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8
고샅길을 따라 무장 걷습니다. 짙푸른 삼나무 숲을 지나, 검은 돌담을 두른 연둣빛 이파리가 너울대는 당근 밭을 수없이 지납니다. 내가 사는 육지의 풍경과 많이 달라 마음이 마구 설렙니다. 주위에 펼쳐지는 연초록 빛깔만으로도 일상의 지친 나를 격려하는 듯해 가슴이 탁 트입니다.
주위 풍경에 팔려 걷다 보니 야트막한 산이 떡 버티고 있는 걸 몰랐습니다. 완만한 어머니의 젖무덤 같은 산, 내가 올라야 할 오름 가운데 하나죠. 갓 피어난 억새가 너울대는 오름은 거의 45도 각도쯤 될 것 같아요. 고개를 들면 하늘로 오르는 길인 양 가파릅니다.
오름에 약한 나는 역시나 초입부터 헉헉거립니다. 고질병인 허리에 복대를 둘러 불편하지만, 마음만은 새털같이 가볍습니다. 호흡을 고르려 말뚝에 기대어 올라온 길을 뒤돌아봅니다. 그런데 이게 웬 횡재랍니까? 성산 들판이 한눈에 훤히 들어옵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번쩍 들어 '만세'를 부릅니다.
도시처럼 높은 건물이 즐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죽 뻗은 도로가 있는 것도 아니지요. 그저 짙푸른 나무와 연둣빛 들판, 멀리 바다가 보일 뿐입니다. 단순한 그것들을 보고 감탄사를 쏟아낸 거랍니다. 스친 풍경은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더 오르고서야 알았답니다. 앞선 이들이 나를 보고 호들갑을 떤다고 얼마나 웃었을까요.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명절 밑에 이렇게 나다닐 수 있다는 것만도 행복한 사람이지요. 이즈음이면 가족들의 먹을거리를 고민하고 있을 겁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이 시간이 나에게 너무나 소중하다는 걸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래요. 마음껏 보고 즐기고 느끼고 가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을 잊은 채 걷고 또 걸을 작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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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르는 오름은 소와 말을 방목하는 사유지랍니다. 올레길을 만들며 닫힌 철문도 열리게 된 줄 압니다. 말미오름은 가축들의 천국입니다. 이제야 사람과 가축이 함께 하게 된 거지요. 가축들 세상에 갑자기 사람들이 거치적거리니 소들이 반가워 할 리는 없겠지요. 하지만 멋진 길을 고안한 분과 사유지를 이방인에게 흔쾌히 문을 열어줘 고맙기 짝이 없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일행이 소똥을 밟았습니다. 방금 느꼈던 감동은 깡그리 잊은 채, 미끈거리는 느낌이 싫다고 얼굴을 찌푸리며 투덜거립니다. 방목지이니 배설물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소의 덩치답게 배설물도 푸짐합니다. 순간 그 배설물이 나에게 무언의 깨달음을 던져줍니다.
오름에서 보았던 말과 소의 배설물의 형태가 다르듯 사람의 모습도, 성향도, 모두 다릅니다. 말이 달리기를 재빠르게 하려면 몸을 가벼이 해야 하기에 배설물은 물기 없이 동글동글 거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누렁소도 자신의 육신을 불려 인간에게 희사하고자 몸을 대책 없이 늘려 배설물도 그것에 비례할 겁니다.
그리 보면, 인간도 동물도 생긴 모습대로 살아가는 건 아닌지요.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며, 차이를 인정하며 살아가는 거지요. 배설물을 밟았다고 투정부리기보단 주위를 돌아볼 일입니다. 이 오름에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준 이가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라도 이런 풍경을 본다면, 나처럼 행복에 겨워 눈물 질금거릴 테니까요.
소나무 곁을 지나며 잠시 나도 한 그루의 나무가 됩니다. 나무가 위에서 오름의 처음부터 나를 지켜보았듯 스치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엿보았겠지요. 내 뒤를 이어 고개를 땅에 박고 허정허정 뒤따라오는 일행이 보입니다. 문득 어떤 마음으로 걷기를 시작했을까 궁금해집니다.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자, 아니면 그저 건강과 아름다운 풍경을 보려고. 어쨌든 좋습니다. 목적은 달라도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며 이 길을 걸었다는 것만으로도 더없는 기쁨이겠지요.
어느 길이든 내 발로 디뎌야 맥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나와 다른 삶의 풍경을 향유할 수 있지요. 닫힘과 열림에 시선의 차이는 커다란 반향을 일으킵니다. 걷기 열풍을 일으킨 '올레길'처럼. 삶의 시선도 이와 다르지 않을 듯싶습니다. 비교가 아닌 생활의 다름을 인정한다면 세상을 살아가기에 수월하겠지요.
그렇다고 가던 길을 포기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천명의 길을 내 발로 걷고 걸어가야만 합니다. 걸어야만 그 너머에 어떤 풍경이 기다리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초원에 드러난 앞선 이의 흔적, 붉은 흙길이 어느 때보다 선명히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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