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 80-이방주
문윤정 〈누군가의 심장 한 조각〉 - 에세이문학 2025년 가을호(171호)
바다의 연마, 영혼을 조각하는 예술
이방주
언어심리학자들은 감정과 경험을 글로 쓰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낮추고 트라우마를 완화하며, 심리적 통합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수필 쓰기가 단순한 서술을 넘어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치유의 통로라는 말이다.
문윤정의 「누군가의 심장 한 조각」(『에세이문학』 2025년 가을호 게재)은 해변에서 깨지고 연마된 유리조각을 보면서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사유하는 작품이다. 사물에 대한 관찰을 출발점으로 하되 곧 개인의 내면사와 존재적 성찰로 이동하는 구조를 지닌다. 특히 유리조각이라는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며, 상처와 치유, 부서짐과 재형성이라는 인간 경험의 보편성을 포착한다. 자기 서사를 다듬어 심리적 통합의 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그는 ‘깨졌다고 끝난 것도 아니고 빛난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상처를 바라보는 시선의 균형을 회복한 것이다.
이 글은 서로 다른 사물인 조개껍데기와 유리조각을 마주 세운다. 둘은 ‘알맹이를 강탈당한 몸’이거나 ‘부서진 존재’이므로 공통적으로 ‘부서진 것’이지만, 작가의 시선은 다른 모습으로 재편되는 과정에 머문다. 사물은 소멸하지 않는다. 상처가 지나간 자리에서 새로운 결을 얻으며 자연의 힘에 의해 스스로를 다듬어 하나의 의미로 보편화 된다.
메리 이모가 유리조각을 ‘누군가의 치유된 가슴’이라고 한 말은 사물들에 생기를 불어넣는 역동적 사유의 시작이다. 이 계시적 발언으로 작가는 사물 너머의 마음을 바라본다. 긁히고 닳은 유리조각의 모서리를 손끝으로 더듬듯, 자기 내부의 묵은 균열을 더듬는다. 그 상처는 더 이상 날카롭지 않다. 시간의 결을 따라 연마된 마음이 유리조각의 질감에 자연스럽게 오버랩 된다. 의미 깊은 언어는 감정을 이동시키는 매개가 되고, 그 과정에서 사유는 다시 구조화된다. 여기서 사물과 언어는 개인적 고백을 넘어서 예술적 사유의 지점으로 옮겨간다. 보들레르가 말한 ‘금이 간 종’이이란 말이나, 버지니아 울프가 ‘금이 간 영혼’을 치유하려 쓴 글은 ‘상처—표현—치유’라는 사유의 구조를 은유한다. 작가는 특정 이론이나 거창한 개념을 동원하지 않고, 사물의 움직임을 따라가듯 상처의 미학을 형상화한다. 상처는 숨겨야 할 흔적이 아니라, 존재의 근육을 형성하는 과정이라는 여백을 독자에게 넘겨준다.
유리조각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은 부서진 자리에서 자아를 다시 조각하는 영혼의 조각가로 이해할 수 있다. 긁힌 표면과 흐릿한 빛을 품은 조각들은 그들의 시간을 품고 있다. 그들은 상처를 되짚어보듯 그것을 부드럽게 만져본다. 상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다른 의미로 채우는 일이고, 치유는 상처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닿은 마음을 다시 조각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이 글은 말없이 드러낸다.
수필은 경험을 언어로 재구성하여 상처를 미학으로 변환하는 문학이다. 문윤정의 이 작품은 변환의 과정을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보여준다. 삶은 우리를 부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새롭게 다듬는다. 그래서 수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천천히 영혼을 조각하는 느림의 예술이다.
누군가의 심장 한 조각
문윤정
바람이 거칠게 부는 12월 어느 날, 더블린의 스케리스 해변을 거닐었다. 메리의 이모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산책에 나섰다. 하얀색 집이 즐비한 아름다운 마을을 지나 해변에 도착했다. 여름 시즌에는 사람들로 붐비겠지만, 겨울이라 한적했다.
메리는 딸의 친구인데, 더블린에서 메리의 이모집에 머물렀다. 나는 모래사장을 거닐면서 습관처럼 조개껍데기를 주웠다. 알맹이를 강탈당한 구멍 난 조개껍데기에 연민의 마음을 얹었다. 그 순간 많이도 놀라고 아파했을 조개의 마음이 스친다. 나와 연배가 비슷한 메리의 이모는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바다 그 너머 세상을 보는 듯,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길게 목을 빼고 바다를 응시하곤 했다. 그녀도 예쁜 돌과 조개껍데기를 줍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녀가 내민 것은 깨어진 유리조각이었다.
유리조각은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지도 않고, 날카로운 모서리도 없다. 병 조각에는 긁힌 수많은 자국이 있다. 모서리는 닳고 닳아 둥글어졌고, 윤기 나는 몸통은 빛을 잃어버렸다. 파도에 쓸리고 모래알에 쓸리어 원래의 날카로움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듯하다. 불투명한 유리조각을 들고 있는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수집품에 깜짝 놀란 나는 왜 그것을 줍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바다에 오면 잘 연마된 유리조각을 줍는다고 했다.
“누군가의 상처 난 가슴이 치유가 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줍게 돼요.” 그녀는 “세상살이가 이와 같지 않을까요.” 라고 덧붙였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유리 조각이 다시 아름다워지는 모습이 좋았고, 깨졌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수집하게 되었다’는 말에서 깊은 성찰이 느껴졌다. 메리의 이모는 연극배우라서 사물 하나를 보더라도 시각이 남다르다고 생각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삶은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다 힘들다고 했지만, 이혼녀로서 딸 하나를 키운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유리 파편을 집어 올릴 때마다 ‘이건 다 지난 상처야. 이제 더는 아프지 않아’라고 속삭였을 것 같다.
메리 이모는 사각형에 가까운 유리조각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파도에 흔들리면서 모래알 사이에서 자신을 잘 연마해온 작은 조각이 내 손 안에서 반짝였다. 문득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삶도, 나의 삶도, 이런 유리조각 하나쯤 쥐고 오늘을 살아내는 건지도 모른다고.
보들레르는 자신의 영혼을 ‘금이 간 종’에 비유했다. 금이 간 영혼은 큰소리로 이야기해도 잦아들기만 한다고 토로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금이 간 영혼을 달래기 위해 글을 썼다. 나도 언젠가 한 번은 깊이 금이 간 적이 있다.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균열이었다. 그때 나는 하루에 몇 장씩 일기를 썼다. 아무도 모르게 일기장에 기대어 낯선 분노와 슬픔 같은 감정들을 흘려보냈다. 그 감정의 파편들은, 빛나지도 날카롭지도 않았지만 오래도록 가슴속 어딘가를 짓누르고 있었다.
메리 이모에게 삶의 지혜를 배운 후 나 역시 깨어진 유리 조각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매일 부딪히는 말들, 내 뜻대로 되지 않아서 금이 가고 깨어지는 마음, 언젠가 한 번쯤 부서진 채로 버려졌지만, 세월이라는 물결에 쓸리고 쓸려 모난 부분은 닳아지면서 나 자신을 곧추세울 수 있었다. 내 안에는 나도 모르는 상흔이 아로새겨져 있다.
해안선을 따라 병조각을 줍는 행위는 자신을 비우는 일이기도 하다. 연극하는 메리이모에게 유리조각은 상처가 지나간 자리이며 슬픔이 닿은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유리조각을 줍는 일은 부서진 것들을 놓아주고, 자신의 내면을 정화하는 의식이었음을 깨달았다.
서해안이나 동해안에서 주운 유리조각이란 것이 대부분 초록색이거나 푸르스름한 소주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깨어진 병조각은 때론 무기가 될 정도로 그 단면이 날카롭다. 드러낸 단면에서 번뜩이는 빛은 두려움마저 든다. 누군가에게 생채기를 낼 것만 같다. 날카로운 유리가 바다를 떠돌면서 비정형의 모서리가 점차 사라지면서 시퍼렇던 상처도 점차 아물고, 아픔은 둥글어져 간다.
바닷가에서 주워온 병조각들을 통에 담아 화장대 위에 올려두었다. 마음이 아플 때면 하나씩 꺼내어 들여다보고 만져본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상처를 견뎌낸 한 사람을 대하고 있는 느낌이다. 누군가의 심장과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날 선 마음을 접어가며 밤마다 흘렸을 슬픔 혹은 눈물의 무게를 떠올려본다. 그 누군가는 ‘나’이면서 ‘세상의 존재’들이다.
생로병사의 한중간에 서 있는 존재인데 아프지 않다고, 슬프지 않다고, 괴롭지 않다고, 마냥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세상의 바람과 모래와 파도에 맞서 자신을 둥글게 만들어가는 과정은 조각가가 ‘한 부분을 끌로 쪼아 없애고, 또 한 부분을 끌로 긁어내고, 연마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우린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삶이란 자신을 다듬고 깎아내는 고요한 수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깨졌다고 끝난 것도 아니고, 빛난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고. 나를 아프게 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시간을 통해 배운다. ‘조각가처럼 너의 영혼을 조각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는 플로티누스를 떠올린다. 얼마 동안 조각해야 아름다운 영혼이 될까.
https://daily.hankooki.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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