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에세이의 뜨락

귀여운 산적(박순철)

느림보 이방주 2008. 11. 28. 12:59

귀여운 산적

 

중부매일 jb@jbnews.com

 

잔잔한 이야기 코너인 '에세이 뜨락'은 지역 수필가들이 1주일에 한 번씩 방문, 삶의 여정에서 건져올린 생각을 수필, 꽁트 등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작은 사랑방입니다.

오늘 민둥산에서 산적을 만났다. 만난 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지고 있던 인삼 까지 빼앗겼다. 그것도 사람이 많은 대낮에 당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고나 해야 할까.

흔히 '산적'하면 무시무시한 사람으로 알고 있다. 덩치가 우람하고 눈이 부리부리 해야 제격이다. 얼굴 전체에 털이 숭숭 난 험상궂은 모습에 무기를 소지했을 것으로 짐작이 가지만, 오늘 내가 만난 산적은 고운 목소리에 외양도 참한, 산적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여인이었다.

은빛 파도가 출렁이는 억새밭! 생각만 해도 기분이 상쾌해진다. 강원도 정선군에 있는 민둥산, 나무가 없어 민둥산이라고 한다지만, 원래 나무가 자라지 않는 곳은 아니다. 억새를 키우기 위해 2~3년에 한번 씩 산림을 태우다보니 자연 나무가 자라지 않은 것이라 한다. 더구나 억새가 유명하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하니 그 멋진 풍경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오늘따라 날씨도 기분 좋으리 만큼 선선하다. 어찌나 하늘이 푸른지 꼭 동해바다의 푸른 물결을 보는 듯하다. 그 가장자리에 하얀 새털구름이 점점이 떠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증산초교를 지나 민둥산을 향해 오르는 초입 길은 무척 가파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쉬어가고 싶지만 앞 서 가는 친구를 따라가려니 그럴 틈이 없다.

지난해에도 억새가 보고 싶어 달려왔었는데 보드라운 깃털은 억센 바람에게 빼앗기고 앙상한 몸뚱이만 남아 있었다. 그래도 어눌하게나마 흔들며 반겨주고 있어 가엾기까지 했었다. 지난해의 경험을 되살려 금년엔 일찍 왔더니 이번엔 너무 이르다. 제대로 피어난, 아름다운 억새를 보려면 열흘 정도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 오늘 민둥산에서 산적을 만났다. 만난 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지고 있던 인삼 까지 빼앗겼다. 그것도 사람이 많은 대낮에 당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고나 해야 할까. 오늘 내가 만난 산적은 고운 목소리에 외양도 참한, 산적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여인이었다.

억새가 만발해 있으면 더 좋으련만 아니면 어떠랴. 산에 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기분 좋은 하루다. 또 이곳 기온이 낮으니 산에 오르기에 안성맞춤이다.

도저히 친구를 따라갈 수가 없다. 이쯤에서 따라가는 것을 포기해야 할까 보다. 그래 지금까지 나 보다 앞 서 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을 모두 따라가려 했다면 내 몸이 남아있지 못했을 게다.

걸음이 빠른 사람은 앞서가고 나같이 늦은 사람은 뒤따라가고…. 어쩌면 그것이 이 세상의 순리일 것이다. 남에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일, 왜 이제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정작 중요한 시기에 남을 따라가지 못해서 허둥대던 일도 많았었다. 이제 돌이켜보면 그것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는다. 지금은 남과 경쟁할 일도, 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 쓸 일도 없으니 허전하기만 하다.

민둥산은 처음 얼마간은 가파르다. 그 지점을 지나면 경사가 그리 심하지 않아 가족 단위로, 또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도 충분히 오를 수 있다.

민둥산 정상에는 많은 인파가 모여서 기념사진을 찍고 또 둘러 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친구와 나는 사방을 살피다가 점심을 먹기 위해 한 쪽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김밥을 꺼내 놓는데 반해 친구는 과일과 인삼을 꺼내 놓는다. 친구는 점심을 먹지 않는 특이한 사람이다. 사양하는 친구에게 억지로 김밥 몇 덩이를 건네줬다. 그 바람에 사과 반쪽과 참외 반쪽이 내게로 넘어왔다.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이 있게 마련인가보다.

과일을 먹고 나서 인삼을 먹으려다가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아서 먹기가 그렇다며 도로 배낭에 넣는다. 내가 멀뚱히 바라보자 인삼도 한 뿌리 준다. 주인도 먹기 쑥스러워하는 것을 나라고 별 수 있으랴. 나도 받아서 배낭 옆에 물병과 같이 넣고서 산행을 계속했다.

친구의 걸음이 빨라서 우리는 앞 서 가던 여인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나이는 우리보다 적어보였고 일행이 대여섯 명이나 되었다, 그들을 앞질러 가는 내게 배낭에 매달린 게 뭐냐고 묻는다. 산에 오면 조금은 호기스러워진다더니 내가 그랬다.

"산삼인데요."

"아저씨 너무 오버하시는 거 아녜요. 무슨, 진짜 산삼?"

그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여인이, "그렇게 좋은 것은 혼자 드시면 안 돼요"

그렇게 말하며 뛰어와 내 배낭 물병 꽂는 자리에 꽂혀있는 인삼을 꺼내더니 다리 한 쪽을 찢어낸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뭐라 말릴 수도 거절할 수도 없었다. 사내가 그까짓 인삼 반쪽에 성을 낼 수도 없는 일, 허허 웃으며 계속 걸어가는데 누가 내 배낭을 건드리는 기미가 느껴졌다. 이번에는 다른 여인이 뛰어와 나머지 인삼을 통 채 채트린다. 어이가 없기도 하려니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얻은 것이라지만 통 채 빼앗길 수는 없는 일, 그렇다고 쩨쩨하게 안 된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돌아서서 '정히 필요하면 반쪽만 가져가라'고 했더니 몸통을 분질러 반을 주고 '호호'웃으면서 슬슬 뒷걸음친다.

"거 보세요. 아저씨! 너무 오버하니까 산적이 탐을 낸 것이라고요"

처음 '무엇이냐'고 묻던 여인의 목소리 같다. 귀한 인삼 반쪽을 강탈(?) 당하긴 했지만 내가 말을 잘못한 탓이라니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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