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에세이의 뜨락

제사(박종희)

느림보 이방주 2008. 10. 10. 09:55

제 사

 

중부매일 jb@jbnews.com

 

추석날에 차례 상을 차려놓고 올해로 12년째 맞는 아버님의 제사와 3년 전 돌아가신 시숙의 제사까지 모셨다. 늘 해오던 삶은 닭은 올리지 않고, 아버님이 좋아하시던 명란젓갈과 잡채, 갈비찜을 해서 제사상을 차렸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상 앞줄에 놓이는 과일만 순서를 기억하며 차례 상을 차리고 나니, 이번 추석에도 제사를 지낼 사람은 우두커니 남편 한 사람이다. 차례 상 앞에 엎드려 절을 하는 남편의 굽은 등이 오늘따라 많이 외로워 보인다. 명절이지만 남편 혼자 절을 해야 하는 심정이 오죽할까.
아버님께서 간암 선고를 받고 8개월 남짓 투병생활을 하실 때였다. 평소에 아버님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음식이 생선회와 명란 젓갈이었다. 가끔 아버님을 모시고 회를 사드리면 정말 맛있게 드셨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 자주 회를 사다 드리면 돈 아까운데 왜 자꾸 비싼 걸 사오느냐고 하시면서도 속으론 정말 흐뭇해하셨는데, 가시기 며칠 전부터 식사를 못하시더니 갑자기 광어회와 명란젓갈이 드시고 싶다고 하셨다.

   
▲ 10여 년 동안 아버님 제사를 모시면서, 나는 우리 집 제사음식을 바꾸었다. 고인을 위해서 차리는 음식이니, 고인이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 몇 가지와, 산사람도 모두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정갈하게 만들어 차린다.

만약 제삿날마저 없었다면 평소 잘해드리지 못해 가슴 아팠던 자식들은 어디 가서 통회의 마음을 전할까. 제사는 그리워하는 사람이 지내야한다.
이것, 저것, 어떤 것을 해다 드려도 못 드시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시던 분이 회가 드시고 싶다고 하니, 남편과 나는 아버님의 입맛이 살아나는가 싶은 반가운 마음에 싱싱한 광어회와 명란젓갈을 한 접시 사왔지만, 이미 아버님의 입맛은 광어회와 명란젓갈을 맛있게 드시던 예전의 입맛이 아니었다. 평소엔 그렇게도 잘 드시던 음식을 앞에 두고 바라만 보시는 아버님을 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겨우 회 한 젓가락 드시고 물리시며 "이 아까운 것, 이 비싼 것 어쩌느냐? 너희라도 얼른 먹어라."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일이 있은 후 꼭 일주일 만에 아버님은 먼 길을 떠나셨다. 그날 안 가면 안 되는 하늘나라와의 어떤 약속이라도 있으신 건지, 하루 중 한 시간을 남겨두고 그렇게 홀연히 떠나셨다. 그런 아버님을 보고 주위 분들은 돌아가시면서도 자식들 편하게 해주시려고, 그 시간에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 세상을 떠나면서 어떤 사람은 남은 이들에게 후련함을 남기고 가기도 하지만 아버님은, 아버님을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긴 연민과 많은 그리움을 남기고 떠나셨다.

그 후 아버님의 첫 제사를 모시면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제사상과는 다르게 아버님께서 생전에 좋아하시던 음식을 놓고 제사상을 차렸는데, 시누이들과 어머니가 제사상을 보시곤 화를 내셨다. 제사상에 누가 회를 올리고 젓갈을 올리고, 삶은 닭도 없이 갈비찜을 올리느냐며 드러내놓고 역정을 내셨다. 제사음식에 대한 지식도 없었지만, 내 생각으로는 제사상은 고인이 평소에 좋아하시던 음식을 깨끗하게 차려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는데, 형식을 중요시하는 시누이와 어머니는 내가 차린 제사상이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어느 집이든지 명절이나 제삿날이면 먹지도 않는 음식을 만드느라 애를 먹는다. 집집이 기름 냄새가 이웃집까지 넘어올 만큼 전이나 부침개를 많이 하고, 두부나 산적도 먹지 않는 것을 형식상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남은 음식은 봉지에 담긴 채 냉장고에 뒹군다. 도대체 왜, 먹지도 않을 음식을 한 바구니씩 해서 나중엔 결국 음식물 쓰레기로 버리는지, 명절을 지내고 나면 어느 아파트이건 음식물 쓰레기통이 넘치다 못해 아래까지 쌓이고, 거기서 나는 냄새 또한 만만치 않다.

10여 년 동안 아버님 제사를 모시면서, 나는 우리 집 제사음식을 바꾸었다. 고인을 위해서 차리는 음식이니, 고인이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 몇 가지와, 산사람도 모두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정갈하게 만들어 차린다. 처음 몇 년은 뒤에서 흉을 보던 시누들과 어머니도, 이젠 내가 차리는 제사상에 익숙해져 별 말씀을 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가끔 제삿날이 돌아오면 짜증스러워하는 사람을 보게 본다. 물론 적지 않은 장거리 비용과 음식 장만 할 일을 생각해서 그렇겠지만, 그렇게 짜증스런 마음으로 형식적인 제사상을 차려놓고 절을 한다면, 그것이 고인에게나 절을 하는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선 제사를 왜, 지내는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 같다. 진심으로 고인을 그리워하고 고인의 발자취를 기억하기 위해서 지내는 제사라면, 평소 고인이 좋아하던 음식으로 정갈하고 성의 있게 차려 놓고, 고인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또, 딸이면 어떻고, 사위가 지내면 어떠랴, 제사는 정말로 고인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지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고인을 기억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 제사라는 형식을 만들어 준 조상님들께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제삿날마저 없었다면 평소 잘해드리지 못해 가슴 아팠던 자식들은 어디 가서 통회의 마음을 전할까. 제사는 그리워하는 사람이 지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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