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뜨락> 겨울 채비 | ||||||||||||
김정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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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매일 jb@jbnews.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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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부터 실하게 자란 초록 잎 뒤에는 저리도 고운 색깔이 숨겨져 있기에 가을이면 사람들의 탄성을 듣게 된다.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내지 못하는 조물주의 오묘한 예술 앞에 저들의 아픔은 아랑곳 하지 않고 많은 이들이 산을 찾는다.
엊그제 입동이 지났다. 입동 무렵이면 낮 기온은 떨어지고 날씨가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시작하여 물이 얼고 땅이 얼어붙어 가을걷이가 거의 끝이 나게 된다. 밭에서 무와 배추를 뽑아 김장을 시작하며 겨울 채비를 하게 된다. 어디 사람뿐이겠는가 다람쥐도 겨우내 먹을 도토리를 그들의 저장고에 가득 채워 놓았으리라. 옛날에는 이 시기를 놓치면 김치의 상큼한 맛이 줄어든다 하여 입동을 전후해서 김치를 담갔다. 오늘은 옛 여인들이 우물과 냇가에서 무 배추 씻던 풍경이 그립다. 근대에는 계절에 구애됨이 없이 언제나 채소를 구할 수 있어 겨울에도 김치를 늘 담가 먹을 수가 있으나 입동 무렵 담근 김치 맛에 비할 수는 없다.
김치의 어원을 살펴보면 고려시대에는 소금을 뿌린 채소를 재워두면 안에 있는 수분이 빠져 나와서 채소가 국물에 침전되는 것을 보고 '침채(沈菜)'라는 특이한 이름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그 후 조선 초기에는 '딤채'라고 불리기 시작했는데 구개음화 하여 김채로, 그다음으로 김치가 되었다고 문헌에 기록 되어 있다. 딤채란 이름으로 된 김치냉장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렇게 '김치는 채소를 소금물에 담근다'라는 뜻이 있다. 소금물에 절여낸 배추에 갖은 양념을 하여 맛깔스럽게 김치를 담가놓으면 그 김치가 익어감에 따라 항균 작용을 만들어내고 숙성 과정 중에 발생하는 젖산균은 새 콤 한맛을 더 해주며 장 속의 다른 유해균과 병원균을 살지 못하도록 억제하기도 한단다. 뿐만 아니라 김치는 대장암, 마늘은 위암을 예방한다고 한다. 그리고 항암효과 까지 발견되면서 서양인들에게도 건강식품으로 급부상하게 되기도 하였다. 올해 모든 사람이 공포에 떠는 신종플루엔자로 많은 희생자가 전 세계를 긴장시키고 있는 데 비하여 우리 민족들은 다른 나라에 비하여 희생자가 많지 않은 것도 칼칼한 우리만의 김치 덕분이 아닐 까. 이렇듯 김치는 우리 민족에게 오래전부터 뿌리 내려 세계적으로 명품요리가 되어가고 있다. 입동 무렵이면 어머님은 제일 먼저 동치미를 담갔다. 사람들은 동치미 무를 작은 것을 선호하지만, 어머님은 늘 크고 단 무를 골랐다. 수돗가 장독대 옆 화단 땅속에 항아리를 묻고 무청 잎 통마늘 생강 갓 통배를 맨 아래에 깔고 그 위에 삭힌 고추를 듬뿍 놓은 위로 소금에 굴린 무들을 차곡차곡 항아리에 가득 담고 소금물을 부으면 끝이다. 이때부터는 추운 겨울로 접어들어야 동치미가 제 맛이 든다. 뭐니 뭐니 해도 한겨울의 동치미의 그 알싸하고 달콤하면서도 시원한 국물 한 모금은 온몸의 피로를 시원하게 날려버리기도 하는 것 같다. 동치미란 말 자체로도 얼마나 정겨운가. 동치미를 담글 때 마다 잊지 못하는 추억이 있다. 신혼 때의 일이다. 불광동 단칸방을 전세 얻어 신접살림을 차렸을 때다. 그때는 거의 연탄 온돌방으로 시설이 되어 있었다. 이사한 첫날 사고가 난 것이다. 연탄가스로 말미암아 우리 부부는 목숨을 잃을 뻔 했다. 주인집 동치미 국물로 신기하게 회복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 시절에는 연탄가스를 마시고 죽는 사람도 많았다. 연탄가스에서 나오는 일산화탄소가 혈액의 헤모글로빈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 산소를 운반하는 혈액이 활동을 못하게 되어 사람이 죽게 된다고 한다. 동치미국물은 일산화탄소를 없애는 묘약이나 다름없다. 그뿐 아니라 소화 능력을 높여주는 역할도 뛰어나다고 한다. 어느 날이었다. 친구의 시어머님께서 위암수술을 한 뒤 퇴원해서의 일이다. 나는 그녀의 시어머님께 동치미 한 냄비를 담아 문병을 갔다. 헛구역질이 심하다는 환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분은 너무도 달게 드시고는 헛구역질을 하지 않으셨다며 친구에게서 너무도 고맙다는 전갈을 받았다. 며칠 후 친구는 그 시절 부잣집에서나 먹던 귀한 청어를 그 냄비에 가득 담아 들고 왔다. 그 해 겨울은 그녀의 시어머님을 위해 바닥이 드러나도록 몇 번에 걸쳐 동치미를 퍼 날랐던 추억도 남아있다. 나는 어머님께서 생존에 계실 때처럼 해마다 이때쯤이면 제일 먼저 동치미를 담근다. 어머님의 솜씨를 전수 한 덕에 겨우내 온 식구들에게 동치미는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땅속에 묻었던 항아리에 담근 어머님의 손맛은 따를 수가 없다. 수북이 쌓인 낙엽 위에 서리가 내려 버버리 코트 옷깃을 올리고 걷던 싸늘한 겨울밤에는 따뜻한 온돌방에 온 식구들이 둘러앉아 고구마 한 소쿠리 쪄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촉촉한 속살을 한입 물고 동치미 한 사발 옆에 놓고 먹다 보면 어느새 그 많던 고구마가 온데간데없었다. 온 식구가 좋아하는 우리 집 동치미를 몇 번이나 담가 식구들을 기쁘게 해줄는지…. 지금 우리 집 뒤 베란다에는 동치미가 한창 익어가고 있다. (2009. 11.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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