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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에서 관계로

느림보 이방주 2022. 7. 4. 13:37

7월 월례회 특강 자료

 

존재에서 관계로

 

이방주

 

신은 죽었다.          프리드리히 니체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안식을 얻을 것인가?

 

하이데거는 이 시대를 궁핍의 시대라고 했다. 궁핍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시대라는 말이다.

존재자에게만 관심이 있고 존재에는 관심이 없는 시대이다.

존재의 성스러움을 망각한 시대, 존재를 망각했다는 사실마저도 망각한 시대이다.

 

詩는 죽었다.

시인은 세계와 사물의 신비스러움, 존재의 성스러움에 대해 경이와 공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시인이 토로한 성스러움에 대한 말씀이 사라진 시대이다. 대상이 자신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도록 시인은 마음을 비우고 통찰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 영안을 지녀야 한다. 시인이 죽었으므로 시가 죽었다.

 

산업이 종교가 되었다.                     에리히 프롬

과학 기술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 버렸다.

고유하고 성스러운 성격의 존재는 달아나고 존재자만 존재한다.   과학이 신을 대신 하고 있다.

 

비존재적 실존 :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지 못하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사는 삶의 방식

본래적 실존  : 존재자의 고유한 가치가 드러나는 것, 세간의 가치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기 중심적인 자아를 버릴 때 삶에            만족할 수 있다. 시인으로서의 삶이라는 참된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단 1%이다.

인간의 근본적 욕망을 식욕과 성욕이라 하는 것은 인간을 동물로 본 것이다.

인간의 근본적 욕망은 고독감, 무력감, 허무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관계에 대한 욕망)

시인은 침묵 속에서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시어를 통해 존재의 소리를 구체화한다. 수필가는 낮은 속삭임으로 고독감 무력감 허무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치유해야한다.

 

존재에서 관계로

시인은 사역(四域 : 대지, 하늘, 죽은 사람들, 신적인 사람들)에게서 서로를 비추듯 조응하여 경이로움을 발견해야 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는 의미를 담는 그릇이라는 말이라기보다 사역에서 신비로움을 불러다 인간 앞에 세우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세계를 지배하려는 생각에서 벗어날 때 존재가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준다. 문학은 영혼의 상처를 향기로 바꾸는 아름다운 행위이다.

대상(사물, 사회, 역사)을 인식할 때 중요한 것은 관계이다. 관계는 과학적 인식 체계보다 더 결정적이다.

관계는 애정의 젖줄이고 운명의 젖줄이며 인식의 열쇠이다. 애정이 없으면 인식 자체가 어렵다.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 이행이 수필가의 바른 인식의 출발점이다.

존재론적 인식 관계론적 인식
유럽 근대 사상 동양의 근본 사상
존재성 중심 관계성 중심
사회학: 개별적 존재들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이다.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 세계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 존재한다.

 

주역의 관계론 : 位比應中

位 ; 맞는 자리에 가면 得位, 능력이 안 되는 곳에 가면 失位, 열심히 해서 성장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괴롭다.

比 : 이웃하고 있는 것과의 관계의 중요성, 부모형제, 어제 내일, 시공간, 역사와의 관계(사회적 관계)

應 : 조금 떨어져 있는 존재와의 관계.  친구, 마을 사람이 가족보다 중요할 때가 있음, 먼 과거, 먼 미래, 德을 쌓는다.

中 : 중간 가운데를 중시함 안정감

 

주역에서 말하는 관계의 비법

성찰 : 시각을 자기 외부에 두고 자기를 바라본다. 자신이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 깨닫는다.

겸손 : 나를 낮추고 뒤에  세우고 자기 존재를 상대화하여 남과 관계 속에 둔다

절제 : 자기를 작게 가지는 것, 주장을 자제, 욕망을 자제 매사 지나치지 않게 한다.

미완성 : 목표보다 목표에 이르는 과정을 중시한다.

변방 : 득위의 자리, 변방에 처할 때 최고의 자리이다.

 

☞ 요약하면 겸손이 관계론의 최고의 형태이다.

변화와 관계 속에서 세계를 인식한다.

세상에서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을 볼 수 있다.

詩가 살아오고 신이 살아온다.

 

  • 이호윤2022.07.12 13:30 신고


    존재자체로서의 존재자인 인간이 ‘존재의 집’인 언어를 매개로 존재의미를 드러내보인다고 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인식과 더불어 서양이 개인의 존재성에 중심을 둔 개인주의를 말해준다고 하면 동양은 관계론적 인식에 중심을 두고 집단주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으려나요?

    이방주 선생님의 강의 수강을 앞두고 마침 어느 사회심리학 강의를 듣게 되었더랬습니다. 서양의 개인주의와 비교하여 동양은 집단주의 성향을 보이지만 일본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게 한국은 집단 속에서도 자기 존재를 드러내어 관계 속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큰 주체성 강한 민족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집단주의이면서도 다른 관계와의 소통과 화합, 변화하는데 적극적인 독창성이 뛰어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동양의 큰 나라인 중국은 논외였습니다만 동양의 근본 사상이 관계론적 인식에 있다고 가르쳐주신 이방주선생님의 강의를 듣고나니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선 주역이나 노자의 사상에서도 관계론적 인식이 중심되며 나아가 주역에서 말하는 관계의 비법을 “겸손이 관계론의 최고의 형태이다”라고 요약도 해주셨습니다. 한층 더 나아가 변화와 관계속에서 세계를 인식할 수 있고 이 때 죽었던 詩 곧 문학이 살아온다고 강의하셨습니다. 아울러 수필가는 낮은 속삭임으로 고독감과 무력감, 허무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즉 관계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켜 치유해야한다고 강조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일찍이 관계성을 인식하고 학문과 철학으로 발전시켰던 중국의 현세는 어떠할지요? 유가가 중국에서 비롯되었습니다만 우리 나라는 문화, 사상 전반에 걸쳐 뿌리깊이 자리잡아왔으며 모든 지배계급에서 유교를 배워온 나라였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저는 혹시 이 관계론적 인식 역시 우리 나라에서 더욱 발전되어 왔지 않나 하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그 어느때보다도 우리 문화의 독창성이 널리 알려지고 있는 이 때, 관계주의가 우리의 특징적인 성향이라면 상대적으로 중국에서는 이 관계론적 인식이 약화된 것은 아닐까 라는 물음표를 품게 됩니다.

    답글

    •  
    • 이방주2022.07.12 21:09

      맞습니다.
      중국 철학에서 넘어온 관계론적 인식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더욱 고도화되고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 중국에서도 배워갈 정도로 깊이 있게 발전했습니다.
      일본에 전해진 중국의 철학은 일찌기 서구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희석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일본과 우리의 관계론적 가치관의 차이점을 일본은 전체가 하나로 움직이는 느낌입니다. 하나의 방향이 정해지면 구성원 전체가 비판없이 한 방향으로 행동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체가 하나로 협력은 하더라고 절대 개인의 신념은 버리지 않습니다. 쉽게 풀어 말아면 "다 함께 그러나 다르게" 즉 和而不同한다는 말씀이지요. 하나로 가되 절대 개성을 잃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우리의 관계론적 인식은 앞으로 일본에 비해 더 큰 총체적 힘을 발휘해서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관계의 효력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중국은 공산주의 혁명 이후 퇴색된 점이 있지만 아직도 동양철학의 종주국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의 유학은 오히려 중국보다 더 크게 발전하고 현대까지 그 유학의 정신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흔히 유학이 우리 민족의 역사발전을 방해했다도 생각하기도 하지만 현대 사회를 보면 우리 민족의 가슴에 뿌리 깊이 배어 있는 유학의 사상이 혼란한 세계 속에서도 이만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동양 삼국 중에서 아직도 유학의 가치관이 일반적으로 광범위하게 남아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입니다.

  • tinkerbell2022.07.12 21:56 신고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 이행이 수필가의 바른 인식의 출발점이다.’라는 이방주 선생님의 강의 중 한 부분에 생각을 담가본다. 관계론적 인식이란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다. 하이데거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음’이 우리 삶의 근본 조건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객관화되고 과학화된 일상에서 타인의 존재를 잊어간다고 주장한다. 잊혀 가는 타인의 존재에 대한 감수성을 되살리는 것은 단지 더욱 인간적인 삶을 살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더욱 정확한 이해에 이르기 위한 길이기도 하다고. 기술과 문명의 진화로 열린 공간보다는 닫힌 공간, 현실 공간보다는 가상공간, 대면보다는 비대면 소통으로 인한 ‘관계의 결핍’ ‘관계의 단절’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이해를 은폐하고 때로는 거짓과 몰이해로 이끌고 가는 상황이 공감을 얻기도 하는 혼란의 시대이다. 타인의 존재에 대한 감수성의 회복 그 위에 생태적 관계로 지평을 확대하여 우리의 언어와 행동이 사람들의 몸만이 아닌 영혼에 공명의 맞울림을 주고 있는가에 대한 민감성과 캐물음이 수필가에게 요구되는 사명이 아닌가 한다.

    답글
    • 이방주2022.07.12 22:11

      우리가 <존재에서 관계로>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목적은 21세기를 맞아 수필문학의 방향을 바로 보자는 생각에서 강한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수필에서 존재론적 인식과 관계론적 인식은 작품의 방향을 결정 짓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시인이 살아나고 시가 살아나고 신이 살아오는 수필 창작을 위해서 새롭게 지향해야 하는 대상에 대한 인식은 생태주의를 바탕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생태주의란 단순히 생태계를 중심으로한 사고라고 본다면 현재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수필과 별다는 차이가 없을 겁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는 세계관에서 벗어냐야 하고, 강자가 중심이 되는 세계관에서도 벗어나 모든 생태계의 존재들이 수평적으로 관계를 짓는 사고로 출발해야 한다고 봅니다.
      과거 우리는 남성이 여성의 위에 존재하고 인간이 다른 생명보다 중심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생태계의 한 구성원이고 다른 생명체와 동일하며 수평적 관계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상을 바라봐야 한다고 봅니다. 이른바 에코페미니즘의 바탕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21세기 나아가야 한 수필의 방향이라고 봅니다.

  • 김애중50042022.07.13 10:15 신고

    <질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특강이었습니다.
    저는 특히 성찰과 겸손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습니다. 성찰이란 단어는 깊은 생각으로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결국은 자기 외부에 시각을 두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 즉 자기가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를, 장대한 지구 역사 속에서 지금 내 위치는 어디쯤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성찰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다음에 겸손에 관한 것입니다. 겸손이 관계론의 최고 형태이고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 존재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물론 모든 것이 관계망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굳이 주역을 들지 않아도 우리가 몇십 년 살다 보면 저절로 깨우치게 되는 것이지만 겸손이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는 말에는 약간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겸손한 사람끼리는 겸손이 통하겠지만 겸손한 것을 유약한 것으로 보고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자들에게까지 겸손해야 하는지요. 더구나 요즘은 자기 PR시대인데 겸손과 드러냄을 어느 정도로 조절해야 할지 현실적으로 고민이 됩니다.
    선생님께서 겸손이 득이 된 경우, 손해가 된 경우 등 실제 경험을 사례로 들어 이 부분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글
    • 이방주2022.07.13 11:31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겸손에 간을 맞추는 일은 아마도 우리 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겸손이라는 이념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감추거나 뒤로 미룰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능력은 PR하되 그것이 마치 자신만의 것으로 과대포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일이 주어젔을 때 존재자보다 존재를향하여 정성을 다하면 자신을 알리려 발버둥치지 않아도 세상이 먼저 알아줄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겸손을 미덕으로 행동하면 빠르게 나를 드러낼 수는 없으나 언젠가는 진정성 있게 드러나고 나와 관계 있는 많은 분들이 더욱 신뢰하게 되었떤 것 같습니다.그러므로 겸손이 최선이라는 겻은 변하지 않는 진리가 아니었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