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친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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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이야기 코너인 '에세이 뜨락'은 지역 수필가들이 1주일에 한 번씩 방문, 삶의 여정에서 건져올린 생각을 수필, 꽁트 등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작은 사랑방입니다.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동네 앞을 시원하게 뚫고 지나가건만 내 마음은 답답하기만 하다. 그 도로위에 길게 늘어선 차량들의 거북이걸음이 답답해서도 아니고, 오늘이 추석 전날이서도 아니다. '소갈머리 좁은 친구 같으니…' "당신은 아까부터 뭘 그렇게 혼자 구시렁거려요. 애들 오기 전에 어여가서 솔잎이나 좀 쪄다줘요." 좀 있으면 손자 손녀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명절 때는 그 녀석들 보는 재미가 제일 크다. 하지만 추석 이튿날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아이들 있던 자리가 더 허전하게 느껴지니 이제 나도 늙었나보다. 지금도 쉬는 날이 없지만 젊어서 농사일을 너무 많이 한 탓일 게다. 구부정한 허리의 아내가 가엾기만 하다. 힘들게 송편 만들지 말고 한 사발 사다 쓰자고 몇 번이나 말렸건만 아내는 요지부동이다. 자신의 손으로 만든 송편을 만들어 먹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버섯 따러 다닐 때 가지고 다니던 배낭을 한 쪽 어깨에 걸치고 뒷산으로 향했다.
'소갈머리 좁은 친구 같으니…' 해 넘어 갈 무렵이 되자 승용차 두 대에 애들이 나뉘어 타고 들이닥쳤다. 조용하던 집안이 갑자기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아내는 손자 손녀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큰며느리가 차려온 술상 앞에 아들 둘이 앉았다. 가난하게는 살았어도 반듯하게 키우려 노력을 했다. 애들이 착했는지 아니면 내가 무서워서였는지 한 번도 부모의 말을 거역하지 않아서 고맙기도 했다. 두 녀석 다 좋은 대학에 보냈으면 승진을 빨리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애들을 똑바로 바라 볼 수가 없을 정도로 내 어깨가 한 없이 좁게만 느껴졌다. "너희들 역삼이 하고는 가끔 만나냐?" 역삼이는 탱근이 아들로 우리 큰 애 대박이 하고 동갑이다. "역삼이 아버지 사업이 잘 안 되는 것 같고 이번에 고향에 못 내려오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던데요" "흠… 부모가 그 모양이니 원" "네? 아버지 무슨 말씀이신지…" "아, 아니다. 내가 공연한 소리를 했구나." 탱근이는 서울에서 사업을 해서 꽤나 돈을 벌었다. 고향에 내려올 때는 번쩍번쩍 윤이 나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왔다. 오랜만에 오는 고향이니만큼 어른들을 찾아뵙고 인사도 올리고 친구들에게 술도 한 잔 살 줄 아는 꽤 사려 깊은 친구였었다. 여름에는 시원한 냇가에 텐트를 치고 주말을 쉬어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족대로 고기를 잡는 일이며 매운탕을 끓이는 일은 으레 내 차지였다. 이웃 동네에 사는 친구들을 불러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 1년에 한 두 차례 내려오고하던 탱근이가 고향을 찾는 횟수가 잦아졌다. 그 때마다 아내 아닌 다른 여자들을 데려오곤 했는데 사업상 같이 온 것이라 했다. 처음에는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내려올 적마다 사람이 바뀌었다. 아무리 사업이라지만 딸 같은 애들이랑 사업을 같이 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벌써 3년 전 일이다. 길이 좁기는 해도 승용차는 충분히 들어올 수 있는 길이지만 탱근이는 차를 동구 밖에 세워놓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친구들이 여자들 데려오는 것을 싫어하는 눈치가 보이니까 행한 처방이리라. 하루는 탱근이 차 있는 곳에 이르자 짙게 선팅 된 차 안에 누군가 있는 기색이 보였다. 친구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모른 체하자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 날도 들에서 돌아와 몸을 씻고 막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이었다. 대전까지 온 김에 얼굴이나 보고 가려고 들렸단다. 무척 반가웠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찾아온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마침 마늘을 캐어 엮어 단 것이 있어서 아내가 헛간으로 달려가 마늘 두 접을 들고 나왔다. 한사코 사양하는 것을 아내는 굳이 나보고 들어다 실어 주라는 부탁까지 한다. 어떤 낌새를 챈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승용차 가까이 다가가자 브레이크 등에 불이 들어왔다. 차안에 사람이 있다는 증거가 분명했다. "안에 누가 있는가보네?" "응, 우리 가게 경리야. 대전이 집인데 같이 갔다가 올라오는 길이었어." "너 그 말 정말이지?" 어둠속에서도 나의 상기된 얼굴이 보였을까. 아니면 내 억양이 심하게 떨려 나온 탓일까. 탱근이가 대답을 못하고 주춤거린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탱근이의 멱살을 잡아 느티나무 밑에다 메어꽂았다. 갑자기 당해서일까. 힘으론 나를 해 넘기고도 남을 것이지만 어쩐 일인지 어깨로 숨을 몰아쉬면서도 대적할 생각을 않고 있었다. "너 같은 놈이 내 친구라니 어이가 없다. 우리는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보릿고개를 넘으며 힘겹게 살아오긴 했지만 아내 아닌 다른 여자들과 놀아나는 나쁜 친구는 없었다. 다 큰 애들 보기 부끄러우니 앞으론 발걸음도 하지 말거라." "……" "할아버지! 밤 따러 언제 가요?" 초등학교 1학년 손자 녀석이 술만 마시고 있는 우리 3부자(三父子)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래, 그래, 따주고말고, 내일 성묘 갔다가 알밤 한 가방 주워오자" "네, 할아버지!" 조용하던 집안에 전화벨이 크게 울렸다. "아, 여보세요." "나 통근일세. 내일 내려 갈 테니 꼼짝 말고 기다리게" "내일? 혼자 오려거든 아예 그만두게" "왜 혼자야,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함께 내려갈라네. 술이나 많이 준비해놓게." 수화기를 내려놓는 나의 표정을 살피던 두 아들의 얼굴에도 빙그레 미소가 번졌다. 입력 : 2008년 0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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