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에세이의 뜨락

<에세이 뜨락> 고개넘은 순덕이

느림보 이방주 2009. 5. 29. 08:07

고개 넘은 순덕이

 

중부매일 jb@jbnews.com

 

잔잔한 이야기 코너인 '에세이 뜨락'은 지역 수필가들이 1주일에 한 번씩 방문, 삶의 여정에서 건져올린 생각을 수필, 꽁트 등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작은 사랑방입니다.

2008년 9월 17일 12시 10분. 순덕이는 마치 시계의 초침처럼 정확하게 문을 열었다. 가슴에는 눈처럼 하얀 프리지어를 한아름 안았다. 나는 사십대 후반인 그녀의 얼굴에서 어린 시절의 앳되고 귀여운 미소를 읽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를 포옹했다. 은은한 프리지어 향이 묻어 있었다. 고마움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꿈을 이룬 것이 고맙고, 세월을 넘어 오늘까지 나를 기억하는 것이 고마웠다.

순두부집으로 갈까 하다가 25년을 독일에서 산 그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양식집으로 안내했다. 차를 몰고 가는 동안 그새 어눌해진 우리말로 나를 찾으려고 애쓴 사연을 들려준다. 나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어린 시절의 그녀를 그려 본다.

순덕이는 그날도 마루 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고개 너머 다른 세상으로 가는 큰길가에는 서너 아름도 더 되는 느티나무가 있었다. 눈길이 느티나무의 푸르름을 넘어서면 해발 천 미터도 넘는 삼도봉이 보인다. 삼도봉 너머 세상에는 어떤 세계가 있을까? 내가 마당으로 들어서며 '순덕아'하고 불러도 전처럼 하얀 이를 드러내고 예쁘게 웃어줄 줄 모른다. 들에 나간 올케 대신 내게 밥상을 차려 내왔다. 그리고 또 마루 끝에 앉는다. 눈길은 여전히 삼도봉 쪽이다. 나는 밥을 씹을 수가 없었다. 어린 가슴에 멍이 들어 있는 까닭을 다 알기 때문이다.

예쁘고 똑똑한 순덕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배움을 끝마쳤다. 한문 서당을 잠깐 다니는 것 같더니 그것마저도 그만둔 모양이다. 도회지 아이들에겐 당연한 일인데 삼도 접경 벽지 마을에서 중학교 진학은 꿈같은 일이다. 참을 수 없는 꿈의 갈증은 여린 가슴에서 웃음을 빼앗아 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잔심부름이나 하다가, 농사철이 되면 농사일을 돕기도 하고, 가끔 내가 하숙하는 오라버니 집에 와서 점심상을 차리기도 했다. 이렇게 배움을 향한 그의 목마름은 삼도봉의 험한 산줄기에 꽉 막혀 버린 것이다.

나는 야학을 열었다. 교실에 호롱불을 켜고 배움에 목마른 청소년들을 불러 모았다. 한 40명은 모였다. 스무 살 넘은 처녀도 있었다. 배달되는 강의록을 빠짐없이 가르쳤다. 우습게도 벽지 초등학교 선생이 문명 시대에 농촌계몽운동가가 된 것이다. 젊은 나이였지만 야간에 네 시간 수업을 하고 나면 이튿날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꼭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당시는 군화 소리 요란한 차가운 시대라 나는 그 일로 누군가로부터 살벌한 감시도 받고, 상급관청에 불려가 질책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굽히지 않았다. 본분을 벗어나 엉뚱한 일을 한다고 시대에 순응하는 붓의 회초리에 볼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순덕이는 '세상은 여기만이 아니라, 저 베틀재 너머에도 있다. 그리고 거기서 할 일이 더 크고 많다.'라는 내 말을 가슴에 새겨 고개 넘을 결심을 했다고 한다. 나는 그 때 스물 셋밖에 안된 병아리 교사였다. "선생님의 깨우침이 오늘날 바탕이 되었어요. 길을 열어주신 거지요." 이런 말은 사실 옛 선생을 만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의례적인 말이다. 그러나 어떤 선생이든지 제자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면 진정으로 하는 말이라고 믿고 싶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나는 그에게서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에 대한 반가움도 반가움이지만 어떻게 그렇게 생명력 넘치는 영혼으로 살 수가 있을까하는 경이로움 때문이었다.

   
▲ 점심을 먹으며 우리는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반가움에 비해 시간은 너무 짧았다. 나는 어린 시절 예쁘고 똑똑했던 순덕이의 기억을 더듬었고, 그녀는 독일까지 건너가서 의학박사가 될 때까지 힘겨웠던 과거를 더듬으며 눈물을 흘렸다.
점심을 먹으며 우리는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반가움에 비해 시간은 너무 짧았다. 나는 어린 시절 예쁘고 똑똑했던 순덕이의 기억을 더듬었고, 그녀는 독일까지 건너가서 의학박사가 될 때까지 힘겨웠던 과거를 더듬으며 눈물을 흘렸다.

어렵게 일 년을 버틴 야학을 토대로 중학교 과정은 검정으로, 고등학교는 산업체에 병설된 학교를 더 어렵게 졸업했단다. 대학에 입학해서 1년을 다니다가 독일 정부에서 지원하는 유학 시험에 합격하여 독일로 건너가 의학을 공부하여 오늘을 이룬 것이다. 그의 눈가나 목덜미에 나보다 많은 잔주름을 보면서 이역에서 공부하는 어려움을 더 묻지 않았다. 이제 독일에서 유명한 병원(SPITAL WALDSHUT)의 심장내과 과장으로 일하면서 의대에도 출강하는 독일의 심장 의학계에서 알아주는 명의가 된 것이다. 잔잔하게 짚어가는 그의 이야기와는 달리 나의 가슴은 마디마다 출렁거렸다.

그녀는 이미 이름도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삶의 지표를 바꾼다는 의미이다. 인류의 심장 건강을 관리하는 새로운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래도 마흔 여덟이나 된 그녀를 나는 그냥 '순덕이'라고 불렀다. 어쩐지 나로부터 멀리 도망갈 것만 같아 '김 박사'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미 고개를 넘었다. 골짜기에 얽매인 운명의 고개를 넘은 것이다. 내가 말했다는 베틀재 너머의 세계뿐만 아니라, 알프스같이 높고 험한 고개를 넘어, 정말로 넓고 넓은 세상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큰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 달간 휴가를 받아 고국을 찾은 김순주 박사는 다시 고개를 넘어 자신의 일터로 갔다. 고개 넘은 순덕이, 제자이지만 나는 그의 살아 있는 영혼이 정말로 존경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