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뜨락> 첫눈 | ||||||||||||
박순철 | ||||||||||||
| ||||||||||||
중부매일 jb@jbnews.com | ||||||||||||
| ||||||||||||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치고는 제법 소담한 눈송이가 나풀거렸다. 올해 내린 첫눈은 지난해보다 보름 정도 일찍 내렸다는 기상대 발표다.
신문을 펼쳐들다 말고 가만히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청춘이라더니 나이가 들어도 첫눈에 대한 감회는 새롭다. 무엇이든 첫 번째를 소중하게 여기듯이 눈도 첫눈에 담겨진 의미가 특별한 것 같다. 여름에 들인 봉숭아 물이 첫눈이 올 때까지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처럼 첫눈은 특별한 인연을 맺어주는 가교 역할도 한다. 평소에 용기가 없어 마음속으로만 애태우던 사람도 첫눈을 핑계 삼아 사랑을 고백해서 백년가약을 맺기도 한다. 어느 지인은 눈 오는 날 만나서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맺은 인연이 화촉을 밝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니 첫눈은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주는 신비의 힘도 가지고 있다. 등산화를 꺼내 신고 우암산으로 향했다. 살짝 깔린 눈 위를 이미 여러 사람이 밟고 지나간 흔적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마음 같아선 내가 제일 먼저 밟고 싶었는데…. 이 길을 밟고 지나간 사람들은 어떤 이들일까. 저처럼 희고 고운 눈을 밟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눈처럼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들이리라. 산 중턱까지 오르니 숨이 차온다. 간밤에 불던 바람은 언제 심술을 부렸느냐 싶을 정도로 잔잔하다. 겨울 산에서나 볼 수 있는 상고대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벌거벗은 나뭇가지에 명주솜 같이 하얀 옷을 갈아입히고 그것도 모자라 통통하게 살까지 찌워놓았다. 앙상하게 메마른 등걸도 치장을 하고 나니 한결 보기 좋다.
미처 떨어지지 않고 있던 빨간 단풍나무 잎에 얼어붙은 눈송이는 붉고 파란 조명을 받고 있어 어느 화가의 그림보다 더 아름답다. 촘촘한 잎 사이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소복하게 쌓인, 낙엽송 가지 위의 눈도 탐스럽고 깨끗하게 보인다. 누가 저처럼 아름답고 화려하게 이 세상을 수놓을 수 있단 말인가. 오묘한 자연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산으로 올라갈수록 앞서간 발자국이 희미하다. 사람이 다녀간 흔적을 눈이 깨끗하게 덮어주었다. 길옆에 발자국을 꽉 찍어본다. 제법 크고 확실하다. 허나 무슨 소용이랴, 곧 지워지고 말 것을. 설익은 문단활동을 하면서도 남보다 돋보이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어디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던가. 처음에는 저 눈같이 희고 순수한 마음으로 원고지 칸을 메우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그때의 마음으로 글을 쓰는지 자신에게 물어 보고 싶다. 그나마 요즘은 나태해져 얼마 지나지 않으면 묻히지 않을까 두려운 생각마저 든다. 무엇 한 가지 뚜렷하게 내세울 것 없는 초라하기만 한 내 발자국들, 지금이라도 지울 수만 있다면 지우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 첫눈 위에 내 발자국을 크고 두렷하게 찍듯이 하얀 백지 위에 새로운 삶을 펼쳐보고 싶다. 해마다 눈은 내리지만 올해 맞이하는 첫눈은 느낌이 다르다. 나이 탓일까. 소년시절에 겪었던 일이 새삼스럽게 생각난다. 그 해 내린 첫눈은 지금껏 가슴 시린 기억으로 남아있다. 집에서 가지고 간 몇 푼 안 되는 돈은 바닥이 났고 믿고서 찾아간 친구는 이미 그곳에서 떠나고 없었다. 혹 어디 재워주고 먹여줄 곳이 없을까 서울의 거리를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집을 떠나 추위와 배고픔에 떠는 소년이 안타까웠던지 겨울 날씨치고는 무척 포근했다. 아침을 냄비우동 한 그릇으로 때우고, 점심때가 지나도록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가 허름한 순댓집을 발견했지만, 주머니를 만져보니 감히 순댓집 문을 밀고 들어설 수가 없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순대를 외면하고 돌아서는데 하늘에서 눈발이 날렸다. 날씨가 포근하다고 느꼈더니 눈이 오려고 했었나 보다. 소년은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려 눈송이를 받아먹기 시작했다. 떨어지기 무섭게 녹아드는 눈송이가 소년의 배를 채워줄 리 만무했지만, 그래도 하늘을 향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나절이 넘도록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허옇게 타들어 가던 목구멍에 전해지던 차가운 눈의 감촉, 그것은 감로수와 다름없었다. 배고프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엔 눈을 받아먹으며 허기를 채우기도 했다고 하면 요즘 아이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눈은 공평한 것 같다. 빈부를 가리지 않고 고루 나누어준다. 어느 지역을 찾아가든 그곳에 있는 모두에게 골고루 하얀 이불을 덮어주고 지저분한 것도 묻어주는 자상함도 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희망을 갖게 하고, 편안한 사람들에겐 행복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첫눈을 기다리나 보다. 첫눈이 오면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막연한 기대와 설렘 때문이리라. 나이는 들어가지만 나도 아직은 눈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이면, 눈사람도 만들어 보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순댓집에서 막걸리 주전자를 앞에 놓고 정겨운 벗과 도란도란 옛이야기라도 주고받고 싶다. (2009. 12. 3) |
'문학생활과 일상 > 에세이의 뜨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세이뜨락 -차이- 이은희 (0) | 2009.12.18 |
---|---|
에세이 뜨락 - 지금 후곡리에 가면- (0) | 2009.12.13 |
에세이 뜨락 - 후진- 임정숙- (1) | 2009.12.13 |
에세이 뜨락 - 겨울 채비- 김정자 (0) | 2009.12.13 |
에세이 뜨락 - 어머니의 반쪽- 임형묵 (0) | 2009.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