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것대산이나(病床일기)

것대산이나 바라보며 - 병상에서 3일째

느림보 이방주 2009. 3. 27. 15:26

2월 15일 (일)

 

일요일이다. 원래는 오늘 백만사 등산을 약속한 날이다.  상주의 갑장산으로 이효정 선생님과 내가 운전하고 떠나는 날이다. 날이 풀리고 모처럼 떠나는 등산에 얼마나 깨가 쏟아질 것인가? 그런데 나 때문에 포기했다고 한다. 미안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으나 한 사람이 입원해 있는데 뭐가 좋다고 등산을 가느냐고 했다. 더 미안했다.

 

열은 여전하다. 37.4도 38도. 으실으실 추운 것도 그대로다. 일요일인데 세상은 고요하다. 역시 새벽에 항생제를 두 대 맞았다. 그리고 생리 식염수를 4병 맞았다. 링거가 들어가는 손등이 붓고 아프다. 기술이 없는 간호사인지 찌르는 곳마다 아프다. 짜증이 난다. 아내에게 짜증을 부렸다. 속으로는 미안해 하면서도 왜 그랬는지 모른다. 아침저녁으로 항생제를 먹는다. 이러다가는 온몸이 항생제 투성이가 되는 것이 아닌가?  소변이 한 시간 간격으로 나온다. 아니 화장실 앞을 지나가면 생각이 난다. 양도 많다. 온몸이 소변이 되어 나가는 밖으로 흘러나가는 기분이다. 벌써 손에 윤기가 없다. 제일 민감한 곳은 발바닥인가 보다. 허옇게 일어난다. 일어나 껍질이 부서진다. 발등이 발가락으로 이어지는 뼈가 보일 정도로 얇아졌다. 단 이틀만에 이렇게 변할 수가 있는가?

 

CT반응 검사를 받았다. CT촬영을 복잡하게 하려나 보다. 간호사나 담당 의사가 복잡하게 설명한다. 귀찮아서 그냥 찍었으면 좋겠는데 자기들은 그럴 의무가 있다고 한다.  아직도 암을 의심하는지 아니면 그냥 찍는 것인지 모르겠다. 과장이 확실히 암이 아니라고 소견을 냈으면 그만 아닌가? 과장 말로는 염증이 심해서 약이나 주사로 해결할 수 없으면 고름을 뽑아내야한다고 설명했다. 주사기를 옆구리에 찔러서 빨아내는 것은 이야기만 들어도 소름끼친다. 아니면 구멍을 뚫어서 줄을 매달아 병으로 받아내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심한가? 안하면 죽나?

 

청남학교 운동장에는 사람들이 종일 축구를 한다. 학교 여기저기에 차를 대놓고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공을 찬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뛰어다닐 수 있다. 나도 그렇다. 지난 해 나는 산을 무섭게 다녔다. 매주 산에 갔고 갈 때마다 보통 9~10시간을 걸었다. 나중에는 8시간 반 정도에 도상 거리 24,5킬로미터 정도는 쉽게 해냈다. 어떤 때는 쉬지 않고 3시간을 계속 걸었다. 그런 다음부터는 4~5시간짜리 산은 무너가 하다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무리를 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했지만 나는 그랬기에 살았다고 생각한다. 평일에는 밤에 충북대 운동장을 빠른 걸음으로 한 시간 정도 걸었다. 그래야 이튿날 아침 개운했다. 그런데 왜 이런가? 나도 운동장으로 나가고 싶다.

 

것대산에 행글라이더를 타는 사람들이 있다. 것대산에서 출발한 행글라이더는 아마도 양궁장으로 내려오는 모양이다. 은빛 종이가 날리듯 햇살에 반짝인다. 얼마나 상쾌할까? 그런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는 부러워  죽겠으면서도 겉으로는 "미친 놈들"하고 심술을 부렸다. 아내의 핀잔이 날아왔다.

 

밤에 박호준 선생님 내외분이 오셨다. 사모님께서 동치미와 찰밥을 해 오셨다. 아내는 미안해 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찰밥은 아내의 끼니로 안성맞춤이다.  밤에 교감 선생님이 오셨다. 내가 학교에서 해야할 일에 대하여 걱정이 태산이고 미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 걱정의 말을 했다. 그러나 아무 걱정을 말라고 하신다. 조카 용훈이 내외가 왔다. 누님이 전화를 한다. 아들이 왔기에 엄마를 모시고 가라고 했더니 둘 다 병원에 있겠다고 한다. 아내라도 집에 가서 편히 쉬었으면 속이 편하겠다. 둘이 서로 있겠다고 하니 고맙기는 하지만 속으로 내가 그럼 중병환자인가? 하고 은근히 의심이 생겼다. 그러나 나는 중병환자가 아니잖느냐? 밤 열시 넘어 아들만 갔다. 형님이 전화를 했는지 큰누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근심 걱정으로 가득한 목소리가 꼭 어머니다. 동기간이 알아야겠지만 누님 연세에 걱정하시다가 병이 날까 또 걱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