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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이야기 코너인 '에세이 뜨락'은 지역 수필가들이 1주일에 한 번씩 방문, 삶의 여정에서 건져올린 생각을 수필, 꽁트 등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작은 사랑방입니다. 튼실한 콩을 배가 부르도록 먹고 배불뚝이가 되었던 자루에서 아침저녁으로 한 움큼씩 콩을 퍼내니 허리가 구부러진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묶었다 풀었다 했더니, 얼마 전부터는 살이 내리고 시름시름 기력을 잃더니, 오늘은 아예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갑자기 부자가 된 것처럼 베란다에 두고는 밥에 넣어 먹고 콩자반을 해먹고, 또 지인을 만나게 되는 날이면 주고 싶어 퍼 나르다 보니, 어느새 자루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며칠을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애를 태우더니, 이젠 속까지 탈탈 비워내고 늙은이의 뱃가죽처럼 쭈글쭈글하게 접혔다. 빈 자루를 털어 접으며 생각했다. 자루도 사람처럼 배가 불러야만 허리를 펼 수 있다는 것을. 식탐이 많아 무엇이든 배불리 먹고 그 힘으로 꼿꼿하게 서 있는 자루를 보면, 중학교 동창 Y의 얼굴이 떠오른다. 여름방학을 하던 날, 친구들과 같이 갔던 그녀의 집은, 마을에서도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깊은 산골에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그녀의 어린 동생들이 흙 묻은 발로 뛰어나왔다. 기억으로는 고만고만한 동생들이 대여섯 명은 되었던 것 같은데,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아이들이 하나같이 배가 불룩했다. 그렇다고 몸에 살이 붙어 통통한 것이 아니라 몸은 야위었는데, 올챙이처럼 헛배만 나온 것이 꼭 걸어다니는 자루 같았다. 그 시절엔 먹을 것도 흔치 않았고 더구나 군것질거리라곤 옥수수나 고구마, 감자가 최고의 간식거리였다. 아침에 밭에 나가시면서 그녀의 어머니가 쪄 놓고 간 감자는 이미 빈바가지가 되어 파리가 들끓었고, 손가락을 빨며 친구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는, 어린 동생들의 모습에서 허기진 자루를 보았다. 늘 먹는 감자나 옥수수로는 아이들의 위장이 채워지지 않았다. 한창 뛰어놀 나이니 금방 먹고 돌아서도 배고파한다는 동생들이 친구들 보기에 부끄러웠던지, 그녀가 부엌으로 들어가 옥수수를 찌고, 열무김치와 고추장을 넣어 보리밥을 한 양푼 비벼왔다. 반찬이라곤 푹 익은 열무김치와 고추장, 풋고추가 전부인데 동생들의 먹는 모습은 게걸스러웠다. 서로 부딪히며 밥을 뜨는 숟가락이 닭싸움하는 것처럼 날카롭게 엉키더니 순식간에 양푼이 바닥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다시 우리가 먹는 양푼 앞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아이들 때문에 나는 그만 숟가락을 놓고 말았다. 친구는 몰려온 동생들한테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쥐어박으며 창피해 어쩔 줄을 몰랐지만, 언니의 무서운 눈초리도 아랑곳없이 허겁지겁 달려들어 먹고도 양이 덜 찼는지, 숟가락을 입에 물고 빈 양푼을 바라보던 아이들의 눈망울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 그 시절엔 왜그리 아이들을 많이 낳았던지. 아이러니하게도 없는 집에 형제들이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부분이 육칠 남매 정도는 되었지만, 친구네집은 친구 밑으로 여섯명의 동생이 있고, 위로 언니, 오빠가 셋이나 되었으니 부모님이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까 싶다. 어린 시절 친정집 윗방에도 두, 세 개의 곡식 자루가 있었다. 여덟 명이나 되는 식구들이 삼시 세 끼를 먹는 쌀이 한 달에 한 가마니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한 달에 한 번 아버지의 월급날이면 우리 집 윗방에서도 소리 없는 잔치가 벌어졌다. 자루마다 포식 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끼니때마다 퍼내던 쌀자루가 야위어 갈수록 어린 자식들의 위는 늘어만 갔고, 자루가 바닥날까 걱정하시던 부모님의 허리는 자식들이 다 자라도록 펴지 못했던 것 같다. 자루마다 크기가 다르듯이,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위장의 크기도 모두 다르다고 한다. 위장은 다른 기관과는 달리 탄력이 있어 과식하면 그만큼 늘어난다. 그러고 보면 평생 채워지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루인 것 같다. 까다롭게 음식 투정을 하던 어린 시절엔, 나이 들면 밥 먹는 힘으로 살아간다고 하던 말이 무슨 말인가 했었는데, 이제 나도 벌써 그 말을 이해할 나이가 된 것 같다. 한 끼라도 지나치면 금방 배가 졸아붙고 허리가 구부러진다. 축 늘어진 자루처럼 힘이 없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현기증이 난다. 무엇이든 잔뜩 집어먹고 엉덩이가 무거워 바닥에 주저앉기를 좋아하는 자루처럼 사람들의 몸도 나이를 먹을수록 두루뭉술해진다. 중년이 된 내 위장도 펑퍼짐해져 간다. 식성이 변해 안 먹던 음식에도 곧잘 손이 간다. 덕분에 몸이 무거워지고 전형적인 중년여인의 모습이 되어 가는 중이다. 속 좋은 자루가 위장을 다 내놓고 누워버린 것을 보며 새삼 내 허리를 만져본다. 그가 삼킨 콩이 모두 내 허리에 와서 붙은 느낌이다. 내일은 또 허기진 자루에게 무엇을 채워줄까. 사람이든 사물이든 배가 부르다는 것은 역시 기분 좋은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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