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지역 불비상佛碑像의 의미
세종시연화사무인명불비상및대좌蓮花寺戊寅銘佛碑像및臺座(보물649호)는 들고 다니기에는 좀 커 보였다. 높이 52.4㎝, 너비 22.5㎝, 두께 16㎝인 곱돌 제재이다. 인근의 쌍류리 생천사지生千寺址에서 발견되었다. 명칭에 ‘무인戊寅'은 678년으로 추정된다. 앞면에는 아미타오존상을 뒷면에는 미륵삼존상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앞면에는 시무외·여원인을 한 부처님을 주존으로 양협시보살과 승려상 등 오존五尊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좌는 물결무늬와 연꽃 줄기가 있고 좌우에 공양자가 무릎을 꿇고 있다. 뒷면은 고개를 한쪽으로 약간 숙이고 커다란 오른손을 얼굴에 갖다 댄 모습이 반가사유상임을 말해준다. 앞면에는 아미타신앙이 뒷면은 미륵신앙이 표현되어 당시의 예불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연화사칠존불비상蓮花寺七尊佛碑像(보물 650호)도 무인명불비상과 크기는 비슷하지만 형태는 뱃머리 모양으로 약간 다르다. 높이가 무인명불비상과 같은 52.4cm라고 한다. 같은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역시 부드러운 곱돌이라 마모가 심하다. 여래좌상은 머리가 크고 시무외·여원인을 한 손이 강조되었다, 대좌는 연꽃 봉오리와 줄기로 이루어졌다.
시무외·여원인은 중생을 아픔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비의 표현이다. 운주 스님은 삼국시대 불상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전환기의 양식을 보인 대표적인 예라고 설명하였다. 연기지역에서 발견되는 불비상의 공통점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면서도 백제의 양식을 지니고 있고 서방정토를 주제로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백제 멸망의 아픔과 함께 이 지역의 치열한 전투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나 그 가족과 이웃이 고통과 갈등에서 벗어나려는 소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서 공감했다.
운주 스님은 비암사에서 발견된 불비상 말고도 공주시 정안면에서 출토된 삼존불비상(보물 742호, 동국대 박물관 소장)과 조치원 서광암에서 출토된 계유명천불비상(국보108호, 673년, 공주박물관 소장)이 더 있다고 설명했다. 나는 계유명천불비상에 수많은 부처님이 새겨진 것이나, 무인명불비상에 아미타불과 미륵부처님을 함께 표현한 것에 대한 궁금증을 토로했다. 스님은 아주 현실적인 의미로 대답했다. 당시 핍박 받으며 쫓기는 신도들이나 군사들이 커다란 불상을 모시고 다닐 수 없는 형편이라 작은 돌에 많은 부처님을 새겨서 쫓기면서도 부처님께 의탁하려는 절실한 신앙심의 발로였을 것이라고 했다. “부흥운동으로 죽은 백제유민, 귀족, 왕족, 역대 왕의 사후 극락왕생도 빌어야겠고, 비록 목숨은 부지했더라도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미래에는 평화스러운 세상을 만들어주는 부처님도 계셔야 하잖아요.” 스님의 말씀이다. 스님은 보물인 불비상을 굳이 연화사에 모시고자 한다. 박물관으로 가는 순간 부처님의 성스러움은 사라지고 예술품이 되어버린다고 여겼을 것이다.
해가 서쪽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스님은 어리석은 나의 질문에 보태지도 덜지도 않으며 미소로 답을 주었다. 삼국시대의 쟁패의 역사, 백제부흥운동 과정, 불교사상이 현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어서 알아야 믿음도 단단해진다는 진리를 확신하였다. 깊은 사찰에 묻혀 있으면서도 오늘날의 정치상황도 수학공식처럼 꿰고 있어 마치 도인을 만난 듯했다.
이사명연무분별 시불보현대인경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진리와 현상은 은은하여 분별없으니 수많은 부처님과 보현보살 경지로다.)
법성게法性偈 한 구절을 외며 작고 아담한 연화사와 작별하였다. 스님은 마당에서 비로전 풍경소리를 듣는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년 복숭아꽃이 만개할 때 다시 찾아오리라 마음먹었다.
(2016. 6. 13.)
[느림보의 山城 山寺 찾기] 연기지역 불비상(佛碑像)의 의미 | ||||||
이방주 충북수필문학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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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연화사무인명불비상및대좌(蓮花寺戊寅銘佛碑像및臺座·보물 649호)는 들고 다니기에는 좀 커 보였다. 높이 52.4㎝, 너비 22.5㎝, 두께 16㎝인 곱돌 제재이다. 인근의 쌍류리 생천사지(生千寺址)에서 발견되었다. 명칭에 ‘무인(戊寅)'은 678년으로 추정된다. 앞면에는 아미타오존상을 뒷면에는 미륵삼존상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앞면에는 시무외·여원인을 한 부처님을 주존으로 양협시보살과 승려상 등 오존(五尊)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좌는 물결무늬와 연꽃 줄기가 있고 좌우에 공양자가 무릎을 꿇고 있다. 뒷면은 고개를 한쪽으로 약간 숙이고 커다란 오른손을 얼굴에 갖다 댄 모습이 반가사유상임을 말해준다. 앞면에는 아미타신앙이 뒷면은 미륵신앙이 표현되어 당시의 예불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연화사칠존불비상(蓮花寺七尊佛碑像·보물 650호)도 무인명불비상과 크기는 비슷하지만 형태는 뱃머리 모양으로 약간 다르다. 높이가 무인명불비상과 같은 52.4cm라고 한다. 같은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역시 부드러운 곱돌이라 마모가 심하다. 여래좌상은 머리가 크고 시무외·여원인을 한 손이 강조되었다, 대좌는 연꽃 봉오리와 줄기로 이루어졌다. 시무외·여원인은 중생을 아픔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비의 표현이다. 운주 스님은 삼국시대 불상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전환기의 양식을 보인 대표적인 예라고 설명하였다. 연기지역에서 발견되는 불비상의 공통점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면서도 백제의 양식을 지니고 있고 서방정토를 주제로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백제 멸망의 아픔과 함께 이 지역의 치열한 전투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나 그 가족과 이웃이 고통과 갈등에서 벗어나려는 소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서 공감했다. 운주 스님은 비암사에서 발견된 불비상 말고도 공주시 정안면에서 출토된 삼존불비상(보물 742호, 동국대 박물관 소장)과 조치원 서광암에서 출토된 계유명천불비상(국보 108호, 673년, 공주박물관 소장)이 더 있다고 설명했다. 나는 계유명천불비상에 수많은 부처님이 새겨진 것이나, 무인명불비상에 아미타불과 미륵부처님을 함께 표현한 것에 대한 궁금증을 토로했다. 스님은 아주 현실적인 의미로 대답했다. 당시 핍박 받으며 쫓기는 신도들이나 군사들이 커다란 불상을 모시고 다닐 수 없는 형편이라 작은 돌에 많은 부처님을 새겨서 쫓기면서도 부처님께 의탁하려는 절실한 신앙심의 발로였을 것이라고 했다. “부흥운동으로 죽은 백제유민, 귀족, 왕족, 역대 왕의 사후 극락왕생도 빌어야겠고, 비록 목숨은 부지했더라도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미래에는 평화스러운 세상을 만들어주는 부처님도 계셔야 하잖아요.”스님의 말씀이다. 스님은 보물인 불비상을 굳이 연화사에 모시고자 한다. 박물관으로 가는 순간 부처님의 성스러움은 사라지고 예술품이 되어버린다고 여겼을 것이다. 해가 서쪽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스님은 어리석은 나의 질문에 보태지도 덜지도 않으며 미소로 답을 주었다. 삼국시대의 쟁패의 역사, 백제부흥운동 과정, 불교사상이 현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어서 알아야 믿음도 단단해진다는 진리를 확신하였다. 깊은 사찰에 묻혀 있으면서도 오늘날의 정치상황도 수학공식처럼 꿰고 있어 마치 도인을 만난 듯했다. 이사명연무분별 시불보현대인경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 진리와 현상은 은은하여 분별없으니 수많은 부처님과 보현보살 경지로다.) 법성게(法性偈) 한 구절을 외며 작고 아담한 연화사와 작별하였다. 스님은 마당에서 비로전 풍경소리를 듣는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년 복숭아꽃이 만개할 때 다시 찾아오리라 마음먹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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