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한국의 사찰

경북 봉화군 淸凉山과 淸凉寺

느림보 이방주 2011. 11. 29. 06:35

청량산 청량사

 

▣ 경북 봉화군 淸凉山 淸凉寺

▣ 2011년 11월 27일

▣ 백만사 8명(이완호 회원 부부 참석하지 못함)

 

오늘은 11월 백만 산행일이다. 행선지를 청량산으로 정했다. 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쯤 내가 처음으로 등산에 입문할 때 청량산을 오른 적이 있다. 그 때 이 가파른 돌산에 오르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당시로서는 나보다 훨씬 선배 선생님들과 다니면서 힘들다는 말도 못했었다. 그래서 이번 산행이 내키지 않았다. 더구나 전날 독감 예방주사를 맞아서 더 그랬다. 독감 예방주사를 맞으면 남들은 약간의 증세를 느낀다고 하는데 나는 병원을 가는 수준이다. 그래서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산 기운을 호흡하고 백만사의 맑은 웃음소리 속에 하루를 보내고 오니 모든 것이 깨끗하다. 다녀오기를 참 잘 했다. 망설일 때는 한 발 앞서 디디는 선택이 삶을 기름지게 한다.

 

아침 일곱시에 산남고등학교에서 만나 이용원 선생님과 이효정 선생님 차로 출발했다. 봉화가 멀기는 했지만 운전을 하지 않으니 지루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좀 미안스러웠다. 문의 나들목, 상주, 예천, 안동, 봉화로 달렸다. 청량산은 안동과 봉화 사이에 있다. 가는 동안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것이 또한 산행의 재미이다. 11시 경에 청량산 들머리에 도착했다. 우리는 청산산 청량사 경내를 돌아보고, 뒷실고개를 거쳐 지란봉에 올라 하늘다리를 건너 선학봉으로 선학봉에서 장인봉 정상을 밟은 다음 되돌아 오면서 연적봉, 자소봉, 김생굴, 응진전을 들른 다음 입석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退溪 선생의 五言詩 한편 - 산은 옛사람에게도 속세는 아니었나 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행 준비

 

 

 

 

 

                      청량산 산행지도

 

 

청량산 [ 淸凉山 ]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에 있는 산. 높이 870m. 태백산맥의 줄기인 중앙산맥의 명산으로서 산세가 수려하여 소금강(小金剛)이라고 한다. 최고봉인 장인봉(丈人峰)을 비롯하여 외장인봉(外丈人峰)·선학봉(仙鶴峰)·축융봉(祝融峰)·경일봉(擎日峰)·금탑봉(金塔峰)·자란봉(紫鸞峰)·자소봉(紫宵峰)·연적봉(硯滴峰)·연화봉(蓮花峰)·탁필봉(卓筆峰)·향로봉(香爐峰) 등의 12개의 고봉이 치솟아 절경을 이룬다.


그 가운데에서도 금탑봉 오른쪽의 절벽인 어풍대(御風臺)는 최고 절승으로 꼽히고 있다. 그 밖에도 신선이 내려와서 바둑을 두었다는 신선대, 선녀가 가무유희를 즐겼다는 선녀봉을 비롯하여 신묘한 절승지가 많다. 지질은 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낙동강이 이 산의 서쪽 기슭을 흐르며, 반곡폭포(盤谷瀑布)·산북폭포(山北瀑布) 등의 폭포가 이 산의 풍광을 더하여 주고 있다.


이 산세를 조선 시대의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 복거총론(卜居總論) 산수도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안동 청량산은 태백산맥이 들에 내렸다가 예안(禮安) 강가에서 우뚝하게 맺힌 것이다. 밖에서 바라보면 다만 흙묏부리 두어 송이뿐이다. 그러나 강을 건너 골 안에 들어가면 사면에 석벽이 둘러 있고 모두 만길이나 높아서 험하고 기이한 것이 형용할 수가 없다.”


이 산에는 27개의 절과 암자의 유지(遺址)가 있고, 신라 시대 이후 선현들이 수도한 유적이 다수 남아 있다. 원효(元曉)가 건립하였다고 하는 내청량사(內淸凉寺)와 외청량사(外淸凉寺),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는 유리보전(琉璃寶典), 신라 시대의 명필 김생(金生)이 글씨를 공부하던 김생굴(金生窟), 최치원(崔致遠)이 수도한 고운대(孤雲臺)와 독서대(讀書臺),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은신한 유명한 오마대(五馬臺)와 공민왕당(恭愍王堂) 등이 있다.


여기에는≪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돌로 쌓았다. 둘레가 1,350척이고 안에 우물 7개소와 시내 2개가 있다. 지금은 폐하였다.”라고 기록된 청량산 성지도 있다. 이황(李滉)은 도산서원을 근거로 하여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구하다가 수시로 청량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였다고 한다.


그는 청량산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이 산을 매우 사랑하여 이 산에 관한 51편의 시를 남겼고, <청량산록발 淸凉山錄跋>이라는 글도 썼으며, 또 청량산을 오가산(吾家山)이라고도 하였다. 이황이 거처하며 학문을 연구하던 자리에 후인들이 기념으로 세운 청량정사(淸凉精舍)라는 건물이 지금도 남아 있다.


수려한 경관과 유서 깊은 문화유적이 곳곳에 있어 봉화군 및 안동시 일대의 48.76㎢가 1982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의 특산물로는 송이버섯과 대추가 있으며 예로부터 대궐이나 사찰 건축재로 이용된 춘양목(春陽木)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길에서 바라보니 청량사 일주문이 커다란 바위 틈으로 보인다. 그래 도솔천을 그렇게 쉽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청량사 일주문으로 향했다. 시멘트콘크리이트 포장길이다. 예전처럼 경사가 급하다. 그래도 차들이 올라간다. 도저히 운전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참으로 신비스럽다. 일주문은 단청이 없다. 자연 그대로이다. 현판이 기막히다.  좁다란 계곡으로 올라가는 길이 구불구불 보인다. 용마루 너머에 자란봉인지 연적봉인지 연꽃 한 송이가 사바를 뚫고 하늘로 치솟았다. 산은 베말랐다. 바위산이라 윤기 한 점 없다. 바위는 화산재처럼 검붉다. 바위 속에 자갈이 박히었다. 아마도 예전에 큰 호수이었든지 아니면 바다 한가운데가 아니었을까? 나무도 낙엽을 끝내고 모두 조용히 서 있다 움직이지 않는다. 소나무만이 유난히 솔잎이 푸르다. 봄기운이 돌았을 때처럼 연록색을 띠었다. 올가을 날씨가 소나무로 하여금 철을 잊어버리게 한 모양이다.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은 사람이나 식물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팍팍한 다리를 두드리며 계속 사찰을 향하여 올라갔다.  문득 삼청산을 오를 때 생각이 났다. 그래도 힘들지는 않았다.

 

오르막길이 힘겨워 여성 회원들이 뒤로 쳐진다. 뒤돌아 보니 바로 앞에 커다란 봉우리가 막아선다. 아마도 축융봉이 아닌가 한다. 절집이 가까워지니 절에서 물이 흘러 내려온다. 절에서 마시고 남은 물이 그대로 속세로 흘러가는 것이다. 마치 부처님의 은혜가 사바를 적시듯이 가늘지만 말고 깨끗하게 흐른다. 아주 깊은 골짜기에서나 들을 수 있는 청아한 소리를 내면서 흐른다. 낙엽이 물길에 떨어져  몸을 적신다. 유리보전에는 약사여래를 본존으로 모셨으니 세상 사람들의 아픔을 모두 씻어 가면 좋겠다. 이 물이 아픔에서 오는 고통을 거두어 주는 약이 되면 좋겠다. 결코 소담하지도  야단스럽지도 않지만, 시끄러운 사바의 아귀다툼을 잠재울 수 있을 것 같다. 물은 많지 않아도 멈추지 않는다. 나는 아름다운 물길을 바라보며 계속 걸음을 옮긴다.

 

                 청량사 일주문 길에서 바위틈으로 현판이 보인다.


 청량사 [淸凉寺]

 

 

663년(신라 문무왕 3년) 원효대사가 창건했으며, 청량산 도립공원 내 연화봉 기슭 열두 암봉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암봉에는 소나무와 각종 활엽수가 울창하며, 청량사 바로 뒤에는 청량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보살봉이 있다. 청량사가 내청량이라면 응진전은 외청량이다. 응진전은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청량사의 암자로 청량산에서 가장 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청량사는 본시 매우 큰 절이었으나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의 영향으로 절은 유리보전(경북유형문화재 47)과 응진전만 남은 채 피폐했다. 법당에는 약사여래불을 모셨다는 뜻으로 공민왕이 친필로 쓴 유리보전(琉璃寶殿)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종이로 만든 지불(紙佛)이 있는데, 지금은 금칠을 했다.

절이 있는 청량산에는 김생(金生)이 공부하던 김생굴과 공민왕당, 퇴계 이황이 즐겨 머물며 수학하던 정자 오산당이 있다. 본전 앞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주변에 청량산도립공원, 고산정, 도산서원, 석빙고, 안동호, 봉정사, 일월산 등의 관광지가 있다.

 

                  일주문 앞에서

                 뒤돌아 보이는 봉우리

                 부처님의 음성을 들으며 -백만사의 여인들

                부처님의 은혜는 낙엽을 적시며

 

  제일 처음 우리를 맞는 부처님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에 올려 놓고 팔꿈치를 오른쪽 오금에 괴고 가늘고 고운 손으로 얼굴을 어루만지며 깊은 사색에 잠긴 모습이다. 지그시 감은 눈에 온누리를 다 담고 있는 오습이다. 주름진 가사가 발목까지 덮었다. 어찌 보면 그냥 평범한 스님이 법열에 든 모습이고, 어찌보면 거룩한 석가모니 부처님이 온 세상을 굽어 살피는 모습이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직접 본 적이 이다. 나는 그 때 우리나라 고려시대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생각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고통과 번민이 보인다. 그러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서는 고요한  법열(깨달음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을 본다.  이렇게 보면 부처가 곧 대중이고 대중이 곧 부처라고 할 수 있다. 아내는 무엇을 비는지 반가사유상 앞에서 삼배를 올린다. 아내가 삼배를 올릴 때 이효정 대장이 반가사유상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불교에 대하여 해박하다. 좌우에 이미 고목이 된 나무를 다 자르지 않고 두었다. 그냥 부처의 모습이다. 나무도 열반하면 부처가 된다. 윤회의 탈만 벗어나면 '해탈 성불'이다. 나무 둥치가 그대로 남아 있으니 사람으로 치면 등신불이다.

 

반가사유상을 돌아 유리보전으로 올라갔다. 예전에는 여기 유리보전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 바위산 절벽에 다른 절집들을 여기저기 아담하게 잘도 갖추어 놓았다. 원효가 이 절을 창건할 때는 아주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와서 억불숭유로 이 절이 많이 피폐해졌다고 전한다. 유리보전은 공민왕의 친필이라니 과연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약사여래가 본존불로 모셔져 있다고 한다. 그러니 몸이 아픈 사람은 여길 와야 자비로운 은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약사여래는 중생의 질병을 고쳐주는 약사신앙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이다 .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라고도 하는데 동방 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에 있으면서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치고 고통을 재앙을 소멸시켜 준다고 한다. 약사 여래는 중생을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12대원을 세웠다고 한다. 이 12대원의 내용을 보면 중생의 아픔이 여기에 다 있다. 생각에 약간의 통속화된 신앙이 아닌가 한다. 불교가 이 정도의  현실계를 지향하는 부처님도 없다면 신도는 많이 줄어들 것이다.

 

유리보전 앞에 오래된 소나무가 있다. 이 소나무 부근에서 사람들이 서서 절을 둘러 본다. 절집 배치가 그런대로 아기자기하다. 어떻게 이런 궁벽하고 험한 땅에 이런 아름다운 건물을 배치할 생각을 했을까? 전각마다 하나하나 돌아보고 싶으나 일행이 뒷실고개로 올라간다. 따라 올라간다. 사찰의 바로 뒤로 이렇게 큰 등산로가 난 것도 드문 일이다. 더구나 사찰을 뒷산으로 등산로가 났다. 사람들이 떠들면서 온갖 잡소리를 다 지껄인다. 부처님은 다 받아 준다. 대중을 지향하던 원효의 민중신앙의 정신이 여기에 살아 있다. 대중의 곁에 살아 숨쉬는 신앙, 대중을 고통으로부터 해방하는 법력을 발휘하는 것이 원효가 지향하던 신앙의 한 가닥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그것을 본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앞에 삼배하는 아내

                  법고와 범종이  있는 누각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앞에서 본 유리보전

                    청량사 유리보전 [ 淸凉寺琉璃寶殿 ]

 

청량사 유리보전 [ 淸凉寺琉璃寶殿 ]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청량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불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多包式) 팔작지붕건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 청량사는 663년(문무왕 3) 원효(元曉)가 창건한 사찰이라 전해지고 있다.

청량사가 있는 청량산에는 연대사(蓮臺寺)라는 사찰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26개의 암자가 있어서 당시 신라불교의 요람을 형성한 곳이다. 유리보전은 다포계인 듯하나 주심포계(柱心包系)와 절충한 조선 후기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공포는 외1출목(外一出目)·내2출목(內二出目)의 형식으로 첨차의 짜임이 고졸(古拙)하고, 쇠서[牛舌]의 내부 끝은 연화(蓮花) 및 용수형(龍首形)의 조각을 새기고 있으며, 정면 중간기둥 위에는 용두(龍頭)와 용미(龍尾)를 주두(柱頭 : 대접받침) 밑에 내외로 뻗게 하고 있다.

내부는 판상(板床)이고 천장은 우물반자이며, 불단(佛壇)에는 삼존(三尊)의 좌불(坐佛)이 봉안되고 천장에는 운궁(雲宮 : 초새김한 포살미가 중첩된 부분)이 설치되어 있다. 이 건물의 큰 보 밑에 간주(間柱)를 세워 후불벽(後佛壁)을 구성한 특징은 다른 건물에서는 보기 힘든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삼성각을 비롯한 전각들의 배치가 아름답다

                 용마루와 장독대

                  전각, 소나무, 바위, 그리고 산

 

사찰를 돌아 뒤실고개로 올라가는 지름길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가파른 길이 모두 돌계단, 나무 계단이다. 잠깐 쉬면서 숨을 고르고 걷다가 또 쉬면서 무릎을 조심했다. 고개에 올라 이제부터는 능선이려니 했으나 그 길도 쉽지 않다. 장인봉 가기 전에 하늘다리라는 괴물을 설치해 놓았다. 건너가기는 참 쉽다. 이름도 참 좋다.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산에서 보면 괴물이다. 예전에 저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 장인봉을 돌아내려온 것이 여기서 보니 기억이 새롭다. 장인봉에서 내려오는 곳에서 점심을 먹어다. 아주 간단히 먹었다. 그리고 다시 하늘 다리를 건너 청량사 뒤 등마루를 밟아 응진전으로 내려왔다.

                  뒷실고개 이정표

                   정상인 장인봉으로 가는 하늘다리

                 하늘 다리 앞에서 정우종선생님 부부

                      정말 하늘로 향할 것 같은 하늘다리와 주변 산야

                    장인봉에서 여성 회원들

                  남성회원들

                      정상석 뒤 쪽 주세붕의 시-옛 선비의 배포가 드러난다

                   하늘 다리에서 동네 친구

                    하늘 다리에서 동네 친구

                  응진전으로 가는 길 - 역광이 더 좋다. 

                   응진전으로 가는 전망대에서 이용원회원 부부

                 뒷 배경이 좋으나 역광

                      여성회원들

                  봉우리는 잘라 먹었네-여기 서 있는 곳이 더 중요해

 

  응진전으로 가는 길은 가파른 계단길이 별로 없다. 등마루에서 조금 내려오자 길이 좋다. 가끔씩 있는 전망대를 지나 김생이 글씨 공부를 했다는 김생굴, 총명수를 지나서 모롱이를 도니 응진전이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는 기와편이나 도기 조각이 여기저기서 눈에 뜨인다. 특히 기와편이 아주 많은 것으로 보아 청량사가 얼마나 큰 절이었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응진전으로 가는 모롱이 직전에서 청량사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가 있었다. 멀리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사찰 경내가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여기는 원효대사가 머물렀다는 청량사의 암자이다. 청량사를 내청량사라면 응진전을 외청량사라고 한다고 한다. 응진전은 절집에 비해 터가 꽤나 넓다. 절집 뒤로는 거대한 바위벽이 있다. 멀리서 보니 마치 바위산이 절집을 옹위하고 있는 듯하기도 하고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듯하기도 하다. 그러나 절은 아주 고요하다. 아무도 없는지 문을 다 닫았다. 사람은 없는데 뜰 아래 목화가 한창이다. 목화를 다 따지 않은 채로 말랐다. 오랜만에 보는 목화송이를 보고 회원들이 모두 신기하게 생각했다. 우리 민족을 따뜻하게 해 주었던 목화가 이제 이렇게 신기한 작물이 되었다.

                 응진전

                 응진전 -고요하기 이를 데없다

                 응진전 앞 목화밭

                  응진전 앞에 이효정 선생님과 회원들

                  전망대에서 바라본 청량사 전경

 

  입석으로 내려오는 길은 그리 멀지도 험하지도 않았다. 여기에도 주차장이 꽤 넓었다. 몇 년 사이에 이렇게 좋아졌다. 그만 큼 나라에 돈이 많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돌아오는 길은 문경 연풍으로 오는 길을 택했다. 늦게 산남동에 있는 다래생고기에서 버섯 전골로 저녁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언제나 민망할 정도의 웃음 소리는 백만사의 특권이다. 기분 좋은 산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