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완보 칼럼

<3분 칼럼> 음식문화- 밤 이야기

느림보 이방주 2008. 10. 3. 18:54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날씨가 많이 선선해졌지요? 좀 더 가까운 곳에서 가을을 맞이하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 보세요. 산밤이 지천이거든요. 산에서는 신선한 공기와 추억만 담아오라고 하지만, 반짝반짝 윤이 나는 아람을 보고 그냥 지나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예로부터 밤은 여러 가지 제의적 의식에 꼭 필요한 과일일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이나 어르신들의 영양식으로도 사랑을 받았습니다. 또 우리에게 자연의 이치를 깨우쳐 주기도 합니다. 그만큼 민족의 생활문화와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럼 밤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볼까요?

밤꽃이 필 무렵 밤나무 밑에 가보면 밤나무의 자식 사랑이 얼마나 향기로운 것인지 금방 깨닫게 됩니다. 밤꽃의 알싸하면서도 비릿한 냄새는 분명 어머니의 젖가슴에서 묻어나는 모성의 향기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이제 곧 태어날 어린 밤알에 대한 보호향이 아닌가 합니다.

 

밤꽃의 알싸한 향기도 알이 차고 여물기 시작하면 가시로 돌변합니다. 밤 가시는 한 번 찔리면 빼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자꾸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심하면 곪기까지 합니다. 당연히 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다람쥐들이 밤송이에 범접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어린 밤송이의 부드럽던 가시는 씨앗이 여물어갈수록 점점 더 지독하게 억세고 날카로워집니다. 그러다가 알이 다 여물면 스스로 쩍 벌어져 세상 밖으로 자식들을 떨어 버립니다. 그렇게 아끼고 싸안았던 자식들에게 어디든지 가서 혼자 살라는 것이겠지요. 우리네 사람들은 정말 따르기 힘든 큰 버림입니다.

 

떨어진 밤은 사람들을 만나 민가에서는 제상에 오르기도 하고, 국가의 종묘제례의 제수가 되기도 합니다. 밥에 넣으면 밤밥이 되고 떡에 넣으면 밤떡이 됩니다. 때로 약이 되기도 하고, 향 높은 차가 되거나 한약재가 되기도 합니다. 젖이 모자란 어린 아이의 이유식이 되거나 아이들이 좋아하는 율란이 되기도 합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폐백고임으로 쓰이는 것입니다. 아들을 낳아 자손의 번성과 영광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밤은 우리를 지탱하는 삶의 명줄이고 미래를 향한 기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고, 산에 그냥 남는 밤이 가장 생명력이 진진한 밤일 것입니다. 그렇게 남은 밤은 흙 속에 묻혀 제 몸을 썩혀 새 싹을 틔웁니다. 씨밤이 자손을 생각하는 마음은 우리를 경탄하게 합니다. 싹이 돋아 밤나무가 한 길이 넘어도 씨밤은 썩지 않습니다. 제가 틔운 나무에 밤이 열려 그 열매가 땅에 떨어져야 드디어 씨밤은 마음 놓고 썩어 흙이 됩니다. 인간이 따를 수 없는 질기고 질긴 기다림이지요.

 

밤은 이렇게 우리네 삶을 향기롭고 차지게 하는 자연 속의 보물이고, 고귀한 문화의 동반자입니다.

 

이번 주말에는 가까운 산에 올라 보십시오. 아마도 가을의 전령인 아람을 한 줌이라도 주워올 수 있을 것입니다. 멜라민 충격에 찌든 한 주를 씻고 우리 문화의 한 자락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CBS (FM 91.5 MHZ) <오늘의 충북>(3분 칼럼)  2008. 10. 3(금요일)  오후 5:35  방송

http://blog.naver.com/nrb2005(느림보 이방주의 수필 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