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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삼성산성은 관산성管山城

느림보 이방주 2017. 5. 24. 20:32

삼성산성은 관산성管山城

 

  

관산管山이 옥천의 옛 이름이라는 데에 이견은 없다. 그런데 관산성의 위치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다르다. 옥천군 군서면의 현재 삼성산성이라 불리는 곳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군북면의 환산성(고리산성)이라고 보기도 한다. 대부분 문헌에서 옥천읍을 감싸 안고 있는 산줄기의 삼성산성을 관산성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관산성(삼성산성), 용봉산성, 동평산성, 마성산성의 산성 줄기를 답사하기로 했다.

장마가 끝나고 아침 하늘이 훤하게 열렸다. 새벽에 창밖을 바라보니 동녘 하늘이 파랗게 열려 있다. 오늘도 혼자 떠나야 한다. 그런데 만만찮은 답사 여정인데 요즘 시원찮은 아비의 건강이 미덥지 않았는지 아들이 따라 나선다. 핑계는 운전이다.

아들 차를 타고 떠났다. 경부고속도로 청원나들목으로 들어가 경부고속도로 옥천으로 나왔다. 옥천읍 가화리 현대아파트 이면 도로에 차를 세웠다. 한번 가본 길이라 들머리를 바로 찾아갔다. 나무 계단에 물이 괴어 있다. 장마철에 이끼가 끼어 미끄럽다. 아직 마르지 않은 나무뿌리와 등걸을 밟으면 그냥 나자빠지기 십상이다. 오랜만의 햇살로 지상의 열기가 훅훅 올라온다. 데워진 습기가 온몸을 푹 고아 내는 기분이다. 빗물에 등산길이 마구 패어 나갔다. 여기저기 자갈이 뒹군다. 오르막길이 끝날 무렵 팔각정에서 잠시 쉬면서 물을 마셨다. 옥천읍내가 희뿌연 안개에 가렸다. 읍내의 열기가 이쪽으로 몰려오는 기분이다.

삼성산성에 오르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잡초더미 속에 있는 표지석에는 삼성산성이라고 해 놓고서 설명에는 백제와 신라가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관산성이라고 했다. 성터로 내려가 둘러보았다. 성은 무너져 돌더미로 변했다. 활엽수와 잡초가 우거진 돌더미를 헤집으며 성의 흔적을 찾는다. 참으로 특이하게 생겼다. 남벽은 정상에서 능선을 타고 서에서 동으로 늘어지고 북벽은 능선에서 북쪽 기슭으로 내려가서 역시 동서로 길게 뻗었다. 테메식산성이라고 할 수도 없고 골짜기를 감싸 안지도 않았으니 포곡식산성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그냥 남벽은 높고 북벽은 낮은 반월형 산성이라고 해야겠다. ‘삼성산성이라는 이름처럼 세 겹으로 이루어진 겹성이다. 남벽은 능선에서 2~3m 정도 아래에 280m 정도라 하고, 북벽은 정상에서 30m 아래에 1차 성벽, 거기서 50m 쯤 떨어진 곳이 2차 성벽, 거기서 70m 정도 떨어진 곳에 외성인 3차 성벽이 있다. 월전리와 성왕로 쪽에서 올라오는 적을 방어하는 목적이 큰 성으로 보인다. 내성은 석성이고 외성인 3차 성벽은 토석혼축 산성이다.

북벽의 3차 성벽인 외성의 길이는 약 500m정도로 보인다. 정상에 장대지가 있고 기와편이 보인다. 동쪽과 서쪽에 문지가 있다. 서쪽 정상 부근의 장대지에는 문지가 있는데 이 문을 통해 구진벼루 쪽으로 출입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성축한 성벽의 높이는 돌무더기의 양으로 보아 5m는 족히 되어 보였다.

관산성은 용봉산성, 동평산성, 마성산성으로 이어지는 산성 띠의 관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생각에 이곳 네 개의 산성과 지금은 옥천읍 시가지가 되거나, 경부고속도로, 경부선철도 등으로 거의 훼손된 삼거리토성, 삼양리토성, 서산성과 함께 일곱 개의 성을 통틀어 관산성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성들이 옥천 지역을 감싸 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동북쪽에 고리산성이 있고, 서북으로 노고성 등 몇 개의 성이 더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 일곱 개의 산성의 줄기는 백제에서 보면 최전방 방어선이고 신라에서 보면 삼년산성을 사령부로 한 전진기지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관산성전투와 같은 국가의 운명을 건 국제전이 이곳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옥천 구읍에서부터 월전리에 이르는 이 벌판이 바로 전쟁터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김무력 장군이 이끄는 신라군과 태자 부여창이 이끄는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이 목숨을 걸고 이곳에서 싸운 것이다. 관산성을 차지하면 옥천 고을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산성의 의미를 아들에게 얘기했다. 역사에 관심이 많고 배경지식이 나보다 많은 아들은 대번 알아듣는다. 나는 이들이 누구를 위해 싸운 것인가 의문을 제기했다. 경제를 공부한 아들은 옥천의 경제적 정치적 가치를 말한다. 나는 결국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을 위해 민초들이 희생된 것이라 했더니, 아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싸운 게 아니겠냐고 한다. 싸우는 당시는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상사에게 신뢰를 받기 위해서, 상사는 승진하기 위해서, 그리고 최고 권력자에게 신뢰받기 위해서 싸우고, 최고 통치자는 결국 백성의 삶의 풍요를 위해서 싸운 게 아니냐는 식이다. 수긍이 간다. 경영이라는 생각이 바닥에 깔려 있다. 맞다. 김무력은 가야 출신으로 진흥왕의 인정을 받아야 하고, 삼년산성의 비장 도도는 노비 출신이니 신분 상승을 해야 했을 것이다. 부여창은 사비성의 억센 귀족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놓고 왕권을 이어받고 싶었을 것이다. 역사를 보는 눈은 결국 자기 안경의 색깔을 통해서 보게 되는 모양이다.

돌더미를 헤치며 옛날을 생각한다. 우거진 활엽수 사이로 구진벼루가 보인다. 구진벼루는 여기서 1km도 안된다고 한다. 바로 저기서 성왕이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했기에 백제의 꿈도 성왕의 꿈도 여기서 사그라졌다. 용봉으로 향하는데 백제인의 꿈이 잡초에 묻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위치 :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와 군서면 월전리 사이의 삼성산(해발 303m)

형태 : 삼태기형(남고북저의 반월형) 석축산성(내성) 및 토석 혼축산성(외성)

시대 : 백제계 산성(삼국시대)

규모 : 내외성 총 둘레 약 900m

답사일 : 2011717(함께 답사한 사람 아들 이용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