유는 도 무엇일까? 물흐름과 모래만 보면 도저히 계곡의 물이 아니라 낙동강 하류에라도 온 것 같다. 아무튼 물은 고요하다. 출렁이지도 않는다. 흐르는 것 같지 않게 흐른다. 구름이 머물러 있다. 하늘은 여기에 구름을 비치는데 사람들은 여기 서서 무엇을 비치어 보고 지나갈까? 단순하게 구름 그림자만 보고 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누구나 가슴에 구름은 있는 법이 아닌가? 여기서 바로 머지않은 곳에 우암선생의 유적지가 있다. 화양서원. 만동묘 등은 몇해 전까지만 해도 터만 남아 있었는데 원형대로인지는 몰라도 복원을 해서 텅빈 언덕을 채웠다.
노자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고 하였다. 물은 가장낮은 곳에 있으면서 노하지도 않고 성내지도 않고 다툼도 없으니 최고의 선이라고 하였다. 善은 무엇일까? 좋은 것인가? 잘하는 것인가? 착한 것인가? 그 모두인 것인가? 대학에서 말하는 明明德과 親民 이후에 이르러야 할 在止於至善의 善일 것이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계곡의 물이든 池든 潭이든 澤이든 물을 지향했는지 모른다. 구름까지 비치는 운영담에 마음이 비칠까 두려워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물은 낮은 곳에 있다고 노자가 말했는데 내 생각에는 낮은 곳으로 향한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물은 낮은 곳으로 향하고 적은 곳으로 향한다. 가만히 보면 물은 많은 곳에서 자꾸 적은 곳으로 향한다.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더 보태서 수평을 이룬다. 평등함이다. 물은 진정한 평등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맞다. 진정한 의미에서 평등함, 공평함을 이루는 것이 바로 물이다. 사실 하늘은 세상 모든 이에세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사람의 소유를 뺏어 자신의 주머니를 가득 채우려 한다. 공평함보다 많이 갖는 것은 이미 탐욕이다. 본질적으로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뺏어 가진 것이다. 애초에 자신의 지분으로 하늘이 분배해 준것만을 가지면 되는 것이다. 전에 나는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바로 권력을 창조한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이제 수정해야겠다. 너무 많이 가진 것을 본래 소유해야 할 사람에게 돌려 주는 것이 권력을 창조하는 일이 될 것이다. 기업도,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정치를 하는 사람들도 이런 원리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임기를 마치고 능력 운운하면서 연임하지 말자. 좋은 자리를 세습하지 말자. 권력을 가지 자들이 자기 사람만 골라 쓰지 말자. 재벌들은 중소기업에게, 사용자들은 비정규직에게, 고위직은 하위직에게 가진 것을 흘려 보내자.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많이 괸 곳에서 덜 괸 곳으로 흘러 가듯이 흘려 보내자. 내가 많이 가진 것은 무엇일까? 그걸 찾아보아야겠다.
절벽과 쪽빛 계수가 어루러진 운영담
낮은 데로 흐르는 물
3. 만동묘 암서재
萬折必東(만절필동: 만번 구불구불해도 동으로 간다.) 만동묘 묘호에 담긴 의미이다. 선비의 정신이다. 선비는 자연을 보고 그냥 보지 않는다. 자연에서 인간을 보고 삶의 원리를 발견한다. 황허가 만번을 구불구불 흘러도 결국은 동으로 흘러간다. 그런 말이다. 화양 구곡을 흐르는 물도 아홉번 굽혀도 결국 서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 우리가 사는 동안 때로 굽힐 때도 있다. 그러나 그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 우암 선생의 마음 바탕이다. 우암은 제주로 귀양가면서 제자인 권상하에게 명나라 신종황제와 의종황제의 위패를 이곳에 모시라고 부탁했다 한다. 신종은 임란 때 우리에게 도움을 준 황제이고 의종은 나라가 망하면 임금이 설 자리를 일러 정도를 깨우쳤다고 한다.
만동묘와 함께 화양 서원이 있다. 화양 서원은 서원 설립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때 세워졌다고 한다. 그런데도 숙종은 우암을 예외로 하여 화양이라는 사액을 내렸다고 한다. 華陽은 의미 깊은 말이다. 華는 중화 즉 중심을 말하며 양은 음과 양의 재생과 회복을 말한다. 처음은 결국 나중이 되고 나중은 처음이 된다. 어둠은 밝음으로 돌아오고, 밝음은 어둠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혼탁한 세상은 바른 세상으로 가고 바른 세상은 때로 혼탁한 세상이 되기도 한다. 푸름이 붉음이 되고 붉음은 다시 푸름이 되는 자연의 이치와 같다. 화양이란 말은 이런 주역의 원리와 세상의 이치를 따른 이름이라는 생각이 된다.
여기서 우암이 거닐었던 물가와 독서에 잠겼던 암서재가 보인다. 우암은 어떤 책을 읽었을까? 눈은 책을 읽고 머리는 마음을 읽어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기서 우암의 발길을 찾는다. 계곡에서 떠들썩한 젊은이들은 과연 우암의 고뇌를 이해할까? 누구도 그런 생각을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나의 어두운 눈이 답답하기만 하다.
만동묘에서 마주 보이는 암서재
4. 첨성대
운영담을 지나 만동묘 앞을 지나니 매운탕 부침개를 파는 식당 몇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이 없어 서늘하다. 남녀 젊은이들이 모래장에서 즐거운 놀이를 하고 있었다. 대학생쯤으로 보이는데 둘러서서 손뼉치기 놀이를 한다. 제법 재미있는지 떠들어 골짜기에 웃음 소리가 가득하다. 사람들이 지나가며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즐겁기만 하다. 음양의 조화이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면 만사 형통이다.
첨성대는 별을 관찰하는 바위답게 산 날망에 오롯하게 서 있다. 예전에는 첨성대 아래로 사람들이 등산하는 것을 막았다. 이 길이 완만하고 호젓한 오솔길이 있어서 좋은데 막아 놓아서 철조망을 넘어 기어이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은 등산로를 잘 정비해 놓았다. 다리 위에서 상류를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커다란 바위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른다.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아쉽기는 하지만 바위와 물과 단풍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모습이 그림 같다. 물은 없어도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림에 물을 넣어 마음으로 바라보면 된다. 사는 것도 이렇게 생각하기 나름이다. 생각하면 다 즐거운 것이고 다 아름다운 것이다. 아내와 다리 위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우리는 학소대 다리를 건너 정상에 올랐다가 첨성대 길로 하산하기로 하고 다리를 건넜다.
첨성대 아래 계곡, 물들이기를 시작한 산자락
5. 단풍
단풍은 이제 시작이다. 그러나 시작은 시작대로 아름답다. 신비롭지 않은가? 같은 흙에 뿌리를 내려 같은 지하수를 길어 올려 마시고 한날 한시에 볕을 받아 광합성을 했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같은 초록으로 태어나 함께 한여름을 보낸 나무들이 가을에는 이렇게 갖가지로 다르니 말이다. 그리 보니 태양은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참으로 자유로운 평화주의자이다. 나무들이 어디에 서 있으나 필요한 만큼의 볕을 내려주니 말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자신이 은혜를 베풀어줄 대상으로 안다. 그가 자기의 은헤를 원하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그가 그것을 은혜로 알든 핍박으로 알든 말이다. 줘야 될 것을 주면서 그것을 시혜로 생각한다. 그것이 권력의 가장 큰 착각이다. 그러면서 다 똑 같은 은혜를 베푼다고 자랑한다. 이른바 획일화인 줄 모른다. 태양은 자연에 이렇게 조건없이 베풀어 주면서도 획일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무어 하나 같은 것이 없다. 같은 단풍나무도 다각기 다른 색깔로 물들이기를 한다. 느티나무를 보면 붉은 것, 노란 것, 갈색으로 들은 것 다 다르다. 볕은 주되 제 마음대로다. 그래서 세상은 아름답다. 그래서 태양은 위대하다. 사람 사는 세상도 다 그랬으면 좋겠다.
물들이는 단풍잎
가령산 쪽 산줄기와 단풍
정상에서 본 화양계곡의 단풍 - 이곳은 특히 녹음도 아름답다.
조봉산과 도명산이 이루어낸 계곡의 자연
6. 도명산 소나무
정상에는 찬바람이 분다. 등산을 처음 시작하는 부부인지 젊은이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앉아 김밥을 먹고 있다. 정상에서 조금만 내려서면 바위가 바람막이가 되어 주는데 그걸 모른다. 사람들이 정상석을 안고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우리는 점심으로 가져간 떡을 먹으려다가 바위 뒤로 몸을 피했다. 정상에는 바위도 멋있지만 서쪽 바로 아래에 보기 좋은 소나무가 몇 그루 서 있다. 사방으로 있는 소나무들이 다 고고하지만 나는 갈때마다 곧게 자란 이 소나무를 좋아한다. 키는 작지만 밑동이 굵어 그 살아온 햇수를 가늠할 수 있다. 앞에는 키는 작지만 굵직한 한 그루가 늠름하게 서 있다. 뒤에는 제자인지 친구인지 아우인지 자식인지 몇 그루를 더 거느리고 있다. 바위 위에서 살았으면서 가지가 많고 잎이 무성하다. 바람이 불어 땀을 흘리며 올라온 사람들이 모두 추워하고 있는데 소나무들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가지마다 푸른 솔잎과 함께 금으로 만든 침구 같은 바늘을 안고 있다. 이제 작별할 시간인데도 아직 떨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내외는 한 젊은이에게 부탁하여 정상석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뒤에 바위가 좋아서 아내를 옆에 서게 해 보았다. 찰떡 4 조각을 아내와 나누어 먹고, 두유를 한 봉지씩 나누어 먹었다. 충분히 점심이 되었다. 마음에 점만 찍으면 되는 것이니까. 내려오는 길에 아들에게 전화를 받았다. 그래 맞아. 내게는 아들이 있지. 가슴이 따뜻한 아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귀여운 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직한 아들도 있다. 게다가 예쁘고 상냥한 며느리도 있다. 더구나 며느리는 지금 제 남편 닮은 내 손자를 품고 있다. 맞아 밖을 보지 말고 안을 보자. 안을 보면 분노는 없다. 쓸데없이 나와 상관없는 밖에 집착하지 말자. 나를 보면 되는 것을 --------. 이렇게 함께 저녁을 먹자는 아들이 있지 않은가?
소나무를 뒤로 하고 하산길에 나섰다. 가온누리산악회라는 한 무리 등산객들에게 앞자리를 양보했다. 그러나 모두가 초보자인지 내리막길이 서툴다.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다가 그들이 휴식을 취하는 틈을 타서 앞지르기를 했다. 출발지에 내려오니 산책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계곡에 내리는 가을 저녁의 햇살이 곱다. 단풍은 붉기를 더하고 물은 쪽빛이 진하다. 아들 내외와 만날 시간이 충분해서 천천히 이야기를 하며 내려왔다. 이것이 바로 삶의 여유다. 오르막길에서 만난 슬픔을 땀이 씻어갔다.
정상에서
정상에서 經筵하는 松公
도명산에 갔더니
정상 부근에
나무중의 공자님 한 분이
이렇게 제자들을 거느리고
有朋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아? 하면서
遠朋의 방문을 반기고 있었다.
나무중의 공자님, 나도 遠朋의 자리에 끼워주시면 안됩니까?
그러나 햇살은 이미 기울고 그림자는 길어지니
下山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정상에서 주차장에 이르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산 이외에 세상이란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만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가야할 속세가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는 자식이나 아기에게 가야한다. 안을 보아야 한다. 안을 들여다보자. 나만을 보자. 그것이 요즈음 자욱마다 만나는 분노와 슬픔을 씻어내는 도리이다. 돌아오는 길 세상의 모든 자연이 아름답다.
(2012.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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