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등산과 여행

거제도, 외도, 해금강

느림보 이방주 2009. 8. 10. 18:31

2009년 8월 3일 4일

 

8월 3일부터 5일까지 시간이 났다. 토요일 일요일을 합하면 5일간이나 된다. 그렇게 가보고 싶은 앙코르 왓트를 가려고 마음 먹었는데 쉬는 기간이 너무 짧아서 불가능했다. 그래서 남들이 떠나는 것만 구경하고 무얼 할까 궁리하고 있는데 아내가 외도를 가자고 제안을 한다. 외도를 하고 싶은가? 외도는 다들 다녀왔는데 나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림으로 보아도 너무 인위적이라 차라리 조령 휴양림이나 신선암봉 오르는 절골 만도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한 번 가보아야 할 곳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그러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필요한 정보를 수집했다.  숙박비나 입장료가 비싸서 생각보다 경비가 많이 날 것 같았다.

 

 

 

1. 출발

2일 저녁 대충 짐을 챙기는데 아들이 휴가란다. 함께 가자고 하니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하기는 누가 부모를 따라 휴가를 가겠는가? 그러나 아내가 아버지가 운전이 힘들 것 같다고 하니 마지 못해 따라나선다. 나는 이것이 아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쏘를 두고 아내 차인 프라이드를 가져가기로 했다. 나는 운전의 부담을 덜었다.

 

3일 아침 6시에 아파트 앞에서 짐을 싣고 출발하였다. 산남동 입구에 있는 SK주유소에서 기름을 채우고 학교 앞을 거쳐 청원 IC를 통하여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했다. 프라이드에 내차의 네비게이션과 하이패스를 옮겨 달았다. 특히 하이패스는 처음 살 때 다른 차에는 쓸 수 없다고 했고 설명서에도 그렇게 되어 있으나 아무런 이상없이 통과 되었다. 그런 안내를 믿고 잘못하면 하이패스를 3개 준비할 뻔했다. 그것도 얄팍한 상혼인가?

 

비룡 나들목에서 판암 쪽으로 대진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운전을 하기 시작한 아들은 아주 차분하게 운전을 해서 믿음직스러웠다. 평소에 자기 차인 코란도를 운전하다가 감각이 좀 달라서 차가 주춤댔으나 바로 익숙해졌다.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소고기 해장국이 휴게소 식사 치고는 그냥 먹을 만했다. 휴게소에는 피서가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우리가 내려올 때는 차가 그렇게 밀리지 않았지만 서울에서 내려오기 시작하면 거제도도 차들로 꽉 차 버릴 것만 같다. 커피를 한 잔 씩 뽑아 마시고 바로 출발했다. 통영 IC에서 거제도로 통하는 14번 국도로 들어섰다. 거제도로 들어가는 길이 크게 붐비지 않았다. 그러나 시청에서 장승포까지 가는 길은 정체가 계속되었다.

 

나는 이 길로 바로 외도에 들렀다가 거제도 관광은 내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제도 유람선 터미널에 도착해 보니 주차장에 들어갈 엄두도 못내었다. 차를 계속 돌게 하고 나는 매표소에 가보았다. 11시도 안되었는데 오후 4시 30분 유람선 표를 팔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도 줄을 얼마나 길게 늘어섰는지 잴 수가 없다. 거제도는 완전히 사람과 차로 꽉 들어찬 기분이다. 예매는 이튿날 오전 6시 40분 유람선을 팔고 있다. 첫 배라고 한다. 나는 외도 해금강 유람선 승선권을 얼른 예매했다. 사람들이 따라서 그 표를 산다. 유람선 57,000원, 입장료 24,000원이다. 무엇 때문에 유람선 값을 2,000원씩 더 받았는지 따질 겨를도 없다. 카드로 계산해서 그런가?

 

2. 거제도 일주

 

우리는 차를 타고 바로 거제도를 일주하기로 했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유람선 터미널과 여객선 터미널을 지나 대우의 옥포 조선소 앞을 지나 옥포대첩 기념공원을 향했다. 우선 옥포조선소를 내려다 볼 수 있다고 하는 근린공원에 올라 조선소를 내려다 보았다.  거제도는 삼성과 대우의 조선소가 있는 관계로 1인당 소득이 4만 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거제도에 있는 삼성과 대우 조선소, 또 울산의 현대 조선소 등으로 하여 우리 나라는 세계 조선 공업의 강국으로 발돋움 한 것이라 생각한다. 거대한 조선소는 휴가중인지 조용하다. 거제도의 부자들은 다 육지로 휴가를 가고 우리는 거제도에 와 있는 것이다.

  

 대진고속도로에서

 

  대우 조선소를 조망하기 위해 전망대로

 도로에서

 대우 조선소

 볼수록 예쁜 프라이드

 

한산한 도로를 달려 옥포대첩 기념공원을 행했다. 옥포대첩 기념공원은 대우 조선소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원래 대우 조선소가 있는 이 옥포만이 이순신 장군이 왜구를 맞아 최초의 승전을 거둔 곳이라고 한다. 아마도 왜구들은 이곳을 장악한 다음 육지로 진격할 교두보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기념관 전시관에 먼저 들어 갔다. 당시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각종 병기들이 전시되어 있고 학익진을 비롯하여 이순신 장군의 작전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정비해 놓았다. 왜구들은 여기서 패배하는 바람에 통신 및 보급로가 차단되고 육상 전진을 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아군의 사기가 하늘에 충천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한 이순신의 호령이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기념관을 나와 사당을 바라보며 옥포만의 방파제로 향했다. 방파제는 기념공원에서 계단을 통해 바닷가로 내려가도록 되어 있고 여기서 옥포 조선소는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지금 건조되고 있는 거대한 배들이 멀리 태평양의 너른 바다를 가르고 나아갈 것만 같다.

12시밖에 안되었는데 배가 고프다. 방파재에 빗방울이 듣는다. 우산을 차 안에 두고 왔기 때문에 서둘러 방파제를 떠나야 했다.

 옥포대첩 기념공원의 기념관

 방파제에서

 하늘은 잔뜩 흐리고

 거대한 옥포조선소

 

 비를 맞으며 차에 올라 다시 해안도로를 달렸다. 아직 도로는 한산하다. 그러나 갈수록 차가 늘어난다. 지도상으로 보아도 부산쪽으로 가는 섬의 북쪽에는 볼만한 관광지는 없는 것 같다. 다만 지나는 길에 대금산 아래 김영삼 전대통령의 생가가 보였다. 옛날 기와집이다. 근처에서는 가장 부유하게 살앗던 모양이다.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먼데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냥 지나쳤다. 김영삼 대통령 생가를 지나자 부산으로 행하는 고속도로 건설 현장이 보였다. 멀리 건설중인 거가대교의 거대한 모습도 보였다. 산업화가 시급해서 건설하는 도로와 다리이겠지만, 거제도는 그냥 자연대로 두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거대한 조선소가 두 군데나 있으니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아닐까? 

 

그냥 해안도로를 달려 농소몽돌해수욕장에 갔다. 몽돌이라고 하지만 돌은 예쁘게 수마되었다고 볼 수 없었다. 날씨가 서늘하고 비가 내려서인지 사람들도 별로 없다. 해수욕장 주변의 식당도 한산하다. 오히려 이렇게 한산한 곳이  더 나은 것이 아닐까? 아내는 물이 좋아서 신발을 벗고 물에 들어갔다. 그러나 물이 별로인 우리 부자는 자갈밭을 거닐었다. 비가 우두둑 떨어진다. 파도는 몽돌에 부딪혀서 하얗게 부서진다. 바로 떠났다. 거제시에 가서 점심을 먹고 바람의 언덕을 가기로 했다.

 

시청이 있는 고현동으로 가는 길에   거제도 민속 박물관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으나 매표하는 사람도 없고 안내하는 사람도 없었다. 박물관 안에는 문만 열어 놓고 아무도 없다. 진열된 문화재도 모두 옛날 살던 그 모양 그대로이다.

 

 몽돌에 부딪히는 파도

 거제도 민속박물과 입구

민속 박물관 입구

 

 보존 한옥

 

거제시청 부근에 맛있는 곰탕집이 있다는 아들의 얘기를 듣고 시내를 돌면서 계속 찾았다. 오후가 되자 시내는 온통 차량으로 가득찼다. 서울 경기에서 내려오는 차량들이 도착된 모양이다. 할매곰탕집이라는 곰탕집을 겨우 찾았다. 곰탕맛은 괜찮았다. 그러나 신토불이인지 청주에서 먹는 곰탕만 못하다. 더구나 산장식당 개장국에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점심을 잘 먹었다. 오후 두시가 되었다. 바람의 언덕을 가야 한다기에 차를 그쪽으로 몰았다.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바람의 언덕으로 향하는지 차는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사실 바람의 언덕은 우리가 갈 곳은 아니었다. 드라마 촬영 장소라지만 그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이 가야할 곳이다. 이 나이에 가서 바람을 맞을 이유가 무엇인가? 또 바람을 맞아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차가 너무 정체되어 내가 운전을 했다. 겨우 부둣가에 차를 댔다. 

바람의 언덕에는 바람이 분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것도 아니고 정말 멋을 부릴 만큼 분다. 젊은이들이 쌍쌍이 몰려와서 드라마 장면을 흉내내고 있었다. 엄밀히 얘기하면 젊은이들은 그네들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어야 하고  우리가 이런 곳에 와서 젊은시절 해보지 못한 드라마 흉내를 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억지로 잡혀온 아들이 갑자기 딱하게 생각되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언뜻언뜻 비치는 말이 이미 와 본 곳인 모양이다. 누구랑 왔을까?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흔들림을 인식한다. 눈에 보이지 않음녀서도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자연은 바로 바람일 것이다. 그런데 사라들은 그 바람을 때로는 낭만적인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때로는 포악하기도 하고 때로는 감사하기도 하다. 이 바람의 언덕에 부는 바람은 모두가 낭만적인 바람일 것으로 기대한다. 그런 사람들이 여기 모였다. 바람을 타고 모여든 사람들은 각자가 모두 자기도 여기 올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불안하다. 바람을 맞는 일이 어쩐지 어색해서 서둘러 돌아 내려왔다.

 

 

 바람의 언덕

 그래도 배경이 좋군요

 바람의 언덕에 모인 사람들

우리는 젊은 시절에는 엄두도 못냈지

 부둣가 화장실, 바람의 언덕으로 모여드는 차량들

 

구름 덮인 가리산

 

어느덧 5시가 되었다. 차를 간신히 돌려 장승포로 향한다. 차는 여전히 밀린다. 7시가 다 되어 장승포동에 도착했다. 우선 잠잘 곳을 구해야 한다. 모텔이고 호텔이고 구분없이 모두가 방 한칸에 10만원이 넘는다. 깨끗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유람선 선착장에서 가까우면 된다. 언덕위에 있는 뉴월드  호텔에 들어갓다.  비교적 깨끗해 보이는 작은 호텔이다. 12만원이라고 한다. 현금으로 하겠다니까 10만원에 해 준다.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인터넷에서 어느 선험자가 올린 글에서 혜원식당이라는 곳이 푸짐하고 맛있고 싸다기에 낮에 봐 둔 혜원 식당으로 갔다. 작은 해물탕집인데 안에는 사람들로 꽉 차 있고 밖에도 두 가족 쯤이 기다리고 있다. 옆집은 아주 텅 비었는데 굳이 여기로 갈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유가 있을 것이니 기다려서라도 거기서 먹기로 했다.

 

잠시 후에 어떤 가족이 일어서는데 더듬한 우리 부자에 비해  몸 빠른 아내가 잽싸게 채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가족끼리 식당을 운영하는지, 아니면 손님이 너무 많아 지쳐 있는지 서비스는 영 엉망이다. 그러나 딸인 듯한 아가시와 아버지인 듯한 연세드신 남자의 표정은 전혀 무책임한 표정은 아니다. 빨리 못해 드려서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이다. 그러면서도 여기저기서 부르는 사람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지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기만한다.  어떤 손님인 듯한 중년 여인 한 분이 나서서 상을 치우고, 물을 나르고 한다. 주인 두 사람은 완전히 지칠 대로 지쳐서 축 처져 있다. 딱해서 볼 수 없다. 아내가 가서 물병과 물컵을 가져 왔다.

 

잠시후 해물탕이 나왔다. 과연 푸짐하다. 맛도 뭐라 표현할 수 없다. 아예 집개와 가위까지 가져다 주어서 우리끼리 끓여서 잘라서 먹었다. 그러나 해물탕 맛이 좋으니까 불만이 전혀 없었다. 들어온 손님들도 모두 그런 표정이다. 그렇게 바쁘면서 라면 사리까지 서비스한다. 소주까지 한 병 비웠다.

 

호텔로 돌아 오는 길은 비가 많이 내린다. 내일 아침에도 비가 오면 어쩌나? 탑마트인지 커다란 마켓에 들러 빵과 음료수를 샀다. 아침에 외도 유람선을 6시 40분에 타려면 아침을 먹을 시간이 없을 것 같기 때문에  배에서 요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호텔은 비교적 깨끗하고 넓다. 욕실도 그런대로 깨끗하다.  시설에 비하면 값은 지나치게 비싼 것이지만 그것도 한 철이니까 하고 이해하기로 했다. 10시부터 두시까지 잠을 아주 잘 잤는데 그 이후로는 꼬박 새웠다.

 푸짐한 해물탕집 혜원식당

 

3. 외도, 해금강

 

이튿날(8월 4일) 아침 창을 열고 바라보니 비가 내린다는 예보와는 다르게 동녘 하늘이 불그스름하다. 하늘에는 구름이 몇장 둥실 떠다닐 뿐이었다.

급히 유람선 터미널로 가려고 하는데 주차장에 누가 차 뒤에 주차 시켰다. 거기다가 주차부레이크를 채어 놓아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을 것 같은데 아들이 운전대를 잡고 내가 손짓을 해서 겨우 빠져 나왔다. 선착장에 가니 6시 25분이 되었다. 사람들이 이미 북적거린다. 공용 주차장에는 차를 댈 곳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길가에 주차했다.  배는 6시 40분에 출발하지 않는다. 표를 예매한 사람이 다 돡하지 않아서일까? 출항 준비가 되지 않아서일까?

 

이윽고 개표를 하고 서서히 옥포만을 빠져 나가기 시작한다. 배 안에서 바라보는 바다가 한결 깨끗하고 아름답다. 바다는 아주 조용하다. 바람도 파도도 없다. 선장은 자기 소개를 하더니 바로 오늘 파도가 심할 거라면서 멀미약을 미리 먹어야 한다며 멀미약을 1000원씩 팔았다. 다들 사먹었다. 나는 파도는 없을 것이라고 해도 아내와 아들이 미리 사 먹는다. 파도는 없었다. 또 오징어를 먹어야 배멀미를 안한다고 하면서 오징어를 팔았다. 그러나 그런 그들이 밉지 않은 것은 그들의 화술과 재치, 그리고 친절함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먼저 해금강을 간다. 해금강이라기에 나는 바다 가운데 금강산처럼 만은 섬들이 아름답게 펼쳐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다. 아름다운 바위섬 몇개 뿐이었다. 통영에서 매물도를 갈 때 그 바위섬과 다를게 없다. 그러나 아름답다. 아름다운 바위섬 기슭에서 낚시하는 이들이 많다. 텐트를 치고 며칠 씩 묵으면서 계속 낚시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한가함이 부럽다. 선장은 쉬지 않고 아름다움을 설명한다. 해금강을 한 바퀴 돌아 외도에 도착했다. 1시간 30분이 걸렸다.

 장승포 유람선 터미널

 부두, 우리 타고갈 옥성 3호

배안에서 바라본 장승포

 

 해금강의 절경

 

바위섬에 가까이 접근하며

 푸른 바다 그리고 섬

 

외도는 한 폭의 그림이다. 그냥 하나의 정원이다. 꽃밭이다. 처음 외도를 이렇게 아름다운 공원으로 만들 생각을 한 것이 참으로 기막히다.

 

외도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하며 거제도에서 4km 떨어진 곳에 있는 개인 소유 섬이다.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하며, 해안선 길이 2.3km로 해발 80m의 기암절벽에 둘러싸여 있다. 원래는 전기나 전화가 들어가지 않는 외딴 바위섬이었으나 개인이 사들여 농원으로 개발한 뒤 1976년 관광농원으로 허가받고 4만 7,000평을 개간하여 1995년 4월 15일 해상식물공원인 외도해상농원을 개장하였다.

섬 동쪽 끝에 경상남도 문화재로 지정된 공룡굴·공룡바위·공룡발자국이 있고 섬 주위에 바다낚시터가 많다. 숙식은 할 수 없으며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여름철은 6시) 문을 연다. 찾아가려면 장승포동이나 일운면 구조라, 동부면 학동리, 남부면 갈곶리, 일운면 와현리 등지의 선착장에서 해상관광유람선을 탄다.

두산백과사전 


역사 

과거에 외도는 바위만 무성한 버려진 황폐한 무인도에 가까운 섬이었다. 육지에서도 멀리 떨어진 외딴 섬이었기 때문에 그곳에는 전기시설도 통신시설도 없었다. 광복 직후에는 8가구만이 살고 있었는데, 배로만 갈 수 있는 접근성이 떨어진 곳인 데다가 광복 후 초기에는 변변한 정박시설조차 없었다.


이곳의 주민들은 경사진 밭에 고구마를 심거나 돌미역을 채취하거나 고기잡이를 하며 생활을 하였다. 기상이 악화되는 날이면, 10여간 교통이 두절되어 곤란을 당하기 일수였다.


1969년 7월 이창호는 이 근처로 낚시를 왔다가 태풍을 만나 우연히 하룻밤 민박을 한 것이 인연이 되어 1973년까지 3년에 걸쳐 섬 전체를 사들이게 된다. 이 씨의 고향은 평안남도 순천이었는데, 부부는 이 섬의 자연에 매료되어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는다.


1970년대 초반부터 이 섬을 개발하기 시작하여, 고구마밭에 감귤나무 3천 그루와 편백 방품림 8천 그루를 심어 놓고 농장을 조성하였는데, 여러 차례 실패를 겪고 농장 대신 식물원을 구상하여 30년 넘게 가꾸면서 다듬어졌다.


1990년에는 건설부로부터 외도 문화시설을 지정받았으며,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편입되었다. 1992년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외도문화시설 공원사업허가를 인가했으며, 외도에 문화시설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1994년 3월 25일 주식회사 외도자연농원을 설립하고, 1995년 4월 15일 외도해상농원을 개원하였다.


2001년 문화관광부 지정 식물원으로 외도조경식물원이 등록되었고, 2002년 KBS 드라마 겨울연가의 마지막회를 제작하고 방영하였지만, 2003년 3월 1일 이창호 회장이 세상을 떠난다. 2008년에 1월 16일에 방문객 100만을 돌파하게 된다.

 

배가 외도 선착장에 접안하려 하자 벌써 다른 곳에서 출발해서 도착한 관람객이 전망대까지 올라가서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배에서 바라본 섬은 그대로 한 송이 커다란 꽃이었다. 선착장에는 많은 유람선이 먼저 배를 대려고 경쟁한다. 유람선에서 내려 예쁜 조각처럼 만들어 놓은 정문을 지나 각종 아열대 식물이 꽃을 피우고 있는 언덕을 올라갔다. 숲속 오솔길 같다. 숲이 지나면 야생화가 나오고 야생화를 지나면 또 숲이 나온다. 꽃마다 이름표를 달고 있지만 다 외울 수도 없다. 코카스 정원, 비너스 가든, 화훼단지, 명상의 언덕, 천국의 게단 등 정원마다 다 이름이 있지만 다 외울 수도 없고 의미도 없을 것 같다. 다만 처음보는 나무와 처음보는 꽃들이 가득하다. 생각에 이 열대성 식물들을 겨울에도 그냥 밖에서 지내나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나 정원을 둘러보면 어디에도 온실이 없는 것으로 봐서 모두 그대로 월동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꽃과 나무에 취해 피곤한 줄도 모르겠다. 배 안에서 빵으로 아침을 때웠어도 배고픈 줄도 모르겠다.  꽃이 지겨울 리가 있을까마는 멀미가 날 때쯤해서는 전망대였다. 멀리 한려수도가 한 눈에 보인다. 아니 태평양이 눈안에 들어온다. 우리가 다녀온 해금강이 눈에 다 보인다. 우리가 배에서 올려다 볼 때 여기도 사람이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이 농원의 창립자인 이창호씨의 기념비 앞에 섰다. 사람들은 그냥 외도 보타니아를 '아름답다.' 생각하면서 둘러 보면 그뿐이다. 그러나 이 거친 섬을 이렇게 규모있는 농원으로 만든 이들의 수고로움은 상상할 수도 없다.

 

조각공원과 사무실과 휴게소를 거쳐 내려오는 동안 마치 전 세계 여러나라의 정원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우리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하는 조각공원도 있고, 로마나 프랑스에 가 있는 듯한 착각하게 하는 정원도 있다. 휴게소에서 배 우리가 타고온 배를 대기를 기다리는 동안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배는 여전히 들어와서 사람들을 쏟아놓고 나가면 또 다른 배가 들어와 사람들을 빨아들여 싣고 나간다. 우리가 탄 배는 갈 때와는 다르게 아주 쉽게 그리고 빠르게 장승포로 돌아왔다.

 

외도 입구

 

 

 입구에서

                   어디인가?

 코카스 가든으로 올라가는 길

 분수

 선인장

 큰머리처럼 잘 기른 향나무(여인들이 사진 찍기 좋아한다)

 외도 관리 사무소

 전망대(파노라마 휴게실)에서

 비너스 가든 -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인가?

 

 오랜만에 보는 다알리아

 리스 하우스-관리인들의 기숙사라네

 동도

 조각공원(얘들아 공기놀이 하니)

조각공원(인간 탑 만들기)

 

 외도보타니아 설립자 이창호님 기념비

 기념품 가게의 지붕과  정원의 색깔이 대조적이다.

 외도로 몰려드는 유람선

 바다 전망대의 아름다운 외등

 

5.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선착장에 도착하니 11시가 못되었다. 아침을 안 먹었기에 바로 앞에 있는 횟집에 물었더니 11시 30분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우리는 고현동에 있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먼저 둘러본 다음 식사를 하기로 했다. 14번 국도는 여전히 정체의 연속이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덜하다. 네비게이션은 용하게 유적공원으로 가는 길을 안내한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은 1951년 고현리 수월리에 인민군 포로 15만명, 중공군 포로 2만명을 수용했던 시설이라고 한다. 얘기로 듣기에는 한국군보다 더 훌륭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포로들 중에는 300여명의 여자 포로도 있었다고 하니 민족의 비극을 짐작할 만하다.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간에 유혈 살상이 발생하고, 당시 포로수용소의 사령관이었던 돗드 준장이 포로에게 납치되는 사건도 있었다고 하니 그 비극성과 혼란을 알아 볼만하다.  

 

주차장에서 올라가니 바로 흥남 철수작전 기념비가 있고, 탱크 전시관이 있다. 먼저 탱크 전시관을 들렀다. 소련제 탱크가 전시되어 있었다. 소련이 6.25는 선봉에 섰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전시한 것이다. 다음에는 디오라마관을 들어섰다. 당시 포로수용소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전체적인 수용소의 배치 모양을 지형에 따라 재현해 놓았으며, 당시의 생활상, 폭동 현장 등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대동강 철교 모습도 있고, MP다리는 당시 헌병이 지키던 수용소 출입의 관문이었다고 한다. 포로 사상 대립관에는 친공 포로와 반공포로의 상상 대립 상황, 폭동포로의 모습, 포로의 귀환 및 송환의 기차, 야외 막사와 포로들의 생활을 알 수 있는 포로 생활관도 있었다. 

 

특히 잔존 유적지로 경비대장의 집무실 벽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고, 경비대 막사도 남은 채로 전시되어 있다. 거제도 홍보관에는 과거 포로수용소 시절의 모습과 80년대의 모습, 현재의 모습을 구분하여 비교 전시하였다. 역사의 비극과 발전의 현장을 동시에 알아볼 수 있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이곳에 와서 하루를 지낸다면 근대사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정문(안에서 촬영)

 이정표(철모)

 탱크 전시관

 포로수용소 디오라마관

 디오라마관 안의 당시 포로수용소 모습

 대변보는 포로의 모형

 포로수용소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디오라마관의 내부

 대동강 철교

송환열차

 포로사상 대립관

 여자 포로관

 

 

6. 돌아 오는 길

 점심을 거제에서 먹으려다가 차가 밀린 것이 걱정되어 그대로 고속도로에 들어와 휴게소에서 먹기로 하였다. 회를 먹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그냥 낮에 회를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돌아오는 길이 너무나 졸려서 뒷좌석에 앉아 1시간 쯤 잤다. 머리가 하얗게 풀린다. 휴게소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했는데도 집에 돌아오니 4시밖에 되지 않았다. 여유있어 좋다.

 

 88올림픽 고속도로 근처에서

 휴게소의 프라이드

 꽃이 아름답다.

 천사의 나팔꽃

 목화꽃

채송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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