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에세이의 뜨락

<에세이 뜨락> 해변의 여인 - 박순철

느림보 이방주 2009. 7. 23. 13:59

해변의 여인
에세이 뜨락

 

중부매일 jb@jbnews.com

 

잔잔한 이야기 코너인 '에세이 뜨락'은 지역 수필가들이 1주일에 한 번씩 방문, 삶의 여정에서 건져올린 생각을 수필, 꽁트 등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작은 사랑방입니다.

파도가 철썩이는 바닷가, 그 한쪽 방파제에 쪼그려 앉아있는 사람, 멀리 있기는 해도 울긋불긋한 옷차림으로 보아 여인 같다. 파도는 쉼 없이 달려와 방파제에 부딪혀 보지만 여인은 움직일 줄을 모른다.

무엇을 하는 것일까? 오늘같이 흐리고 비가 오는 날, 더구나 파도까지 몰아치는데 저처럼 쪼그리고 앉아있는 것은 필시 시름에 잠겨 있거나 무슨 말 못할 곡절이 있지 싶다.

휘 뿌연 안개가 해변으로 꾸역꾸역 몰려왔다가는 야트막한 산봉우리로 달려간다. 성수기는 아니지만, 관광객도 많지 않다. 하필 이런 날을 잡은 게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미 계획된 일이고, 비가 온다거나 흐린다는 기상정보가 나오기 전이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직도 감성이 남아있었는지 며칠 전부터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운전을 잘하는 사람들은 두 시간 반이면 충분하다고 했지만 내 운전 실력으론 세 시간 이상을 잡아야 했다. 아침 7시에 출항하는 여객선을 타려면 세 시쯤 출발해도 여유가 있을 것 같았지만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뒤척이느니 일찍 떠나자고 생각해 어젯밤 12시쯤 집에서 출발했다.

"홍도 관광의 진수는 33가지 비경을 들 수 있는데, 아름다운 바다와 어우러진 남문바위를 비롯하여 촛대바위, 칼바위, 남매바위, 독립문바위, 석화굴, 부부탑, 등 끝도 없이 펼쳐지는 기암괴석으로……"

   
▲ 멀리서는 웅크리고 앉아있는 것으로 보이던 여인은 뜻밖에도 찬일이 또래의 여자아이였다. 세 발 자전거에 앉아서 하염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어른들도 오늘같이 파도가 치는 날이면 방파제 가까이 가는 것을 꺼릴 터인데 세발자전거를 탄 어린이가 그 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랄 일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처남댁과 찬일이만 멀미약을 귀 뒤에 붙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여객선에 올랐다. 부-웅 하는 고동소리와 함께 출항한 배는 잔잔한 물 위를 미끄러지듯 푸른 물결을 가르며 달려나갔다. 크고 작은 섬들을 안고 도는 풍경은 과히 환상적이었다. 다섯 살 찬일이도 신바람이 나서 배 안을 뛰어다니며 좋아한다. 진작 이런 곳에 데려오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우리가 탄 여객선이 흑산도를 지나고 나서부터는 크게 뒤뚱거리기 시작했다. 무엇을 붙잡지 않고서는 걸어 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물보라가 2층까지 튀어 오르곤 했다. 모두 의자를 붙잡고 숨을 죽이고 있다. 설마 했는데 속이 메스꺼워 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이미 비닐봉지로 입을 가리고 있고, 처남도 그 아내가 올린 음식물 처리에 분주하다. 아직 스스로 참고 해결할 능력이 없는 찬일이는 나에게 매달려 어찌할 물을 모른다. 나라고 무슨 방도가 있겠는가. 그저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는 일 외에는, 그 와중에도 끄떡 않고 술을 마시거나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마치 도인 같이 느껴졌다.

홍도가 가까워지자 파도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멀미를 하던 사람들이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지만 괴로워하는 표정은 여전했다. 풍랑주의보가 발령되었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아름다운 절경을 보러 간다는 부푼 기대에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행복했었다. 섬 나들이는 쉽지 않기에 처남 내외와 찬일이 까지 데리고 왔는데 비가 오다니 낭패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같은 여객선을 타고 온 사람들은 홍도 관광 차비를 하고 있었지만, 우리 가족은 식당에서 돌아갈 배를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홍도 관광안내원이 섬을 한 바퀴 돌아오는 관광객 모집을 하고 있었지만, 또 다시 배를 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아내는 나보고 성한 사람들이나 구경하고 오라고 했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섬 구경을 간다니까 좋아하며 따라나선 찬일이가 식당에만 들어앉아있으니 갑갑한가보다. 가끔 빗방울이 날리긴 해도 옷이 젖거나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어서 찬일이 손을 잡고 식당 밖으로 나오자 조금 전 정박하던 항구의 모습이 을씨년스럽게 다가왔다.

애초 계획은 홍도에서 하룻밤 묵을 예정이었으나 내일 여객선이 출항하지 못하면 꼼짝없이 갇히는 신세가 될 게 분명했다. 멀미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오후에 육지로 나가야 할까보다. 여객선 출항시간도 알아보고 또 가까운 곳이라도 둘러보기 위해 천천히 부둣가로 발길을 옮겼다.

멀리서는 웅크리고 앉아있는 것으로 보이던 여인은 뜻밖에도 찬일이 또래의 여자아이였다. 세 발 자전거에 앉아서 하염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어른들도 오늘같이 파도가 치는 날이면 방파제 가까이 가는 것을 꺼릴 터인데 세발자전거를 탄 어린이가 그 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랄 일이다. 알고 보니 우리가 점심을 먹었던 식당 집 딸로 친구가 없어도 혼자 다니며 잘 놀아서 신통하다는 게다.

자전거를 서로 밀어주며 오랜 지기처럼 노는 모습이 보기 좋다. 모레가 하얗게 깔린 백사장을 가리키며 그 곳으로 내려가려고 하는 것을 나는 기겁을 하며 말렸다. 육지 사람들과는 달리, 섬 소녀에게는 밀려오는 파도도 동무가 된다는 생각을 나는 하지 못한 것이다. 인구 감소로 초등학교가 분교가 되어버린 홍도, 외로움을 달래던 소녀는 육지 소년을 만나 즐거웠을 것이고, 무료했던 소년은 섬 소녀를 사귄 계기가 되었다.

오후, 여객선을 타러 내려오는데 섬 소녀는 찬일이를 따라 자꾸만 부둣가로 내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